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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설거지는 설거지일 뿐이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어떤 여성이 쓴 글을 요약,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남자 중에서는 자기가 설거지를 얼마나 자주, 열심히 하는지를 특히 여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그런 자랑은 한두 번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지나치면 품위도 떨어지고 진정성도 의심받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대책 없이 쌓여 있는 설거지를 참다못해 자기가 고무장갑을 꼈고 너무나 설거지를 열심히 해서 접시가 반짝반짝 윤이 났으며 그렇게 모든 그릇에 광을 내느라고 아내는 10분 걸릴 설거지를 자기는 1시간씩이나 걸렸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흔히 남자들이 집안일을 안 해서 그렇지 일단 시작만 하면 설거지든 뭐든 여자들보다 더 잘한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그 허세야말로 매일 그 일을 하는 사람과 어쩌다 한번 하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남자는 어쩌다 한번 한 설거지로 ‘가정적인 남자’라는 칭찬을 거저 받으려는 속셈인데 워낙 집안일이라는 것이 하면 본전이고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는 법이라서 집안일을 매일 하는 사람이라면 1시간 동안 정성을 다 바쳐 거지를 하는 사람의 ‘열성’이 되레 짜증났을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설거지일 뿐이다. 남성들이 남녀평등의 실천 여부로‘설거지’를 이야기하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설거지를 열심히 끝냈다고 해서 집안일에서 설거지가 차지하는 위치가 갑자기 높아진다거나 설거지를 열심히 치러낸 사람이 갑자기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바로 가사노동이며 일상이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기간 중에 반드시 읽게 되어 있는 성경말씀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을 대림절에만 읽게 되듯 마리아에 관한 말씀도 대림절이 아니면 잘 읽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 관해 읽고 설교하는 것이 어쩌다 한 번 설거지를 하고 집안 일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리아는 믿었다
누가복은 1장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천사로부터 탄생 예고를 받았고 아기를 낳기 어렵거나 낳으면 안 되는 어머니를 가졌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비슷합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었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처녀였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더 끄는 대목은 두 이야기의 차이점입니다. 요한의 경우에는 천사가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기의 탄생을 예고했던 데 반해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났다는 점, 요한의 경우는 부모가 지위 높은 제사장 집안이었던 데 반해서 예수의 경우는 신분이 낮은 목수 집안이었다는 점, 아기 탄생이 예고된 장소가 요한의 경우는 성전 안이었는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집이었다는 점 등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나 계층의 차이, 장소의 차이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자기가 남자도 없이 아기를 낳으리라는 그 엄청난 얘기를 듣고도 그 말을 그대로 믿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가 아기를 낳으리라는 말이 마리아에게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은 '방법'애 대한 회의를 넘어섰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구세주가 어떤 방법으로 오시는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반드시 구세주가 와야 하고 그 위대한 일에 자신이 사용될 수 있다면 그 일로 인해 자신이 당해야 할 모욕과 핍박을 무릅쓰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오늘 교독한 누가복음 1장에 전해지는 노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마리아가 노래한 주님, 곧 자신의 태를 빌어 태어나실 구세주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도덕적 혁신을 일으키는 주님이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정치적 혁신의 주님이시며,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경제적 혁신의 주님이십니다.
과연 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영생의 길을 찾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분이셨고,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거기서 내쫓으시며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선언하신 분이셨으며, 헤롯을 여우로 지칭하신 후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 나는 오늘과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내 길을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이렇듯 거칠 것 없고 두려울 것 없이 삶의 모든 면에서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셨습니다.
'옳음'의 가치를 되찾아야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의 신앙과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교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기독교인과 교회에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줄 마음도, 이 거짓된 성전을 허물라고 외칠 믿음도,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패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축적해놓은 부가 자랑거리가 되어버렸고 거짓된 신앙고백과 금은보화로 장식된 성전을 쌓아올리고 있으며 내 길을 가기는커녕 이 세상의 나쁜 풍조를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세상 신문에서 보는 교회에 관한 뉴스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열하고 목사직을 권력인양 세습하고 세상 법을 어기면서까지 나쁜 짓을 한 뉴스이고, 다른 하나는 미담입니다. 앞의 뉴스는 대체로 대교회의 이야기이고 뒤의 뉴스는 대체로 작은 교회 이야기입니다. 나쁜 뉴스는 우리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고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괴로운 일은 이른바 '미담'이란 것들이 사실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얘기라는 점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그것이 '미담'이 되는 사회,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형편이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일 용기와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데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왜, 어쩌다가 교회는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잃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럼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인과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척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라면서 하나님 갖고 사람들을 협박하지만 실제 스스로는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는 잣대로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만의 잣대라는 것이 이기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의 눈과 생각이란 것이 참으로 묘해서 똑같은 일도 남이 하면 나쁘게 보이고 자기가 하면 나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1985년 2월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제가 서울 향린교회에서 예배드리던 중에 처음으로 안병무 선생님의 설교를 들은 날입니다. 저는 한국의 대표하는 신학자의 설교를 듣는 데 대한 커다란 기대를 갖고 그분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과연 놀라운 설교였습니다. 고성을 내지 않으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설교, 독창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성경 해석, 모든 면에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안 선생님은 설교 도중 이런 놀라운 말을 하셨습니다. '남자들이 자기들은 밖에 나가서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여자들에게는 족쇄를 채워놓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런 잘못은 고쳐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칠 방법이 없다. 남자들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남자들은 가만히 두면 절대로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니 여자들도 밖에 나가서 남자들이 하는 짓을 해라. 그래야 남자들이 철이 들고 바뀐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미혼이었으므로 이런 말씀이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관습, 특히 교회의 관습을 정면으로 뒤집는 내용이므로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옳음'이라는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깊게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기준이 없고 잣대가 바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기준은 '무엇이 옳은가?'여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잣대가 기준이 되거나 관습, 전통 따위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남자가 왜 설거지나 하면서 마치 자기가 대단한 일이나 하는 양 생각하는가 하면 가사노동을 함께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내에게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이 되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여자에게 관대했는가?'를 따져보며 으스대지 말고 '우리는 얼마나 옳게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처음부터 여성을 지도자의 위치에서 배제했습니다. 복음서는 읽어보십시오. 복음서는 거의 전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남자들만의 교회였을까요? 우리 교회는 남녀의 비율이 비슷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의 성비(性比)를 보면 여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마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자들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배제됐습니다. 감독제도가 정착하면서 교회에서의 여성 배제는 결정적인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복원되어야 함은 여성에 아부하자는 뜻도 아니고 교인 다수가 여자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이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도 '미담'을 만들어내서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굽은 것을 바로 펴고 울퉁불퉁한 길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구세주를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캐럴을 부르며 '옳음'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명상하고 그것을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설거지는 설거지일 뿐이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어떤 여성이 쓴 글을 요약,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남자 중에서는 자기가 설거지를 얼마나 자주, 열심히 하는지를 특히 여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그런 자랑은 한두 번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지나치면 품위도 떨어지고 진정성도 의심받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대책 없이 쌓여 있는 설거지를 참다못해 자기가 고무장갑을 꼈고 너무나 설거지를 열심히 해서 접시가 반짝반짝 윤이 났으며 그렇게 모든 그릇에 광을 내느라고 아내는 10분 걸릴 설거지를 자기는 1시간씩이나 걸렸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흔히 남자들이 집안일을 안 해서 그렇지 일단 시작만 하면 설거지든 뭐든 여자들보다 더 잘한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그 허세야말로 매일 그 일을 하는 사람과 어쩌다 한번 하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남자는 어쩌다 한번 한 설거지로 ‘가정적인 남자’라는 칭찬을 거저 받으려는 속셈인데 워낙 집안일이라는 것이 하면 본전이고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는 법이라서 집안일을 매일 하는 사람이라면 1시간 동안 정성을 다 바쳐 거지를 하는 사람의 ‘열성’이 되레 짜증났을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설거지일 뿐이다. 남성들이 남녀평등의 실천 여부로‘설거지’를 이야기하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설거지를 열심히 끝냈다고 해서 집안일에서 설거지가 차지하는 위치가 갑자기 높아진다거나 설거지를 열심히 치러낸 사람이 갑자기 훌륭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바로 가사노동이며 일상이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기간 중에 반드시 읽게 되어 있는 성경말씀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을 대림절에만 읽게 되듯 마리아에 관한 말씀도 대림절이 아니면 잘 읽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 관해 읽고 설교하는 것이 어쩌다 한 번 설거지를 하고 집안 일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리아는 믿었다
누가복은 1장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천사로부터 탄생 예고를 받았고 아기를 낳기 어렵거나 낳으면 안 되는 어머니를 가졌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비슷합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었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처녀였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더 끄는 대목은 두 이야기의 차이점입니다. 요한의 경우에는 천사가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나 아기의 탄생을 예고했던 데 반해 예수님의 경우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났다는 점, 요한의 경우는 부모가 지위 높은 제사장 집안이었던 데 반해서 예수의 경우는 신분이 낮은 목수 집안이었다는 점, 아기 탄생이 예고된 장소가 요한의 경우는 성전 안이었는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집이었다는 점 등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나 계층의 차이, 장소의 차이 따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아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자기가 남자도 없이 아기를 낳으리라는 그 엄청난 얘기를 듣고도 그 말을 그대로 믿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가 아기를 낳으리라는 말이 마리아에게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은 '방법'애 대한 회의를 넘어섰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구세주가 어떤 방법으로 오시는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반드시 구세주가 와야 하고 그 위대한 일에 자신이 사용될 수 있다면 그 일로 인해 자신이 당해야 할 모욕과 핍박을 무릅쓰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오늘 교독한 누가복음 1장에 전해지는 노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마리아가 노래한 주님, 곧 자신의 태를 빌어 태어나실 구세주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도덕적 혁신을 일으키는 주님이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정치적 혁신의 주님이시며,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경제적 혁신의 주님이십니다.
과연 주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영생의 길을 찾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분이셨고,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거기서 내쫓으시며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선언하신 분이셨으며, 헤롯을 여우로 지칭하신 후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 나는 오늘과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내 길을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이렇듯 거칠 것 없고 두려울 것 없이 삶의 모든 면에서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셨습니다.
'옳음'의 가치를 되찾아야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의 신앙과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교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기독교인과 교회에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줄 마음도, 이 거짓된 성전을 허물라고 외칠 믿음도,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패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축적해놓은 부가 자랑거리가 되어버렸고 거짓된 신앙고백과 금은보화로 장식된 성전을 쌓아올리고 있으며 내 길을 가기는커녕 이 세상의 나쁜 풍조를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세상 신문에서 보는 교회에 관한 뉴스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열하고 목사직을 권력인양 세습하고 세상 법을 어기면서까지 나쁜 짓을 한 뉴스이고, 다른 하나는 미담입니다. 앞의 뉴스는 대체로 대교회의 이야기이고 뒤의 뉴스는 대체로 작은 교회 이야기입니다. 나쁜 뉴스는 우리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고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괴로운 일은 이른바 '미담'이란 것들이 사실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얘기라는 점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그것이 '미담'이 되는 사회,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형편이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일 용기와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데 문제의 근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왜, 어쩌다가 교회는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잃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과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럼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인과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척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이라면서 하나님 갖고 사람들을 협박하지만 실제 스스로는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는 잣대로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만의 잣대라는 것이 이기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의 눈과 생각이란 것이 참으로 묘해서 똑같은 일도 남이 하면 나쁘게 보이고 자기가 하면 나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1985년 2월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제가 서울 향린교회에서 예배드리던 중에 처음으로 안병무 선생님의 설교를 들은 날입니다. 저는 한국의 대표하는 신학자의 설교를 듣는 데 대한 커다란 기대를 갖고 그분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과연 놀라운 설교였습니다. 고성을 내지 않으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설교, 독창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성경 해석, 모든 면에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안 선생님은 설교 도중 이런 놀라운 말을 하셨습니다. '남자들이 자기들은 밖에 나가서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여자들에게는 족쇄를 채워놓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이런 잘못은 고쳐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칠 방법이 없다. 남자들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남자들은 가만히 두면 절대로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그러니 여자들도 밖에 나가서 남자들이 하는 짓을 해라. 그래야 남자들이 철이 들고 바뀐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미혼이었으므로 이런 말씀이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관습, 특히 교회의 관습을 정면으로 뒤집는 내용이므로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옳음'이라는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깊게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기준이 없고 잣대가 바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기준은 '무엇이 옳은가?'여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잣대가 기준이 되거나 관습, 전통 따위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남자가 왜 설거지나 하면서 마치 자기가 대단한 일이나 하는 양 생각하는가 하면 가사노동을 함께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내에게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이 되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여자에게 관대했는가?'를 따져보며 으스대지 말고 '우리는 얼마나 옳게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처음부터 여성을 지도자의 위치에서 배제했습니다. 복음서는 읽어보십시오. 복음서는 거의 전적으로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남자들만의 교회였을까요? 우리 교회는 남녀의 비율이 비슷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의 성비(性比)를 보면 여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마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여자들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서 배제됐습니다. 감독제도가 정착하면서 교회에서의 여성 배제는 결정적인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복원되어야 함은 여성에 아부하자는 뜻도 아니고 교인 다수가 여자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기독교인이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유도 '미담'을 만들어내서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굽은 것을 바로 펴고 울퉁불퉁한 길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구세주를 기다리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캐럴을 부르며 '옳음'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명상하고 그것을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