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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심령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책(시23:3)
릭 워렌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위의 말씀은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기적으로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삶이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들은 실망과 좌절감과 절망으로 마음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모두가 지치며 실수하고 좌절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과거로부터 받은 남이 모르는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상처와 패배의 아픔과 감정적인 불안을 안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불안한 것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까? 우리의 삶에서 다음 세 가지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소생시켜 주십니다.
1. 하나님께서 나의 죄책감을 제거하시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내 슬픔으로부터 해방시키도록 하십시오.
3. 하나님께서 나의 불평을 바꾸도록 하십시오.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불평 때문에 우리들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합니다.
1. 하나님께서 내 죄의식을 제거하게 합니다.
죄책감보다 영혼을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없습니다.
(시38: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두 가지 문제가 야기됩니다.
⑴ 우리 모두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실수를 합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들은 죄의식을 안고 삽니다.
⑵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식을 안고 갑니다.
(시38: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죄책감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가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를 매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으며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매장시켜 버렸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적절하게 않은 때에 죄의식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죄를 부인하는 것이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소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 큰 죄가 아니라고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지금까지 기억하십니까? 극소화하는 것도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합리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이제는 그런 것들이 죄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행운을 알려주는 과자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두 번 저지르게 되면 처음 저지를 때보다 훨씬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됩니다.”
살인을 열 번이나 하게 되면 처음으로 살인할 때처럼 그렇게 나쁘게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 어떤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우리의 양심이 그 점에 대하여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죄책감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첫 번째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다손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근거하여 자신이 잘못한 것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항상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합리화하는 것은 합리화한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괜찮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서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머리를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내가 잘못한 것과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을 측정하는 저울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저울을 조정해서 내가 나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문제가 결코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자책을 합니다. 자신 자신을 처벌합니다. 우리 마음 속으로는 누가 내 삶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지불해야 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잠재 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합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아파질 수가 있습니까?물론입니다. 죄의식이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확실히 그렇습니다. 죄의식이 우리를 실패자라고 느끼게 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던 많은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의기소침하게 됩니까? 우리가 성공할 수 없다는 죄의식이 마음 속에서 강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어떤 방법도 죄의식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 해결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죄의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실 수가 있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지은 죄뿐아니라 앞으로 짓게 될 모든 죄악들과 실수, 그리고 후회하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위하여 지불하신 대가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모든 죄의식이 제거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우리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죄들을 저질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의 용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미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하나님께 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뇌물을 써서 용서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신뢰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가 아주 깨끗한 사람이 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깨끗한 양심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수없이 많이 간구했는데도 아직도 죄의식을 왜 느끼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자유롭게, 완전히 아무 조건없이 우리가 처음에 요청할 때에 죄의식을 완전히 제거해 주십니다.
이미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계속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첫 번에 요청할 때에 이미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죄라고 느낀다면 그런 느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나쁘게 느끼며 우리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는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합니다. “그런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한 후에는 “그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십니까?
(골2:13~14)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지워졌다는 말은 모든 죄가 다 완전히 제거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늘 완전하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다속 제일 깊은 곳에 던져 버리시고 다시는 재론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꾸 재론합니다. 천국에 가게 되면 제일 첫번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용서함 받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십니다. 이 사실이 성경상에 나타난 아주 놀라운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나와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정말로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릴 수가 있으실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기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시기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우리 죄를 도말하십니다. 그 말씀은 그 죄에 대해서는 다시 재론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무효로 인정하십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 죄의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우리가 청구서를 지불한 후에도 그 청구서에 대하여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청구서를 지불하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용서함 받은 죄를 가지고 괴로워 하십니까?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백한 죄를 잊어버리시는데 우리가 안고서 고민할 이유가 있습니까?하나님께서 더 이상 문제도 삼지 않으시는 것들을 가지고 왜 자꾸 자신을 괴롭히십니까?정말로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지를 못하신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나 잘못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수하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복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써 이미 처벌하신 것을 가지고 왜 내가 자신을 처벌하려고 합니까?예수님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못박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죄의식을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내 슬픔을 제거하시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모든 것들은 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일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상처를 받게 되며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한 곳입니다. 어느날은 이유도 모르게 고독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입니다. 어떤 날은 절망에 사로잡히실 것입니다. 어떤 날은 홀로만 이런 일을 당한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슬픔을 맛보고 손실과 재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께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께.
작년에 20년간 함께 살아온 결혼 생활이 끝장났습니다.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혼한 상태에서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나 감정이 상해 있고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배척 당했다는 심정을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슬픔에 잠겨 있고 제 마음은 고독함으로 신음합니다. 저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빈집에 가서는 울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는 것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로 너무 바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순간 순간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순간을 이기기가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감정적으로 손상되어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삶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목사님, 제발 상처받은 제 맘을 도와주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상처를 아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의 아픈 곳을 돌봐 주십니다. 본 교회의 성도님들이 함께 상처와 위기를 돕기 위하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텅 빈 마음과 허전한 마음을 오직 예수님께서만 채워 주실 수가 있습니다.
마음 속이 찢어지는 것 같은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삶의 슬픔이 극도에 달해 견딜 수 없을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자신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십니까?“만일, 이랬었더라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십니까?내게 상처주는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감추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십니까? 그런 다음에는 고독함을 느끼면서 홀로 불행하게 사십니까? 아주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상에 나오는 다윗은 슬픔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에 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잘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31편 9절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흘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마음 속에 상처를 입는 것이 얼마나 자기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이해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큰 실수를 저지르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로 고통을 받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마음 속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자가 세상을 떠나서 슬픔에 잠깁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거나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은 우리가 어떻게 슬픔을 다루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 것이 시련 51편에 나옵니다. 죄 때문에 상한 심령이라면 시편 51편을 읽으시면서 다시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슬픔에 잠겼습니다. 밧세바가 이런 불륜의 관계로 인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갓난 아이가 아주 병들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갓난 아기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제 잘못으로 저 아기가 고통을 당합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 제 실수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쁜 영향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를 살려 주십시오. 그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그러나 그 아기는 끝내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슬픔 가운데서 다윗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세 가지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신다면 이 세 가지를 하셔야 합니다.
● 세 가지 해야 될 일들(삼하 12장)
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당신은 부모나 동업자나 친구에 의하여 상처를 받았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슬퍼할지라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치유 받으며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첫 단계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배경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를 어느 누구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는 그 첫 단계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첫 번으로 이 단계가 꼭 필요합니다.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⑵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삼하 12:20)과장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념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살아가면서 고통은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피할 길이 없으나 불행함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것을 너무나 오래 간직함으로 계속 애통하게 합니다. 슬픔을 너무 오래 안고 살 것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이것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마시고 “하나님, 이 환경을 통해서도 역사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⑶ 잃어버린 것들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삼하 12:24)
어떤 분들은 지금 당면한 슬픔을 안고 고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슬픔들이 여러분들을 더 치명적으로 이끌도록 하시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삶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고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식과 슬픔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삶이 우리 삶의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간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통의 노예로 남아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나의 원망을 바꾸시게 합니다.
불평이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들 때문에 우리들은 죄의식을 느끼나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것들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살면서 상처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입니다. 삶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줄 것입니다. 어떻든 상처를 받으며 마음이 아픕니다. 삶의 상처를 받을 때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쓴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 “bitter”와 “better”의 “I”의 차이입니다.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환경이 내게 치명상을 가하게 할 수도 있고 내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상처를 받을 때에 더욱 더 쓴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만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에,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위에 고통이 올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Job5:2) To worry yourself to death with resentement would be a foolish, senseless thing to do
분노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에게 상처를 안겨 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전혀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우리가 계속 마음 속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지금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에 대하여 분노를 느낄 때마다 다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는 아직도 그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없으나 아직도 그들이 내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과거의 상처를 계속 안고 사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만 상처를 줄뿐입니다.
(욥18:4)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불평을 어떻게 다룹니까?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이 세상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공평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공평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늘 이루어지는 것처럼 세상에서 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이 잘되고 번영합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많은 세사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온갖 범죄와 불공평, 편견, 인종차별, 성폭행, 강간, 살인, 상처와 남용이 현존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복수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복수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먹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엡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어느 곳이 천당이고 어느 곳이 지옥입니까?모든 쓴 마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용서해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해 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쓴 마음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쓴 마음을 품게 하면 나는 실제로는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과 선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들과 악한 것들과 악과 편견과 죄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대하여 내가 눈이 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이고 해로우며 상처받은 일까지라도 나를 바꾸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내가 쓴 마음을 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똑같은 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의 상처를 고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제가 죄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들 마음에 무엇인가 떠올라서 사라지지 않고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들은 없습니까? 모든 것을 아니라고 하고 합리화하고 경감시키고 합리화한 후에도 역시 내 마음이 뛰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런 방법으로는 죄를, 마음에 받은 상처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죄를 제거할 수가 없으나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전문가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죄를 계속 안고서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과거가 계속 내게 상처를 주는 것을 중단케 하십시오.
자아 개선을 하는 책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참 구세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슬픔을 어떻게 다루십니까?슬픔에 대해 애통하시기보다는 신음하십니까? 잃어버린 것을 보기보다는 남아 있는 것을 보십니까?현실을 직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슬픔이 나를 짓눌러서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십니까?자신의 선택으로 만든 슬픔의 노예가 되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문을 잠근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스스로 문을 잠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슬픔을 제거해달라고 말씀하십시오.
원망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 지금도 나를 괴롭게 하도록 하십니까?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여러분의 슬픔, 죄책감, 그리고 원망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시편 42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왜 우리가 낙망합니까? 왜 불안해합니까? 우리가 낙망할 때에 다윗은 목자들이 쓰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 단어는 양이 스스로 들어간 후에 나올 수 없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양들은 이렇게 지음을 받아서 한쪽으로 넘어져서 네 발이 다 하늘을 향하게 되면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리로 허공을 치고 헛수고일 뿐입니다.
“매애”하고 울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상태에서는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동물이나 와서 공격할 수 있고 양은 속수무책이 됩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양이 다리를 하늘로 향하여 누어 있게 되면 위에서 가스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가스가 위를 굳어지게 하여 공기가 몸 속에서 유통하는 것을 막아 한 시간 내로 질식하게 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리가 마비됩니다. 뜨거운 날에 이런 상태에 처한 양은 수 시간 내에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런 극심한 상태를 도와 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양을 회복시킬 때는 즉각적으로 회복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양을 회복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우선 다리를 위로 향하고 있는 양에게로 목자가 옵니다.
첫 번째로 목자는 네 다리를 사랑으로 마사지 해주어 다리에 피가 통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양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양에게 안정감을 심어 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손을 배에다 대고 양을 부드럽게 돌립니다. 다리가 약해져서 스스로 서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들어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면 점차로 다리에 힘을 얻으며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목자가 양이 이제는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느낄 때에 양이 부드럽게 목자의 손을 빠져 나가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슬픔, 죄책감이나 원망으로 가득 차서 스스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죽어 가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럴 때에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손길과 우리를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를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일으켜 주시고 다시 제 발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간에 여러분이 낙망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를 다시 소생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생시켜 주실 때에 우리에게 자신과 기쁨과 평안과 힘이 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소생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동차, 그림, 음악, 레코드, 건물들 복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 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욥11:13~16)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릭 워렌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위의 말씀은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기적으로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삶이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들은 실망과 좌절감과 절망으로 마음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모두가 지치며 실수하고 좌절감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과거로부터 받은 남이 모르는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상처와 패배의 아픔과 감정적인 불안을 안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불안한 것을 제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까? 우리의 삶에서 다음 세 가지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소생시켜 주십니다.
1. 하나님께서 나의 죄책감을 제거하시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내 슬픔으로부터 해방시키도록 하십시오.
3. 하나님께서 나의 불평을 바꾸도록 하십시오.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불평 때문에 우리들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합니다.
1. 하나님께서 내 죄의식을 제거하게 합니다.
죄책감보다 영혼을 더 빨리 파괴하는 것이 없습니다.
(시38: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의식으로 인하여 두 가지 문제가 야기됩니다.
⑴ 우리 모두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실수를 합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들은 죄의식을 안고 삽니다.
⑵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식을 안고 갑니다.
(시38: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죄책감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부인할 수가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를 매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으며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매장시켜 버렸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적절하게 않은 때에 죄의식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죄를 부인하는 것이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소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 큰 죄가 아니라고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지금까지 기억하십니까? 극소화하는 것도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합리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게 되면, 이제는 그런 것들이 죄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행운을 알려주는 과자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두 번 저지르게 되면 처음 저지를 때보다 훨씬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됩니다.”
살인을 열 번이나 하게 되면 처음으로 살인할 때처럼 그렇게 나쁘게 느끼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 어떤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우리의 양심이 그 점에 대하여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죄책감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첫 번째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다손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근거하여 자신이 잘못한 것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항상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합리화하는 것은 합리화한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괜찮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머리로서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머리를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내가 잘못한 것과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을 측정하는 저울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저울을 조정해서 내가 나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비난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문제가 결코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자책을 합니다. 자신 자신을 처벌합니다. 우리 마음 속으로는 누가 내 삶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지불해야 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잠재 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고 합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아파질 수가 있습니까?물론입니다. 죄의식이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까?확실히 그렇습니다. 죄의식이 우리를 실패자라고 느끼게 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던 많은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의기소침하게 됩니까? 우리가 성공할 수 없다는 죄의식이 마음 속에서 강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어떤 방법도 죄의식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 해결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죄의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실 수가 있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지은 죄뿐아니라 앞으로 짓게 될 모든 죄악들과 실수, 그리고 후회하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대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죄를 위하여 지불하신 대가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모든 죄의식이 제거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우리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죄들을 저질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의 용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미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하나님께 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뇌물을 써서 용서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신뢰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가 아주 깨끗한 사람이 되어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깨끗한 양심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수없이 많이 간구했는데도 아직도 죄의식을 왜 느끼게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자유롭게, 완전히 아무 조건없이 우리가 처음에 요청할 때에 죄의식을 완전히 제거해 주십니다.
이미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계속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첫 번에 요청할 때에 이미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죄라고 느낀다면 그런 느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나쁘게 느끼며 우리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는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합니다. “그런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한 후에는 “그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십니까?
(골2:13~14)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지워졌다는 말은 모든 죄가 다 완전히 제거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늘 완전하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다속 제일 깊은 곳에 던져 버리시고 다시는 재론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자꾸 재론합니다. 천국에 가게 되면 제일 첫번에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용서함 받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십니다. 이 사실이 성경상에 나타난 아주 놀라운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나와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정말로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릴 수가 있으실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기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시기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우리 죄를 도말하십니다. 그 말씀은 그 죄에 대해서는 다시 재론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무효로 인정하십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그 죄의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우리가 청구서를 지불한 후에도 그 청구서에 대하여 걱정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청구서를 지불하게 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용서함 받은 죄를 가지고 괴로워 하십니까?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백한 죄를 잊어버리시는데 우리가 안고서 고민할 이유가 있습니까?하나님께서 더 이상 문제도 삼지 않으시는 것들을 가지고 왜 자꾸 자신을 괴롭히십니까?정말로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지를 못하신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나 잘못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수하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예수님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복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써 이미 처벌하신 것을 가지고 왜 내가 자신을 처벌하려고 합니까?예수님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못박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죄의식을 제거하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내 슬픔을 제거하시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모든 것들은 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일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상처를 받게 되며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한 곳입니다. 어느날은 이유도 모르게 고독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입니다. 어떤 날은 절망에 사로잡히실 것입니다. 어떤 날은 홀로만 이런 일을 당한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슬픔을 맛보고 손실과 재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께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께.
작년에 20년간 함께 살아온 결혼 생활이 끝장났습니다.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혼한 상태에서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나 감정이 상해 있고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배척 당했다는 심정을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슬픔에 잠겨 있고 제 마음은 고독함으로 신음합니다. 저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빈집에 가서는 울곤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는 것을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로 너무 바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순간 순간 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순간을 이기기가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감정적으로 손상되어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삶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목사님, 제발 상처받은 제 맘을 도와주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상처를 아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의 아픈 곳을 돌봐 주십니다. 본 교회의 성도님들이 함께 상처와 위기를 돕기 위하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텅 빈 마음과 허전한 마음을 오직 예수님께서만 채워 주실 수가 있습니다.
마음 속이 찢어지는 것 같은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삶의 슬픔이 극도에 달해 견딜 수 없을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자신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십니까?“만일, 이랬었더라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십니까?내게 상처주는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감추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십니까? 그런 다음에는 고독함을 느끼면서 홀로 불행하게 사십니까? 아주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상에 나오는 다윗은 슬픔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에 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잘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31편 9절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흘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마음 속에 상처를 입는 것이 얼마나 자기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이해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큰 실수를 저지르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결과로 고통을 받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마음 속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자가 세상을 떠나서 슬픔에 잠깁니다. 때로는 우리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거나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은 우리가 어떻게 슬픔을 다루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 것이 시련 51편에 나옵니다. 죄 때문에 상한 심령이라면 시편 51편을 읽으시면서 다시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슬픔에 잠겼습니다. 밧세바가 이런 불륜의 관계로 인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갓난 아이가 아주 병들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갓난 아기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제 잘못으로 저 아기가 고통을 당합니다.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 제 실수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쁜 영향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를 살려 주십시오. 그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그러나 그 아기는 끝내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런 슬픔 가운데서 다윗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세 가지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신다면 이 세 가지를 하셔야 합니다.
● 세 가지 해야 될 일들(삼하 12장)
⑴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당신은 부모나 동업자나 친구에 의하여 상처를 받았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슬퍼할지라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치유 받으며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첫 단계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배경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를 어느 누구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는 그 첫 단계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첫 번으로 이 단계가 꼭 필요합니다. 변경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십시오.
⑵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삼하 12:20)과장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념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살아가면서 고통은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피할 길이 없으나 불행함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것을 너무나 오래 간직함으로 계속 애통하게 합니다. 슬픔을 너무 오래 안고 살 것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이것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마시고 “하나님, 이 환경을 통해서도 역사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⑶ 잃어버린 것들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삼하 12:24)
어떤 분들은 지금 당면한 슬픔을 안고 고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슬픔들이 여러분들을 더 치명적으로 이끌도록 하시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삶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고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식과 슬픔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삶이 우리 삶의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간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통의 노예로 남아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나의 원망을 바꾸시게 합니다.
불평이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행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들 때문에 우리들은 죄의식을 느끼나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것들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살면서 상처를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현장입니다. 삶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줄 것입니다. 어떻든 상처를 받으며 마음이 아픕니다. 삶의 상처를 받을 때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쓴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어로 “bitter”와 “better”의 “I”의 차이입니다. 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환경이 내게 치명상을 가하게 할 수도 있고 내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상처를 받을 때에 더욱 더 쓴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아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만으로 견디기 어려울 때에,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위에 고통이 올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Job5:2) To worry yourself to death with resentement would be a foolish, senseless thing to do
분노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에게 상처를 안겨 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전혀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우리가 계속 마음 속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지금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받은 상처에 대하여 분노를 느낄 때마다 다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는 아직도 그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없으나 아직도 그들이 내게 고통을 안겨 줍니다. 과거의 상처를 계속 안고 사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만 상처를 줄뿐입니다.
(욥18:4)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불평을 어떻게 다룹니까?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이 세상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공평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공평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늘 이루어지는 것처럼 세상에서 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이 잘되고 번영합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많은 세사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온갖 범죄와 불공평, 편견, 인종차별, 성폭행, 강간, 살인, 상처와 남용이 현존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복수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복수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먹힐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엡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어느 곳이 천당이고 어느 곳이 지옥입니까?모든 쓴 마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용서해 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해 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쓴 마음은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쓴 마음을 품게 하면 나는 실제로는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과 선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들과 악한 것들과 악과 편견과 죄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들에 대하여 내가 눈이 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적이고 해로우며 상처받은 일까지라도 나를 바꾸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내가 쓴 마음을 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똑같은 원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전에는 결코 마음의 상처를 고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제가 죄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들 마음에 무엇인가 떠올라서 사라지지 않고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들은 없습니까? 모든 것을 아니라고 하고 합리화하고 경감시키고 합리화한 후에도 역시 내 마음이 뛰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런 방법으로는 죄를, 마음에 받은 상처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죄를 제거할 수가 없으나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전문가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죄를 계속 안고서 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과거가 계속 내게 상처를 주는 것을 중단케 하십시오.
자아 개선을 하는 책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참 구세주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슬픔을 어떻게 다루십니까?슬픔에 대해 애통하시기보다는 신음하십니까? 잃어버린 것을 보기보다는 남아 있는 것을 보십니까?현실을 직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슬픔이 나를 짓눌러서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드십니까?자신의 선택으로 만든 슬픔의 노예가 되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문을 잠근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스스로 문을 잠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슬픔을 제거해달라고 말씀하십시오.
원망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 것이 지금도 나를 괴롭게 하도록 하십니까?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런 것들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여러분의 슬픔, 죄책감, 그리고 원망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시편 42편에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왜 우리가 낙망합니까? 왜 불안해합니까? 우리가 낙망할 때에 다윗은 목자들이 쓰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 단어는 양이 스스로 들어간 후에 나올 수 없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양들은 이렇게 지음을 받아서 한쪽으로 넘어져서 네 발이 다 하늘을 향하게 되면 스스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리로 허공을 치고 헛수고일 뿐입니다.
“매애”하고 울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상태에서는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동물이나 와서 공격할 수 있고 양은 속수무책이 됩니다.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양이 다리를 하늘로 향하여 누어 있게 되면 위에서 가스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가스가 위를 굳어지게 하여 공기가 몸 속에서 유통하는 것을 막아 한 시간 내로 질식하게 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리가 마비됩니다. 뜨거운 날에 이런 상태에 처한 양은 수 시간 내에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런 극심한 상태를 도와 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양을 회복시킬 때는 즉각적으로 회복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양을 회복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우선 다리를 위로 향하고 있는 양에게로 목자가 옵니다.
첫 번째로 목자는 네 다리를 사랑으로 마사지 해주어 다리에 피가 통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양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괜찮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양에게 안정감을 심어 줍니다. 그리고 나서는 손을 배에다 대고 양을 부드럽게 돌립니다. 다리가 약해져서 스스로 서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들어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면 점차로 다리에 힘을 얻으며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목자가 양이 이제는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느낄 때에 양이 부드럽게 목자의 손을 빠져 나가 자기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슬픔, 죄책감이나 원망으로 가득 차서 스스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죽어 가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럴 때에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손길과 우리를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를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일으켜 주시고 다시 제 발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간에 여러분이 낙망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를 다시 소생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생시켜 주실 때에 우리에게 자신과 기쁨과 평안과 힘이 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소생시킬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동차, 그림, 음악, 레코드, 건물들 복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 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욥11:13~16)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