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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목사 (소망교회)
쇼펜하우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복잡한 거리에 나와서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가는지 오는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며 골똘히 생각하던 중에 가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딱! 하고 부딪히니까 그 앞의 사람이 화를 벌컥 내면서 “당신 누구요?”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미안한 듯이 뒤로 물러서면서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남들이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일 뿐이지 내가 아닙니다. 누가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어머니입니까? 그것은 아무개의 어머니일 뿐이지 나 자신은 아닙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정신 분석학자인 프리츠 펄스(Fritz Pearls)라고 하는 분이 건강한 사람에 대한 특징을 네가지로 말했는데 한 번 쯤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남들이 무어라고 하든 말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서 남들이 유식하다고 해도 내가 무식한 것은 내가 잘 압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잘 압니다. 당신은 건강하다고 해도 내가 병든 것은 내가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께서는 나이를 거꾸로 잡수십니까, 왜 안 늙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어떻게 안 늙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입니다. 내 정체의식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판에 의해서 내 생각이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자기를 똑바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사도바울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모두가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그렇게 추앙하고 있는데도 로마서 7장에 보십시오. 처절할만큼 그는 진실합니다.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기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다 알고있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일이든 저런 일이든. 그런데 시원치 않은 사람은 자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부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유달리 화를 내고 난리를 치니까. 부인이 견디다 못해서 “여보 당신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에 와서 자꾸만 짜증을 내는데 왠일이요?” 그 남편이 무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본래부터는 안 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했답니다. 아니, 자신이 나빠진 것이 아내 때문이겠습니까? 꼭 잘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심지어는 운동을 할 때 보면 시원치 않은 사람은 전부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누가 훼방을 놓고 누가 기분을 상하게 하고 마누라가 어쩌고 날씨가 어떠하고. 그래서 운동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든 책임은 내 책임이올시다. 그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현실에 도전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기면 되는 것입니다. 물러설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도전의지, 파이오니아쉽(Pioneership)이 있어요.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래도 휘청 저래도 휘청하면 안됩니다. 현실을 향해서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 건강한 사람이다. 또,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연히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서 자기 마음을 못 이겨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인배입니다.
17세기 체코 출신의 교육학자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명저인 팜파디아(Pampaedia)라고 하는 책에서 말합니다. 인간의 지식 형성 과정을 아주 쉽게 세가지로 말했습니다. 먼저는 감각입니다. 센스가 있어야 지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1통로가 감각입니다. 그래서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맛보고 바로 만지고 바로 느끼고. 여러분, 똑바로 보지 못하면 지식이 빗나갑니다. 바로 듣지 못하면 엉뚱한 짓을 합니다. 바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감각해야만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건강한 이성이 있어야 됩니다. 이성이 병들면 안됩니다. 이성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이성 차체가 병들면 영 구제불능입니다. 건강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되고 특별히 이성이 자유롭게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고 지식이 축적되었다가 재현하게 됩니다. 세번째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있어야 됩니다. 감각과 이성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 보고 알 것도 아니고, 다 생각해서 알 것도 아닙니다. 이 이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보고 압니까? 사랑을 만져서 압니까? 이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눈으로 봅니까? 진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말합니다. 천지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그렇습니다. 창조할 때에 내가 존재했던 것도 아니고 또 여러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계셨습니까? 안계셨습니까? 나는 만나본 일이 없지만, 사진 한 장도 없지만 믿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을 가져야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자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누구입니까?’ 바로 이 본문 이 말씀이 종교개혁자 칼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신학의 중심입니다. 인자가 누구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돌아보시나이까? 도대체 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되면 현실을 보고 현실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에 너무 매달려서 일에 몰두해버립니다, 일벌래처럼. 요즘 신문에 난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 40대 젊은이가 죽어가는데 남자가 여자보다 4배나 많이 죽는답니다. 앞으로는 큰일났습디다. 남자를 구하기 힘들겠거든요. 여자보다 4배가 많이 죽는다고 합니다. 왜? 일을 하느라고. 일에 쪼들려서. 너무 힘들어서. 죽는 줄 모르고 일을 하는 것은 참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일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하나는 아주 잘못된 것은 동물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지만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진화론적 인간론입니다. 진화론적 인간론. 그 대표자가 칼 마르크스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사람은 최고로 진화된, 가장 고등 동물이 인간이다. 동물과 인간은 같다. 침팬지가 그렇고 고릴라가 그렇고 원숭이가 가만히 쳐다보니까 비슷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부터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나됨을 찾은 것입니다. 결국은 세 가지를 찾았습니다. 생존경쟁, struggle for existence. 동물의 세계에는 무서운 생존 경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워서 자구지책을 합니다. 내 명예를 위해서 남을 죽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동물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것, 그것은 동물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동물입니다. 그런가 하면 약육강식입니다. 큰 짐승이 작은 짐승을 먹고 작은 짐승이 더 작은 짐승을 먹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힘의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적자생존, 이 세 가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를 훈련을 할 때, 세뇌 공작을 할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어렸을 때, 중학교 학생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가지고 다니는 교과서 중에 가장 큰 교과서가 진화론 교과서입니다. 진화론을 가르칩니다. 아메바부터 발전하는 이 진화론, 이것을 배워 놓으면 “사람은 동물이다. 동물과 사람은 하나다.” 그러므로 혁명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가 망한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 없어졌습니다. 인간성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무너진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물로부터 인간을 찾으려고 하는 생각은 참 위험한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 번 텔레비전 프로를 보니까, 동물의 세계를 보다보니까 사자가 나왔습니다. 사자가 원래 잘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거 볼 만 한데 ‘사자는 얼마나 좋을까, 농사도 안하고.’ 일도 안하고. 낮잠도 잘 자지 않습니까? 많이 잔다고 합니다. 먹고 자는 것이 일이라고 합니다. 그 모든 동물들이 다 자기 밥 아닙니까? 아무거나 잡아먹으면 되는데, 그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사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끼리 싸웁니다. 그 수놈끼리 싸웁니다. 그 사자 가족이. 싸움을 해서 정복을 하게 될 때에는 그 가족에 와서 자기 유전자가 아닌 새끼들은 다 잡아죽입니다. 소리지르는 것을 물어 죽입니다. 그뿐입니까? 더 기가 막힌 것은 금방 새끼를 몰고 다니던 어미사자가 있는데 새끼들을 다 죽였죠? 자신의 새끼가 다 죽은 암놈이 자기 새끼를 다 죽인 수놈에게 가서 구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나운서가 하는 말이 “자기새끼가 다 죽은 여자가 자기새끼를 죽인 수놈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라고 합디다. 이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냉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여기서 인간을 배워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인간이 될 것 같습니까?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대자연을 보고 나를 보는 것입니다. 대자연, 오늘 보니까 성경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베푸신 달과 별을 내가 보니, 주께서 만드신 모든 우주를 보고, 온 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러분, 자연의 세계, 한 번씩 하늘을 쳐다봅시다. 중요한 것입니다. 이 태양계라고 하면 일반상식으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태양과 우리 지구와의 거리를 AU라고 합니다. 거리의 숫자는 제가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와 태양의 거리, 이것의 20000배, 이것이 태양계의 지름입니다. 20000배,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의 20000배가 태양계의 지름입니다. 태양계가 그렇게 큽니다. 요즘 화성이니 금성이니 말하는데 그것 모두가 태양계인데 태양계가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태양계 같은 것이 이 우주에 200만개가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저 뒤에는 블랙홀이라는 검은 구름이 끼인 곳이 있습니다. 여기에 별이 빙빙 돌고 지나가다가 가까이 가게 되면 쑥 들어가고 사라집니다. 천문학자의 말이었습니다. 블랙홀이라는 것이, 전혀 알 수 없는 큰 구멍이 있고 거기에 200만개에 이르는 태양계 같은 우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계 중에 지구라고 하는 흙덩어리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지구 안에 여러분과 내가 있습니다. 얼마나 조그맙니까? 먼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자, 해와 달과 별을 보고 그리고 나를 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나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언젠가 한 번, 그 때 태풍이 불고 비가 막 쏟아지는데, 차를 몰고 아침에 가면서 라디오를 들었더니 KBS아나운서가 “오늘 태풍이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이 아주 애교스럽습니다. “오늘은 겸손을 생각해야 되는 날입니다.” 왜요? 태풍 앞에 초라하니까.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니까. “겸손을 생각해야 될 날입니다.” 내가 그 아가씨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주 예쁜 말을 했습니다. 비바람이 칠 때 겸손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어떤 어린아이가 큰 도서관에 들어가서 수백만 권의 책이 널려있는데 그것이 누가 쓴 책인지 왜 쓴 책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모릅니다. 많은 책을 둘러보더니 “와~ 많다.” 그러더니 열심히 책을 찾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고 있냐고 했더니 만화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볼 것은 만화책 밖에 없으니까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아인슈타인 박사는 말합니다. “과학자의 기본의식은 믿음과 겸손이다.” 믿음과 겸손으로 임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허락해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구하자. 또 한가지는 “여유를 가져라.” 어차피 다 알 것도 아니고 다 가질 것도 아니고 다 헤아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유를 가지고 그렇게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를 보고 나를 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초라한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아야 합니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 칼뱅은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내게 대한 지식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째서 그 조그마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십니까?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인간을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보고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보고 그리고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라인 홀트 니버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윌리 데이비스라고 하는 분은 미국식 축구, 풋볼 선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만은 미국 사회에서 미식축구 선수들은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좌우간 인물도 잘났고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그런 사람들이 풋볼 선수입니다. 그래서 아주 최고로 인기가 있는 젊은이들인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옛날에 자신의 코치였던 롬바르디라고 하는 분이 위독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바쁜 일정 중에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딱 2분 동안 면회를 타고 또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급히 다녀오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뭘 그렇게 바쁜 중에 거기까지 다녀왔느냐? 그랬더니 “아니요. 나는 롬바르디라고 하는 분, 그 코치와 함께 있으면 내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내가 소중한 자로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내가 소중한 자로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사명을 보고 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보고 나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시고, 나로 하여금 힘을 주어서, 지혜를 주어서 나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를 맡아 인도할 때에, 막막하기도 하고 나약하기도 한 초라한 존재에서 늘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했을 줄 압니다. 성전에 앉은 미문에 앉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납니다. 늘 보던 사람이지만 오늘따라 이 거지를 보면서 성령이 충만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명령으로 명하나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도 놀라고 온 교회가 다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높이 추앙을 할 때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병 고친 것처럼 왜 나를 보십니까?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베드로가 소위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본인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를 하시는구나.’ 그래서 그는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그야말로 significant,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실로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사람에게 일거리를 맡기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조기 은퇴한 분이 그러십니다. “요즘에 은퇴하셔서 얼마나 힘드십니까?” “아니요. 그 동안은 너무 짐이 무거웠습니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성과적으로 평가하고 밑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너무 짐이 무거웠다가 퇴직을 하고 나니 시원하고,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두고봅시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무어라고 한 줄 아십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여러분, 책임을 진다, 그것이 나의 삶의 영역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그 속에 행복이 있고 그 속에 자유가 있고 그 속에 나의 삶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정직하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주님의 섭리 속에 주의 경륜 속에 그 엄청난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한 번 보십시다. 주님께서 내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명 속에 그 소명과 함께 나를 보십시오. 나를 통해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소중합니다. 인자가 무엇입니까?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고 저를 사랑하십니까? 이러한 바른 정체 의식을 가지고 살 때에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복잡한 거리에 나와서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가는지 오는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며 골똘히 생각하던 중에 가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딱! 하고 부딪히니까 그 앞의 사람이 화를 벌컥 내면서 “당신 누구요?”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미안한 듯이 뒤로 물러서면서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남들이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아버지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일 뿐이지 내가 아닙니다. 누가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어머니입니까? 그것은 아무개의 어머니일 뿐이지 나 자신은 아닙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정신 분석학자인 프리츠 펄스(Fritz Pearls)라고 하는 분이 건강한 사람에 대한 특징을 네가지로 말했는데 한 번 쯤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남들이 무어라고 하든 말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서 남들이 유식하다고 해도 내가 무식한 것은 내가 잘 압니다. 남들이 성공했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잘 압니다. 당신은 건강하다고 해도 내가 병든 것은 내가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께서는 나이를 거꾸로 잡수십니까, 왜 안 늙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어떻게 안 늙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입니다. 내 정체의식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평판에 의해서 내 생각이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자기를 똑바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사도바울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모두가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그렇게 추앙하고 있는데도 로마서 7장에 보십시오. 처절할만큼 그는 진실합니다.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합니다.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기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다 알고있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일이든 저런 일이든. 그런데 시원치 않은 사람은 자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부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유달리 화를 내고 난리를 치니까. 부인이 견디다 못해서 “여보 당신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에 와서 자꾸만 짜증을 내는데 왠일이요?” 그 남편이 무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본래부터는 안 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했답니다. 아니, 자신이 나빠진 것이 아내 때문이겠습니까? 꼭 잘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심지어는 운동을 할 때 보면 시원치 않은 사람은 전부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누가 훼방을 놓고 누가 기분을 상하게 하고 마누라가 어쩌고 날씨가 어떠하고. 그래서 운동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든 책임은 내 책임이올시다. 그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현실에 도전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기면 되는 것입니다. 물러설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도전의지, 파이오니아쉽(Pioneership)이 있어요.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래도 휘청 저래도 휘청하면 안됩니다. 현실을 향해서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 건강한 사람이다. 또, 자기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연히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서 자기 마음을 못 이겨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인배입니다.
17세기 체코 출신의 교육학자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명저인 팜파디아(Pampaedia)라고 하는 책에서 말합니다. 인간의 지식 형성 과정을 아주 쉽게 세가지로 말했습니다. 먼저는 감각입니다. 센스가 있어야 지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1통로가 감각입니다. 그래서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맛보고 바로 만지고 바로 느끼고. 여러분, 똑바로 보지 못하면 지식이 빗나갑니다. 바로 듣지 못하면 엉뚱한 짓을 합니다. 바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감각해야만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건강한 이성이 있어야 됩니다. 이성이 병들면 안됩니다. 이성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이성 차체가 병들면 영 구제불능입니다. 건강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되고 특별히 이성이 자유롭게 자기 기능을 다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고 지식이 축적되었다가 재현하게 됩니다. 세번째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있어야 됩니다. 감각과 이성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 보고 알 것도 아니고, 다 생각해서 알 것도 아닙니다. 이 이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보고 압니까? 사랑을 만져서 압니까? 이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눈으로 봅니까? 진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말합니다. 천지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그렇습니다. 창조할 때에 내가 존재했던 것도 아니고 또 여러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계셨습니까? 안계셨습니까? 나는 만나본 일이 없지만, 사진 한 장도 없지만 믿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을 가져야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자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누구입니까?’ 바로 이 본문 이 말씀이 종교개혁자 칼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신학의 중심입니다. 인자가 누구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돌아보시나이까? 도대체 내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되면 현실을 보고 현실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에 너무 매달려서 일에 몰두해버립니다, 일벌래처럼. 요즘 신문에 난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 40대 젊은이가 죽어가는데 남자가 여자보다 4배나 많이 죽는답니다. 앞으로는 큰일났습디다. 남자를 구하기 힘들겠거든요. 여자보다 4배가 많이 죽는다고 합니다. 왜? 일을 하느라고. 일에 쪼들려서. 너무 힘들어서. 죽는 줄 모르고 일을 하는 것은 참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일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하나는 아주 잘못된 것은 동물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지만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진화론적 인간론입니다. 진화론적 인간론. 그 대표자가 칼 마르크스입니다. 동물의 세계를 봅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사람은 최고로 진화된, 가장 고등 동물이 인간이다. 동물과 인간은 같다. 침팬지가 그렇고 고릴라가 그렇고 원숭이가 가만히 쳐다보니까 비슷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부터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나됨을 찾은 것입니다. 결국은 세 가지를 찾았습니다. 생존경쟁, struggle for existence. 동물의 세계에는 무서운 생존 경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워서 자구지책을 합니다. 내 명예를 위해서 남을 죽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동물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것, 그것은 동물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동물입니다. 그런가 하면 약육강식입니다. 큰 짐승이 작은 짐승을 먹고 작은 짐승이 더 작은 짐승을 먹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힘의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적자생존, 이 세 가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를 훈련을 할 때, 세뇌 공작을 할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어렸을 때, 중학교 학생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가지고 다니는 교과서 중에 가장 큰 교과서가 진화론 교과서입니다. 진화론을 가르칩니다. 아메바부터 발전하는 이 진화론, 이것을 배워 놓으면 “사람은 동물이다. 동물과 사람은 하나다.” 그러므로 혁명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가 망한 것이 아닙니까? 인간이 없어졌습니다. 인간성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무너진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물로부터 인간을 찾으려고 하는 생각은 참 위험한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 번 텔레비전 프로를 보니까, 동물의 세계를 보다보니까 사자가 나왔습니다. 사자가 원래 잘생기지 않았습니까? 그거 볼 만 한데 ‘사자는 얼마나 좋을까, 농사도 안하고.’ 일도 안하고. 낮잠도 잘 자지 않습니까? 많이 잔다고 합니다. 먹고 자는 것이 일이라고 합니다. 그 모든 동물들이 다 자기 밥 아닙니까? 아무거나 잡아먹으면 되는데, 그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사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끼리 싸웁니다. 그 수놈끼리 싸웁니다. 그 사자 가족이. 싸움을 해서 정복을 하게 될 때에는 그 가족에 와서 자기 유전자가 아닌 새끼들은 다 잡아죽입니다. 소리지르는 것을 물어 죽입니다. 그뿐입니까? 더 기가 막힌 것은 금방 새끼를 몰고 다니던 어미사자가 있는데 새끼들을 다 죽였죠? 자신의 새끼가 다 죽은 암놈이 자기 새끼를 다 죽인 수놈에게 가서 구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나운서가 하는 말이 “자기새끼가 다 죽은 여자가 자기새끼를 죽인 수놈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라고 합디다. 이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냉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여기서 인간을 배워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인간이 될 것 같습니까?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대자연을 보고 나를 보는 것입니다. 대자연, 오늘 보니까 성경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베푸신 달과 별을 내가 보니, 주께서 만드신 모든 우주를 보고, 온 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러분, 자연의 세계, 한 번씩 하늘을 쳐다봅시다. 중요한 것입니다. 이 태양계라고 하면 일반상식으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태양과 우리 지구와의 거리를 AU라고 합니다. 거리의 숫자는 제가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와 태양의 거리, 이것의 20000배, 이것이 태양계의 지름입니다. 20000배,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의 20000배가 태양계의 지름입니다. 태양계가 그렇게 큽니다. 요즘 화성이니 금성이니 말하는데 그것 모두가 태양계인데 태양계가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태양계 같은 것이 이 우주에 200만개가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저 뒤에는 블랙홀이라는 검은 구름이 끼인 곳이 있습니다. 여기에 별이 빙빙 돌고 지나가다가 가까이 가게 되면 쑥 들어가고 사라집니다. 천문학자의 말이었습니다. 블랙홀이라는 것이, 전혀 알 수 없는 큰 구멍이 있고 거기에 200만개에 이르는 태양계 같은 우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계 중에 지구라고 하는 흙덩어리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지구 안에 여러분과 내가 있습니다. 얼마나 조그맙니까? 먼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자, 해와 달과 별을 보고 그리고 나를 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나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언젠가 한 번, 그 때 태풍이 불고 비가 막 쏟아지는데, 차를 몰고 아침에 가면서 라디오를 들었더니 KBS아나운서가 “오늘 태풍이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이 아주 애교스럽습니다. “오늘은 겸손을 생각해야 되는 날입니다.” 왜요? 태풍 앞에 초라하니까.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니까. “겸손을 생각해야 될 날입니다.” 내가 그 아가씨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주 예쁜 말을 했습니다. 비바람이 칠 때 겸손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어떤 어린아이가 큰 도서관에 들어가서 수백만 권의 책이 널려있는데 그것이 누가 쓴 책인지 왜 쓴 책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모릅니다. 많은 책을 둘러보더니 “와~ 많다.” 그러더니 열심히 책을 찾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고 있냐고 했더니 만화책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볼 것은 만화책 밖에 없으니까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아인슈타인 박사는 말합니다. “과학자의 기본의식은 믿음과 겸손이다.” 믿음과 겸손으로 임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허락해 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구하자. 또 한가지는 “여유를 가져라.” 어차피 다 알 것도 아니고 다 가질 것도 아니고 다 헤아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유를 가지고 그렇게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를 보고 나를 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초라한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아야 합니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 칼뱅은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내게 대한 지식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째서 그 조그마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십니까?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인간을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보고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보고 그리고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라인 홀트 니버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윌리 데이비스라고 하는 분은 미국식 축구, 풋볼 선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만은 미국 사회에서 미식축구 선수들은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좌우간 인물도 잘났고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그런 사람들이 풋볼 선수입니다. 그래서 아주 최고로 인기가 있는 젊은이들인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옛날에 자신의 코치였던 롬바르디라고 하는 분이 위독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바쁜 일정 중에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딱 2분 동안 면회를 타고 또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급히 다녀오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뭘 그렇게 바쁜 중에 거기까지 다녀왔느냐? 그랬더니 “아니요. 나는 롬바르디라고 하는 분, 그 코치와 함께 있으면 내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내가 소중한 자로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내가 소중한 자로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사명을 보고 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보고 나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시고, 나로 하여금 힘을 주어서, 지혜를 주어서 나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를 맡아 인도할 때에, 막막하기도 하고 나약하기도 한 초라한 존재에서 늘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했을 줄 압니다. 성전에 앉은 미문에 앉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납니다. 늘 보던 사람이지만 오늘따라 이 거지를 보면서 성령이 충만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명령으로 명하나니 일어나라” 했더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도 놀라고 온 교회가 다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높이 추앙을 할 때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가 병 고친 것처럼 왜 나를 보십니까?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베드로가 소위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본인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를 하시는구나.’ 그래서 그는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그야말로 significant,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실로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사람에게 일거리를 맡기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조기 은퇴한 분이 그러십니다. “요즘에 은퇴하셔서 얼마나 힘드십니까?” “아니요. 그 동안은 너무 짐이 무거웠습니다.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하고 성과적으로 평가하고 밑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너무 짐이 무거웠다가 퇴직을 하고 나니 시원하고,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두고봅시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무어라고 한 줄 아십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여러분, 책임을 진다, 그것이 나의 삶의 영역입니다. 만물을 다스리라. 그 속에 행복이 있고 그 속에 자유가 있고 그 속에 나의 삶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정직하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주님의 섭리 속에 주의 경륜 속에 그 엄청난 사랑 안에서 나 자신을 한 번 보십시다. 주님께서 내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명 속에 그 소명과 함께 나를 보십시오. 나를 통해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소중합니다. 인자가 무엇입니까?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고 저를 사랑하십니까? 이러한 바른 정체 의식을 가지고 살 때에 거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