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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우목사 (잠실중앙교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년 중 가장 기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모든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기뻐합니다. 벌써 12월만 되면 우리는 성탄절 장식을 보고, 또 크리스마스 케롤을 들으면서 성탄절의 기쁨에 잠깁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왜 우리가 성탄절에 기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분위기에 휩싸여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쁨의 이유, 기쁨의 근거를 다시 한번 새롭게 확인해야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두 개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이름은 우리가 성탄에 왜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아이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말과 같은 말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는 이유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에 기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름 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성탄절에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탄절에 세상에 오셨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성탄절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우리는 성탄절에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여기 성탄의 또 하나의 의미가 있고 우리가 성탄에 기뻐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을 통해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임마누엘의 은총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을 복이라 생각하십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하면 얼마든지 웃고 살아도 되겠는데 풀죽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축복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축복관, 행복관이 먼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는 한 아무리 복을 받아도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합니다.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니 큰 은총 속에 있으면서도 늘 불평입니다. 복이 무엇인지를 먼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먼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은 언제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에서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생각할 때 자손과 땅을 생각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은 많으리라는 자손의 축복, 그리고 동서남북을 너에게 주리라는 땅의 약속, 이것 분명 아브라함이 받은 큰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은 최고의 복음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5장1절에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의 방패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가장 큰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가장 큰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자손과 땅의 모든 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실 때 다른 모든 복은 따라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야곱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저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했고 하나님 함께 하심으로 영광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마음이 기쁘고 행복합니까? 그래야 기독교인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원 성취 여부도 아닙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도 아닙니다. 문제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는 편이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시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모든 사상, 모든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 하나님께 나가가자 합니다. 방법과 이야기는 달라도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찾고자 함입니다. 도덕, 정결, 수도, 율법, 선행, 극기, 고행. 이 모든 방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정반대의 입장에 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요 복음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복 받기 위해, 천당 가기 위해, 구원 얻기 위해, 내가 좀더 진실하게 의롭게 살자 - 이런 생각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종교요 성경적으로 말하면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신앙 가지고는 평생을 믿어도 깨끗한 웃음 한 번 웃을 수 없습니다. 평생을 예수 믿어도 그 마음에 진정한 은혜 한번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신앙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여기에 은혜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인생과 함께 거하시며 인생과 함께 교제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교제는 깨어졌습니다.
이 교제가 깨어지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듭해서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장막을 칠 때는 그 장막 가운데 성막을 치게 하였습니다. 성막에 임재하심으로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뵈올 때 한결 같이 그들이 두려워하며 죽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접 만나고 직접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사람이 되셔서 아기 예수로 인간 문화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요 여기서 임마누엘이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천막을 쳤다는 뜻입니다. 이 천막이라는 헬라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회중가운데 하나님 거하셨던 성막과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막을 치고 함께 거했듯이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들 가운데 육신의 장막을 치고 직접 함께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어떤 분이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날 험한 세상을 살다가 실수해서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려다보고는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 것 같으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게나" 하고는 지납니다. 조금 있으니 또 한 사람이 들여다보더니 "사람이란 아차 하면 실수하는 법이니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면서 그냥 또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더니 "이거 큰일났구나" 하고 놀라면서 급히 사다리를 구하여 직접 내려와서는 구해 주었습니다. 비유하기를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이고, 둘째 사람은 공자이며, 세번째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잘못되었느냐고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살 것이라고 가르치고만 계신 것 아닙니다. 친히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이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셨다는 말은 소유권의 이전을 뜻합니다. 원래는 하나님 편에 계셨던 예수님입니다. 이제는 우리편으로, 사람 편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주님 탄생으로 시작된 임마누엘은 승천으로 완성됩니다. 주님 승천하실 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실 주님 세상에 계실 때는 임마누엘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저기는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 저 사람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방문을 받은 사람들 중 아무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황제가 오두막집에 사는 몹시도 가난한 사람을 찾아갔는데 주인은 황제를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황제는 그 집에서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하루 밤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떠났는데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제 나와 함께 잔 저 분이 이 나라의 황제였다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물었습니다.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소원을 말하라."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를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 이 사실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하루 밤을 우리와 함께 지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냥 단순히 곁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곧 우리를 도우심을 뜻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힘을 주시고, 괴로울 때 격려하시고, 모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힘이 되어 주시고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낙심 가운데 있습니까? 왜 나 혼자인 것처럼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주님이 임마누엘로 계십니다. 주님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곁에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십시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예수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세상의 어떤 세력도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 주님 편에서는 엄청난 자기 희생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냥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주님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지기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이야기를 여러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평생 문둥병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나환자와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나환자들만 사는 몰로카이 섬을 지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전도하기로 결심합니다. 설교사로서 많은 구호 물자를 가지고 섬을 방문하여 저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미안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만을 내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마침내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에게 나병을 주시옵소서." 결국 그는 나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찾았을 때 저들이 마음 문을 열어줍니다. 나환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전에도 환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었고 치료를 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나환자가 되고서야 저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이 사람이 나환자 된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마음을 그림자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 의로운 자리에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함께 죄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에 나타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요 자기 희생입니다. 이런 희생을 지불하시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구세주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엄청난 자기 희생을 지불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끊임없이 임마누엘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를 구원하셨고,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를 버리시겠습니까? 내가 잘못해도 내가 범죄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깨닫고 보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나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내가 부를 때 응답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은혜 내리시고, 힘과 능력 더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십 년 전에 베들레헴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하신 곳에는 예배당이 세워져있습니다. 예수 탄생 교회입니다. 이 예배당의 특징은 문이 작다는 것입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문입니다.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밑으로 굴 같은 것이 있고 그 안에 내려가면 길이가 조그마한 방이 있습니다. 거기 바닥에 보면 별 모양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곳에 "이곳이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곳이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섰을 때 이곳이 주님이 나신 곳이다 하는 생각에 감격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거기 켜놓은 수많은 등불들과 또 이상한 장식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요상한 장식들로 인해 말구유의 주님 탄생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뜰로 나오니 마침 거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영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합창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감격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그 가운데 강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 찬송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주님은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른 후 서로 박수를 쳤으며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저 안에 저렇게 꾸며놓은 장소와는 아무 상관없다. 지금 내 마음속에 그리고 저 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가. 예수님은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넘어 지금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 온 세계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살아 계십니다.
성탄의 은총은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임마누엘의 주님, 이천 년 전 저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큰 은총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이 시간 여기 고개 숙인 모든 주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임마누엘의 은혜로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시고, 임마누엘 은총으로 주께 영광 돌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년 중 가장 기뻐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모든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기뻐합니다. 벌써 12월만 되면 우리는 성탄절 장식을 보고, 또 크리스마스 케롤을 들으면서 성탄절의 기쁨에 잠깁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왜 우리가 성탄절에 기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분위기에 휩싸여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쁨의 이유, 기쁨의 근거를 다시 한번 새롭게 확인해야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두 개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이름은 우리가 성탄에 왜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아이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말과 같은 말로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는 이유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에 기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름 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성탄절에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탄절에 세상에 오셨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성탄절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우리는 성탄절에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여기 성탄의 또 하나의 의미가 있고 우리가 성탄에 기뻐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을 통해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임마누엘의 은총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을 복이라 생각하십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만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하면 얼마든지 웃고 살아도 되겠는데 풀죽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축복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축복관, 행복관이 먼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는 한 아무리 복을 받아도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합니다. 복을 복으로 알지 못하니 큰 은총 속에 있으면서도 늘 불평입니다. 복이 무엇인지를 먼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먼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은 언제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에서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생각할 때 자손과 땅을 생각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은 많으리라는 자손의 축복, 그리고 동서남북을 너에게 주리라는 땅의 약속, 이것 분명 아브라함이 받은 큰복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은 최고의 복음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5장1절에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의 방패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가장 큰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가장 큰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자손과 땅의 모든 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실 때 다른 모든 복은 따라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야곱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라."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저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했고 하나님 함께 하심으로 영광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마음이 기쁘고 행복합니까? 그래야 기독교인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소원 성취 여부도 아닙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도 아닙니다. 문제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는 편이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시는 것을 생각하는 편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모든 사상, 모든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 하나님께 나가가자 합니다. 방법과 이야기는 달라도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찾고자 함입니다. 도덕, 정결, 수도, 율법, 선행, 극기, 고행. 이 모든 방법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정반대의 입장에 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요 복음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복 받기 위해, 천당 가기 위해, 구원 얻기 위해, 내가 좀더 진실하게 의롭게 살자 - 이런 생각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종교요 성경적으로 말하면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신앙 가지고는 평생을 믿어도 깨끗한 웃음 한 번 웃을 수 없습니다. 평생을 예수 믿어도 그 마음에 진정한 은혜 한번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신앙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 여기에 은혜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인생과 함께 거하시며 인생과 함께 교제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교제는 깨어졌습니다.
이 교제가 깨어지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듭해서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장막을 칠 때는 그 장막 가운데 성막을 치게 하였습니다. 성막에 임재하심으로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뵐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뵈올 때 한결 같이 그들이 두려워하며 죽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접 만나고 직접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사람이 되셔서 아기 예수로 인간 문화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요 여기서 임마누엘이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천막을 쳤다는 뜻입니다. 이 천막이라는 헬라어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회중가운데 하나님 거하셨던 성막과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막을 치고 함께 거했듯이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들 가운데 육신의 장막을 치고 직접 함께 거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요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어떤 분이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날 험한 세상을 살다가 실수해서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내려다보고는 "아이구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 것 같으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게나" 하고는 지납니다. 조금 있으니 또 한 사람이 들여다보더니 "사람이란 아차 하면 실수하는 법이니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면서 그냥 또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람은 우물 안을 들여다보더니 "이거 큰일났구나" 하고 놀라면서 급히 사다리를 구하여 직접 내려와서는 구해 주었습니다. 비유하기를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이고, 둘째 사람은 공자이며, 세번째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잘못되었느냐고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살 것이라고 가르치고만 계신 것 아닙니다. 친히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이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셨다는 말은 소유권의 이전을 뜻합니다. 원래는 하나님 편에 계셨던 예수님입니다. 이제는 우리편으로, 사람 편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주님 탄생으로 시작된 임마누엘은 승천으로 완성됩니다. 주님 승천하실 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실 주님 세상에 계실 때는 임마누엘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저기는 계실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 저 사람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방문을 받은 사람들 중 아무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황제가 오두막집에 사는 몹시도 가난한 사람을 찾아갔는데 주인은 황제를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황제는 그 집에서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하루 밤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떠났는데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제 나와 함께 잔 저 분이 이 나라의 황제였다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물었습니다.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소원을 말하라."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를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 이 사실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하루 밤을 우리와 함께 지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냥 단순히 곁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곧 우리를 도우심을 뜻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힘을 주시고, 괴로울 때 격려하시고, 모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힘이 되어 주시고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낙심 가운데 있습니까? 왜 나 혼자인 것처럼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주님이 임마누엘로 계십니다. 주님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곁에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십시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예수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세상의 어떤 세력도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 주님 편에서는 엄청난 자기 희생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냥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주님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지기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이야기를 여러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평생 문둥병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나환자와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나환자들만 사는 몰로카이 섬을 지나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전도하기로 결심합니다. 설교사로서 많은 구호 물자를 가지고 섬을 방문하여 저들을 도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미안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만을 내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마침내 다미안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에게 나병을 주시옵소서." 결국 그는 나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찾았을 때 저들이 마음 문을 열어줍니다. 나환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 전에도 환자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었고 치료를 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도 나환자가 되고서야 저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이 사람이 나환자 된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마음을 그림자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 의로운 자리에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함께 죄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에 나타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요 자기 희생입니다. 이런 희생을 지불하시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구세주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엄청난 자기 희생을 지불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끊임없이 임마누엘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를 구원하셨고,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를 버리시겠습니까? 내가 잘못해도 내가 범죄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깨닫고 보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나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내가 부를 때 응답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은혜 내리시고, 힘과 능력 더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십 년 전에 베들레헴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하신 곳에는 예배당이 세워져있습니다. 예수 탄생 교회입니다. 이 예배당의 특징은 문이 작다는 것입니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문입니다.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면 밑으로 굴 같은 것이 있고 그 안에 내려가면 길이가 조그마한 방이 있습니다. 거기 바닥에 보면 별 모양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그곳에 "이곳이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곳이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섰을 때 이곳이 주님이 나신 곳이다 하는 생각에 감격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거기 켜놓은 수많은 등불들과 또 이상한 장식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요상한 장식들로 인해 말구유의 주님 탄생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뜰로 나오니 마침 거기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영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합창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감격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그 가운데 강한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 찬송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주님은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른 후 서로 박수를 쳤으며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저 안에 저렇게 꾸며놓은 장소와는 아무 상관없다. 지금 내 마음속에 그리고 저 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가. 예수님은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넘어 지금 찬송을 부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 온 세계 어디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마누엘로 함께 살아 계십니다.
성탄의 은총은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임마누엘의 주님, 이천 년 전 저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큰 은총을 감사 드립니다. 이제 이 시간 여기 고개 숙인 모든 주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임마누엘의 은혜로 세상의 어떤 어려움에서도 승리하게 하시고, 임마누엘 은총으로 주께 영광 돌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