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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거리의 연극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순례절기였으므로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는 어떤 짐승이든 타서는 안 되고 걸어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걷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예수님의 행진이 범상한 순례자의 행진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사건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한편 이스라엘 왕들은 즉위할 때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예루살렘을 들어서면서 특별한 행진을 하곤 했습니다. 동원됐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이 때 군중들이 길가에 나와서 즉위하거나 개선하는 왕을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이때 왕은 화려한 안장이 얹힌 기름기 흐르는 멋진 말을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광경 역시 범상치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이것이 무슨 의미였을까요?
우리가 종려주일을 구별해서 지키는 까닭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내내 ‘유다복음서’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서 교회 안팎이 떠들썩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팔았다고 해서 기독교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에는 현재 신약성서에 들어와 있는 네 복음서 이외에 많은 복음서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나 마리아, 도마의 이름으로 전해진 복음서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의 이름으로 복음서가 전해진 일은 좀 특별합니다. 교회는 유다를 원수처럼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복음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유다복음서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영지주의 성격의 문서임을 미루어볼 때 아마 거기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다복음서가 어떤 신앙적, 신학적 가치를 갖고 있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네 복음서 중 그 어느 것도 생각나는 대로 적당히 적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은 다양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한 편의 잘 짜인 연극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가리켜 ‘거리의 연극’(street theater)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
결국 예수님의 최종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졌는데 이 사실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최종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제자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기뻐한 제자들이 있었던 반면 장차 닥쳐올 고난과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는 믿음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들도 강조점을 달리 두어 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입성을 승리한 왕의 개선행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탄식조로 말했다고 전합니다. 반면 마가는 요한과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마가도 군중이 환호하는 모습을 전하기는 하지만 마가의 군중은 요한의 군중과는 다릅니다. 마가의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바깥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가도 분명 이 행진을 승리의 행진으로 그리기는 하지만 뭔지 모를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께서 살아생전에 이렇게 열렬한 대중적인 환호를 받은 적은 이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장소입니다. 바로 그 최후의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렬한 대중적인 환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얘기입니까!
네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와 올리브 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사람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에 그때까지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어 있을 터인데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라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부르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여기만 해도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스가랴 14장 2절 이하에 전해지는 예언에 따르면 올리브 산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서 최후의 전쟁을 벌일 장소입니다. 최후의 전쟁이 벌어질 때 올리브 산은 두 쪽으로 갈라지리라고 스가랴서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행진의 출발지를 올리브 산으로 삼으신 것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싸움이 어둠의 세력, 곧 사탄의 세력과의 최후의 일전임을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구약성서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고 순전한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는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바쳐지는 속죄의 제물을 상징했습니다.
‘새끼 나귀’ 하면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스가랴 9장 9절 이하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버리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메시아
이 행진은 명백히 왕의 행진 또는 메시아의 행진을 그리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며 군인의 활을 꺾어버릴 분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예언자는 이 메시아가 누구의 병거와 군마를 없앤다고 했습니까? 누구의 활을 꺾어버린다고 했습니까? 바빌론이 됐든 로마가 됐든 메시아가 없애버릴 무기는 적군의 무기가 아니라 아군인 이스라엘 군인의 무기였습니다. 메시아는 적군을 무장해제 시켜 평화를 이루는 메시아가 아니라 아군을 무장해제 시켜 평화를 이루는 메시아였습니다.
7절부터 10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습니다. 나귀 등 위에는 안장이 없었으므로 제자들은 자기들 겉옷을 거기 깔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펼쳐놓았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길 위에 펴놓았다고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9장 13절 이하를 보면 왕이 즉위할 때 사람들이 길에다 자기 옷을 깔아놓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이 행진이 왕의 행진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성을 올렸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이 환성은 오늘 교독한 시편 118편 25-26절에서 왔습니다. “호산나!” 로 시작하는 노래는 순례자들이 종착지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까이 왔을 때 불렀던 찬미가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하소서!(Save now)” 또는 “우리를 구하소서!(Save us)”라는 의미입니다. 구해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외침이 아니라 구해주셨기에 기뻐 외치는 환호성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환호의 도가니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그런데 여기서 복음서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군중들의 환호에 대해 예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복음서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복음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환호성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그림자는 군중의 환호성에 대해서 예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대목에서 더욱 짙어집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행진을 군림하는 왕, 지배하는 메시아의 행진으로 보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행진은 수난과 죽음으로 가는 행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메시아였지만 군중이 기대했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군중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의 정점인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2006년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반이민법 철폐 및 이민법 개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 주간에 이곳 나성에서만 무려 50만 명이 모여 평화행진을 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수백만 명이 행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괄적 이민개혁 법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수백만 명이 모여 의사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상원의원들은 이를 외면했습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예언하기를, 오시는 메시아는 스스로 무장해제 하신 분일 뿐 아니라 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물레를 잣는 간디의 모습을, 맨손으로 손에 손을 잡고 어깨를 걸고 비폭력 평화행진을 벌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들은 적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저항을 벌인 분들입니다.
한때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저항 수단에 대해 회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자위 수단은 갖춰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영혼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은 비록 군중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아니었을지언정 그들의 염원만큼은 그대로 담아서 걸었던 행진이었습니다. 그때의 행진에 담겨 있던 군중의 염원이 이 십자가라는 역설적인 방법으로 성취됐던 것처럼 2006년 미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진이 인간다움 삶이라는 결실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거리의 연극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순례절기였으므로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는 어떤 짐승이든 타서는 안 되고 걸어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걷지 않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예수님의 행진이 범상한 순례자의 행진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사건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한편 이스라엘 왕들은 즉위할 때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예루살렘을 들어서면서 특별한 행진을 하곤 했습니다. 동원됐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이 때 군중들이 길가에 나와서 즉위하거나 개선하는 왕을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이때 왕은 화려한 안장이 얹힌 기름기 흐르는 멋진 말을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광경 역시 범상치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이것이 무슨 의미였을까요?
우리가 종려주일을 구별해서 지키는 까닭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내내 ‘유다복음서’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서 교회 안팎이 떠들썩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팔았다고 해서 기독교로부터 원수 취급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에는 현재 신약성서에 들어와 있는 네 복음서 이외에 많은 복음서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나 마리아, 도마의 이름으로 전해진 복음서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의 이름으로 복음서가 전해진 일은 좀 특별합니다. 교회는 유다를 원수처럼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복음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유다복음서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영지주의 성격의 문서임을 미루어볼 때 아마 거기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다복음서가 어떤 신앙적, 신학적 가치를 갖고 있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네 복음서 중 그 어느 것도 생각나는 대로 적당히 적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은 다양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한 편의 잘 짜인 연극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를 가리켜 ‘거리의 연극’(street theater)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
결국 예수님의 최종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졌는데 이 사실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최종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제자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기뻐한 제자들이 있었던 반면 장차 닥쳐올 고난과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죽는다는 믿음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서들도 강조점을 달리 두어 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입성을 승리한 왕의 개선행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탄식조로 말했다고 전합니다. 반면 마가는 요한과는 강조점이 다릅니다. 마가도 군중이 환호하는 모습을 전하기는 하지만 마가의 군중은 요한의 군중과는 다릅니다. 마가의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바깥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가도 분명 이 행진을 승리의 행진으로 그리기는 하지만 뭔지 모를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께서 살아생전에 이렇게 열렬한 대중적인 환호를 받은 적은 이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장소입니다. 바로 그 최후의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렬한 대중적인 환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얘기입니까!
네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와 올리브 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사람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에 그때까지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어 있을 터인데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라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부르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여기만 해도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스가랴 14장 2절 이하에 전해지는 예언에 따르면 올리브 산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서 최후의 전쟁을 벌일 장소입니다. 최후의 전쟁이 벌어질 때 올리브 산은 두 쪽으로 갈라지리라고 스가랴서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행진의 출발지를 올리브 산으로 삼으신 것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싸움이 어둠의 세력, 곧 사탄의 세력과의 최후의 일전임을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구약성서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고 순전한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는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바쳐지는 속죄의 제물을 상징했습니다.
‘새끼 나귀’ 하면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스가랴 9장 9절 이하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버리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메시아
이 행진은 명백히 왕의 행진 또는 메시아의 행진을 그리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며 군인의 활을 꺾어버릴 분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예언자는 이 메시아가 누구의 병거와 군마를 없앤다고 했습니까? 누구의 활을 꺾어버린다고 했습니까? 바빌론이 됐든 로마가 됐든 메시아가 없애버릴 무기는 적군의 무기가 아니라 아군인 이스라엘 군인의 무기였습니다. 메시아는 적군을 무장해제 시켜 평화를 이루는 메시아가 아니라 아군을 무장해제 시켜 평화를 이루는 메시아였습니다.
7절부터 10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습니다. 나귀 등 위에는 안장이 없었으므로 제자들은 자기들 겉옷을 거기 깔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펼쳐놓았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길 위에 펴놓았다고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9장 13절 이하를 보면 왕이 즉위할 때 사람들이 길에다 자기 옷을 깔아놓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마가복음은 이 행진이 왕의 행진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환성을 올렸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이 환성은 오늘 교독한 시편 118편 25-26절에서 왔습니다. “호산나!” 로 시작하는 노래는 순례자들이 종착지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까이 왔을 때 불렀던 찬미가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하소서!(Save now)” 또는 “우리를 구하소서!(Save us)”라는 의미입니다. 구해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외침이 아니라 구해주셨기에 기뻐 외치는 환호성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환호의 도가니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그런데 여기서 복음서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군중들의 환호에 대해 예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복음서가 어떤 방식으로든 전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복음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환호성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그림자는 군중의 환호성에 대해서 예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대목에서 더욱 짙어집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행진을 군림하는 왕, 지배하는 메시아의 행진으로 보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행진은 수난과 죽음으로 가는 행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메시아였지만 군중이 기대했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군중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의 정점인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2006년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반이민법 철폐 및 이민법 개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 주간에 이곳 나성에서만 무려 50만 명이 모여 평화행진을 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수백만 명이 행진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괄적 이민개혁 법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수백만 명이 모여 의사표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상원의원들은 이를 외면했습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예언하기를, 오시는 메시아는 스스로 무장해제 하신 분일 뿐 아니라 아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물레를 잣는 간디의 모습을, 맨손으로 손에 손을 잡고 어깨를 걸고 비폭력 평화행진을 벌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들은 적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저항을 벌인 분들입니다.
한때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저항 수단에 대해 회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자위 수단은 갖춰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영혼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진은 비록 군중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아니었을지언정 그들의 염원만큼은 그대로 담아서 걸었던 행진이었습니다. 그때의 행진에 담겨 있던 군중의 염원이 이 십자가라는 역설적인 방법으로 성취됐던 것처럼 2006년 미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진이 인간다움 삶이라는 결실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