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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1-6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를 ‘성령으로 하나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자’로 정했습니다. 신앙과 삶은 목적이 이끌어 갑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이 귀한 표어대로 한해동안 우리를 이끌어 갈 줄로 믿습니다. 이 표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하여 오늘과 다음 주에 나누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성령으로 하나되자’는 부분에 대하여 주시는 교훈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양성’입니다. 교회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진 공동체는 세상에 없습니다.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빈부와 상관없이, 신분이나 자리도 관계없이, 배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넘어서 모두가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통일성’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같은 모양으로 모였다면 며칠도 못 갈 것입니다. 싸워도 엄청나게 싸울 것이고, 깨져도 벌써 깨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물론 그 통일성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구심점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하나됨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계실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하늘에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요,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본문 4절에서 몸이 하나, 성령이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믿음의 영역에 모든 것이 하나이기에,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도 하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한해동안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하나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여기에서 그것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소명의식입니다. 1절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말하고, 4절에도 반복하여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부르심, 소명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되는 귀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의 큰 범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은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으로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다양한 사명과 은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있고, 봉사하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부르심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다양한 사명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자기에게 맡기진 사명과 사역에 충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철저히 소명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 성령으로 하나되는 놀라운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우월의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중심으로 먼저와 나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것과 작은 것에 차이가 없고,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의 차별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받은 소명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지는 순간부터 공동체는 문제와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고, 시험에 빠집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비교의식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비교의식라는 것이 없습니다. 작은 일도, 큰 일도, 앞에서 하는 일도, 뒤에서 하는 일도 다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사명이 귀하고, 남의 받은 사명도 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잘 살다가도 남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교만해 지고, 침체의 늪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또한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오직 목표의식만 가져야 합니다. 우월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과 목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나는 그 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구원으로, 사명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소명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길 때 분명 성령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도 나를 사명자로 부르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충성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인격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격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바울이 여기에서 성령으로 하나될 것을 강조하면서 왜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열거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을 닮아 가는 이런 우리의 인격을 통해 성령으로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겸손, 온유, 인내와 용서는 모두가 공동체의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의 인격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마음에 담고, 날마다 추구할 때 진정 공동체의 하나됨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격자가 될 때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나아가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이런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인격자로 귀한 모델이 되어 하나됨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쓰임 받은 인물중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바나바는 초대교회와 교회역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위대한 사역을 맡기셨고, 그의 신실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역사를 안디옥교회가 감당하게 되는데, 바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중심에서 말없이, 충실히 이 일을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물론 바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귀하게 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한마디로 인격자입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인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이 말속에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의 인격적인 삶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그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인격적이었습니다. 보통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비굴해 지거나, 두마음을 품거나, 아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런 바나바의 인격을 인정하여 그의 이름을 ‘바나바’라고 지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도 인격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가라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알려줍니다. 바나바에게 있어서 마가는 분명 자기보다 낮은 사람입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낮은 사람입니다. 보통 자기보다 낮은 사람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 마가가 인생의 큰 시련과 시험을 만났을 때 마가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세워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마가의 인생에 바나바가 없었다면 성경에 마가의 다락방은 나오지 않았고, 마가복음도, 베드로전후서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인격이 마가를 잘 세워 큰 인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도 인격적이었습니다. 보통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왜냐하면 늘 경쟁상대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에게 있어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바나바가 바울을 인격적으로 대했는지 모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동역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울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마 바나바가 없었다면 바울은 결코 큰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곧 인격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 성품,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고, 주님처럼 인내하고 용서하는 인격적인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은 온전해져 갑니다. 그런 인격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고, 공동체는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같이 인격적인 삶으로, 성령으로 하나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성령으로 하나됨을 말하면서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또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되는 놀라운 방법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행동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이라 부릅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의 어려운 상황에서 심혈을 기울이며 쓴 애정 어린 편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서신보다 귀하고,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합니다. 모든 바울의 편지가 대부분 그렇듯이 에베소서도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3장까지가 전반부이고, 4장부터 6장까지가 또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교리, 신학입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한 교리는 바로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리적인 신학적인 체계를 잘 설명하는 것이 전반부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행동, 실천입니다. 교리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의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절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3장까지의 모든 교리를 토대로 이제부터 행동개시 하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바울은 교리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실천을 아울러 강조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에서만 그치는 것에서 머물도록 하지 않았고, 말씀에 대한 행동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늘 균형을 강조했습니다. 말씀과 기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교리와 실천의 균형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의 중요한 예로 여기 성령의 하나됨을 말했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힘써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압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고 참되게 사는 것인지 잘 압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행동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내가 속한 모든 영역에서 다툼이나 분쟁 없이 하나되어 힘있게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갖고 우월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목표의식을 갖는 것을 압니다. 인격적인 삶이 우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세우는 것을 압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모든 교리와 지식에 대한 행동과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하여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더욱 우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뭔가 원인이 있고, 수고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가 전혀 필요가 없는 구원도 그렇습니다. 구원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에 그냥 주어진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라는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렇다면 다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삶에 모든 것은 수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거두는 법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힘써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역사에 성령으로 하나되지 못한 불행한 역사는 모두가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힘써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성령으로 하나되기를 위해 힘써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단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지키는 것에만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역사와 풍성한 삶의 축복과 결과는 우연이 아닙니다.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내가 몸부림치는 열정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최선을 다하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일 말고 나의 몫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새해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출발해야 합니다. 내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내 삶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하여, 공동체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보다 더 노력하고 수고하기를 다짐해야 하고 실제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이 금년 우리의 우선적인 표어입니다. 소명의식을 통해, 인격적인 삶을 통해, 그리고 노력하고 수고하는 최선의 행동을 통해 이 일은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금년 우리 교회의 표어를 ‘성령으로 하나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자’로 정했습니다. 신앙과 삶은 목적이 이끌어 갑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이 귀한 표어대로 한해동안 우리를 이끌어 갈 줄로 믿습니다. 이 표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하여 오늘과 다음 주에 나누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성령으로 하나되자’는 부분에 대하여 주시는 교훈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양성’입니다. 교회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진 공동체는 세상에 없습니다. 남녀노소와 관계없이, 빈부와 상관없이, 신분이나 자리도 관계없이, 배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넘어서 모두가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통일성’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같은 모양으로 모였다면 며칠도 못 갈 것입니다. 싸워도 엄청나게 싸울 것이고, 깨져도 벌써 깨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물론 그 통일성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구심점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하나됨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계실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하늘에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요,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본문 4절에서 몸이 하나, 성령이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하나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믿음의 영역에 모든 것이 하나이기에,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도 하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한해동안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하나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여기에서 그것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소명의식입니다. 1절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말하고, 4절에도 반복하여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부르심, 소명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되는 귀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의 큰 범위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은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으로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다양한 사명과 은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있고, 봉사하는 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부르심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다양한 사명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자기에게 맡기진 사명과 사역에 충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철저히 소명의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 성령으로 하나되는 놀라운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우월의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공동체에는 하나님의 중심으로 먼저와 나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것과 작은 것에 차이가 없고,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의 차별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받은 소명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지는 순간부터 공동체는 문제와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고, 시험에 빠집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비교의식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비교의식라는 것이 없습니다. 작은 일도, 큰 일도, 앞에서 하는 일도, 뒤에서 하는 일도 다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사명이 귀하고, 남의 받은 사명도 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잘 살다가도 남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교만해 지고, 침체의 늪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또한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오직 목표의식만 가져야 합니다. 우월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명과 목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나는 그 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구원으로, 사명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소명의식을 갖고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길 때 분명 성령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도 나를 사명자로 부르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충성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인격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격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바울이 여기에서 성령으로 하나될 것을 강조하면서 왜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열거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을 닮아 가는 이런 우리의 인격을 통해 성령으로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겸손, 온유, 인내와 용서는 모두가 공동체의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의 인격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마음에 담고, 날마다 추구할 때 진정 공동체의 하나됨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격자가 될 때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나아가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이런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인격자로 귀한 모델이 되어 하나됨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쓰임 받은 인물중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바나바는 초대교회와 교회역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셔서 위대한 사역을 맡기셨고, 그의 신실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역사를 안디옥교회가 감당하게 되는데, 바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중심에서 말없이, 충실히 이 일을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물론 바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귀하게 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한마디로 인격자입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인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이 말속에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의 인격적인 삶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그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인격적이었습니다. 보통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비굴해 지거나, 두마음을 품거나, 아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런 바나바의 인격을 인정하여 그의 이름을 ‘바나바’라고 지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도 인격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가라는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알려줍니다. 바나바에게 있어서 마가는 분명 자기보다 낮은 사람입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낮은 사람입니다. 보통 자기보다 낮은 사람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 마가가 인생의 큰 시련과 시험을 만났을 때 마가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세워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마가의 인생에 바나바가 없었다면 성경에 마가의 다락방은 나오지 않았고, 마가복음도, 베드로전후서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인격이 마가를 잘 세워 큰 인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도 인격적이었습니다. 보통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가장 힘듭니다. 왜냐하면 늘 경쟁상대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에게 있어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바나바가 바울을 인격적으로 대했는지 모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동역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울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마 바나바가 없었다면 바울은 결코 큰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곧 인격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 성품,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고, 주님처럼 인내하고 용서하는 인격적인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은 온전해져 갑니다. 그런 인격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고, 공동체는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같이 인격적인 삶으로, 성령으로 하나되어 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성령으로 하나됨을 말하면서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또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되는 놀라운 방법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행동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특히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이라 부릅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의 어려운 상황에서 심혈을 기울이며 쓴 애정 어린 편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서신보다 귀하고,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합니다. 모든 바울의 편지가 대부분 그렇듯이 에베소서도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3장까지가 전반부이고, 4장부터 6장까지가 또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교리, 신학입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한 교리는 바로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리적인 신학적인 체계를 잘 설명하는 것이 전반부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행동, 실천입니다. 교리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의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절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3장까지의 모든 교리를 토대로 이제부터 행동개시 하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바울은 교리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실천을 아울러 강조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에서만 그치는 것에서 머물도록 하지 않았고, 말씀에 대한 행동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늘 균형을 강조했습니다. 말씀과 기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교리와 실천의 균형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의 중요한 예로 여기 성령의 하나됨을 말했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힘써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압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고 참되게 사는 것인지 잘 압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행동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내가 속한 모든 영역에서 다툼이나 분쟁 없이 하나되어 힘있게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갖고 우월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목표의식을 갖는 것을 압니다. 인격적인 삶이 우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세우는 것을 압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모든 교리와 지식에 대한 행동과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하여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더욱 우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뭔가 원인이 있고, 수고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가 전혀 필요가 없는 구원도 그렇습니다. 구원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에 그냥 주어진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라는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렇다면 다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삶에 모든 것은 수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거두는 법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힘써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역사에 성령으로 하나되지 못한 불행한 역사는 모두가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힘써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성령으로 하나되기를 위해 힘써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단 성령으로 하나된 것을 지키는 것에만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역사와 풍성한 삶의 축복과 결과는 우연이 아닙니다.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내가 몸부림치는 열정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최선을 다하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일 말고 나의 몫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새해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출발해야 합니다. 내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내 삶의 풍요로운 결실을 위하여, 공동체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보다 더 노력하고 수고하기를 다짐해야 하고 실제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되는 것이 금년 우리의 우선적인 표어입니다. 소명의식을 통해, 인격적인 삶을 통해, 그리고 노력하고 수고하는 최선의 행동을 통해 이 일은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