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성경의 모범적인 아버지는?

아버지주일이 주는 느낌은 어머니주일의 느낌과는 사뭇 다릅니다. 어머니주일에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강조하게 되는 데 반해서 아버지주일에는 올바른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머니주일에는 어머니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긍정과 감사를 떠올리는 반면 아버지주일에는 아버지가 해야 할 일과 과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비단 제가 아버지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세상은 남자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늘 예배는 아버지주일 예배이자 졸업예배로 드립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는 초등학교 졸업생 2명, 중학교 졸업생 9명,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생 3명이 있습니다. 성인 교인 숫자에 비하면 많은 숫자입니다. 특별히 오랜만에 고등학교 졸업생이 있습니다. 그것도 세 명이나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 순서 중에는 졸업예배에 해당하는 순서가 많고 아버지주일 순서는 설교와 공동으로 드리는 ‘아버지의 기도’ 밖에 없습니다. 이래저래 아버지주일은 어머니주일보다 대접을 못 받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주일을 맞아서 성경에 모범이 될 만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찾아봤습니다.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아브라함을 생각해봤습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아버지가 어떻게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은 내리 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그는 아버지와 고향을 등짐으로써 과거와 과감하게 단절했습니다. 과거와 단절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와 단절하는 것보다는 덜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려 함으로써 자식을 버리려 했습니다. 이것은 미래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채 살아가야 할 미래란 아브라함에게는 무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소돔 성을 두고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했던 그가 유독 아들 문제만은 이상하리만큼 고분고분했습니다. 이 점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좌우간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은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이삭은 어떨까요? 그는 작은 아들 야곱에게 속아서 그를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해준 아버지입니다. 아무리 늙어 눈이 어두워졌다 해도 그렇지, 자기 자식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로서 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그는 야곱에게는 좋은 아버지였을지 몰라도 에서에게는 야속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의 자식에 대한 ‘편애’(偏愛)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편애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 편애는 한쪽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다른 한쪽에 사랑을 쏟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편애는 한편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광신(狂信)이 지나친 믿음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인 것처럼 말입니다. 편애는 편애에서 제외된 사람만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편애되는 사람 역시 불행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편애를 쏟아 부은 자식이 잘못되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고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분노를 터뜨리는데 사실은 그가 자식을 그렇게 잘못 키웠기 때문에, 곧 잘못 사랑했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편애는 사랑의 과잉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은 어땠습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아버지란 면에서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역시 좋은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모세는 민족해방이라는 큰 일로 워낙 공사다망해서 그랬는지 좋거나 나쁘거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분명 자식이 있었지만 성경에 그려져 있는 모세의 모습에서는 아버지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가야하는 중차대한 직무 때문에 아버지 노릇을 할 시간이 없었을까요?

사사기를 보면 입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가 등장합니다. 사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는 딸 때문에 더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가장 먼저 자기를 환영하러 나오는 사람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개선장군이 되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마중 나왔던 사람은 사랑하는 그의 딸이었습니다. 사정 얘기를 들은 딸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아버지의 서원대로 죽어갔습니다. 이런 입다는 훌륭한 사사였을지는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낙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 모범적인 아버지가 없을까?

왜 구약성서에는 모범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을까요? 성경의 모범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만한 모범이 없다면 따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버지 상이 바로 이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봤는데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구약성경 시대는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왕처럼 군림했습니다. 물론 왕도(王道)라는 것이 있듯이 부도(父道)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도나 부도 모두 그것을 따를지 여부는 당사자 왕이나 아버지에게 달려 있습니다. 곧 올바른 왕, 올바른 아버지의 길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단이 없다는 뜻입니다. 왕이 절대 권력을 가졌듯이 아버지도 가정에서는 그랬습니다. 아버지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강제할 수단이 없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의지에 달려있었으므로 아버지가 굳이 모범을 보이지 않아도 됐던 것입니다. 물론 잠언 같은 책을 보면 암시적으로나마 모범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므로 아버지의 노력이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가정에서 아버지의 힘이 워낙 막대했으므로 모범을 보이는 문제 역시 전적으로 아버지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좋은 아버지의 기준이 그때는 지금과 크게 달랐습니다. 많은 점에서 달랐지만 교육 문제 하나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전문적인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교사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훈계하고 가르쳤습니다. 때로는 매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육이 부모의 손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 됐습니다. 교육은 전문적인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교사들에게 맡겨진 지 오랩니다. 아버지는 그저 돈을 벌어 그런 교육을 뒷바라지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직접 교육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오히려 부모는 아버지, 어머니를 막론하고 자식들에게 절절 매다시피 합니다. 자식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느라 바쁜 형편입니다. 옛날에는 좋은 교육을 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였는데 지금 좋은 아버지는 좋은 교육(대체로 좋은 입시교육)을 받도록 뒷바라지를 잘 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입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기러기 아빠도 감수합니다. 기러기 아빠는 옛날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이기를 포기한 아버지나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과거와 지금 중 어느 편이 더 좋은 것일까를 쉽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전체가 변했으므로 어떤 하나의 기준만 갖고 현실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 부모들도 그랬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도,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던 입다도 자기 자식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입다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기 때문에 스스로 제물이 되려는 딸을 막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입다도 자기 딸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입다같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달라졌고 가치관이 달라졌으며 사람의 성품도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2-3천 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처럼 못합니다. 아마 하나님도 같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법칙도 있습니다. 모범적인 아버지, 또는 부도(父道)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제대로 자식을 사랑하고 내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희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 자식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똑같은 희망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희망이 이루어질 리 없습니다. 내 아이가 겸손한 신앙을 갖고 살아가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내가 내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가 그 기대의 내용을 내 삶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한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결국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요 좋은 신앙인이 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