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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57-62절
철학에서 흔히 얘기되는 플라톤의 동굴(Plato’s Cave)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는 어릴 때부터 동굴에 묶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머리도 고정되어서 한쪽 벽만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뒤에는 불이 있는데, 그들을 묶은 사람이 어떤 물건을 옮기면 불 때문에 벽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 그림자를 보고 묶인 죄수들은 그 그림자 모양의 이름을 붙입니다. 그들에게 그 그림자는 진짜 세계 아니었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거기에서 만약 한 죄수가 밖으로 끌려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강한 빛에 의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눈이 점점 적응되면서 산과 나무, 하늘과 강, 다양한 동식물, 밤낮의 변화를 보면서 전율할 것입니다. 그때야 그는 동굴 안에서 거의 소경처럼 살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가 다른 죄수들에게 바깥 세계의 경이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를 미쳤다고 하며 죽이려고 합니다.
그 동굴 비유는 이 세상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아름답고 환상적인 천국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고, 빛보다 자기가 경험한 그림자를 더 선호하고 빛이 비추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빛이 비추면 자신의 부족한 허물이 다 드러나고, 과거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도전을 싫어하고 이제까지 살던 대로 편하게 살면서 거기에 예수님 믿는 것을 하나 더 더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편안한 삶의 일부분이 되기를 원할 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기보다는 자신의 그림자에 예수님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런 그림자 신앙을 버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삶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삶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삶의 전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안전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미래의 보다 소중한 축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를 원합니다.
< 자기를 버리는 삶의 의미 >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집에 차고를 새로 만들어 ‘차고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옛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버리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
본문 57-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누군가 즉흥적으로 주님이 어디에 가든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거의 동문서답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즉흥적으로 따르는 길이나 자기 영광을 위한 길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의지적으로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대개 사람이 원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내 환경과 자아를 극복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최대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인생은 가장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1994년 은혜를 처음 낳을 때 의사 선생님은 아내가 자연분만이 힘든 체형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 고통을 줄이고 순산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리듬을 타라!”는 내적인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먼저 순산을 위해 기도하고, 1994년 12월 24일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분만실 바로 앞방 침대에서 같이 호흡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가장 큰 장점이자 제가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저의 말을 최대한 신뢰하고 거의 따라준다는 것입니다. 결혼 초창기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때 제가 하라는 대로 숨을 들이마시라면 들이마시고 내뿜으라면 내뿜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하는 말대로 따라하니까 고통의 강도는 점차 심해졌지만 호흡에 어떤 리듬이 생겼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10시 30분 분만실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목회자라고 의사 선생님이 분만실로 따라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분만실에서도 아내가 호흡의 리듬을 잃지 않도록 계속 도우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보다가 약 15분 쯤 후에 제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보! 지금 힘내요!” 그 말을 듣고 아내가 순간적으로 젖 먹던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아내는 편안한 숨을 내쉬었고, 옆에서 간호사가 아이의 탯줄을 묵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분만이 힘든 체형이라고 했던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간 지 15분 만에 은혜를 낳았습니다. 아마 이제까지 아내가 가장 귀하게 느껴졌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제가 한 말을 1초 1초까지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그처럼 남편의 말을 철저히 따라주었기에 아내에게 있는 고통의 시간은 경감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따른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복 받는 최대의 길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마음이 맞아야 행복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뜻을 버리고 하나님 뜻에 맞춰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고, 고통도 줄여주시기를 원하고, 문제도 빨리 해결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기 때문에 때로 원치 않는 십자가라도 하나님이 지게 하시면 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본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큰 은혜를 주려는 것입니다. 그 본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가장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2. 재정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
본문 58절 말씀에서 주님께서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제자의 길을 따르려면 집에 없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아파트를 사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큰 의미에서 재정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스스로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재정 문제에 대해 저축이나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신뢰하는가? 나는 빵보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임을 정말 신뢰하는가?”
우리가 재정 문제를 맡기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마땅한 것을 드리는 단계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고민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아니라 일부분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팁을 원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헌신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요새 헌금 얘기로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낸 소중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이 선교와 구제에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땅을 사고 건축물을 올리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면 진실한 성도라도 헌금생활에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처럼 헌금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문제점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라면 기쁘게 십일조와 선교헌금을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 시간이 되면 교인들이 “이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왔구나.”하면서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경제문제를 하나님께 철저히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두 명의 사업가가 부도가 났습니다. 엄청난 빚 앞에서 한 사람은 자기가 빚을 갚겠다고 수년 동안 자기 사업을 지키려고 애쓰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파산선고를 하고 은행에 모든 처분을 맡겼습니다. 그는 은행이 이미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회사를 망하게 놔두지 않고 살리려고 애쓰며 책임 있게 경영해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년 후에 그는 은행의 도움으로 재기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은행이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그를 망하게 버려두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그분의 귀한 독생자를 투자하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투자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해 파산선고를 하고, 인간적인 몸부림을 그치고 재정문제도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물질을 의지하며 살면 영혼은 점차 피폐하게 되지만 열심히 일해서 물질을 벌면서도 동시에 드리고, 나누고, 베풀며 살면 심은 대로 거두는 역사가 어디선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3.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본문 59-60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그때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을 따를 마음이 있었지만 자기 부친의 장사를 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가 있어서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부친을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 빨리 갔다 오라!” 아마 대부분의 목회자들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 시험에 들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전도하라!” 왜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고 봉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가 매일 정기적으로 말씀을 대하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지 않는 것은 “나는 내 힘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하루의 일정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시간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교회 봉사 중의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참여하십시오. 아무리 바쁜 인생도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하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조차 정말 없다면 그것은 너무 바쁜 것이고, 일중독에 빠진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위해 한 가지라도 봉사할 시간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일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교회와 교인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우리의 시간을 드리면서 결국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편하고 참여하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참여할 때 신앙도 자라고 사랑도 자라고 인생의 만족과 보람과 기쁨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우선순위를 잘 두는 창조적 시간관리의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몇 배로 증폭시켜 되돌려주십니다.
역사상 성공한 사람들과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었던 공통적인 삶의 자세는 바로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잘 구분해서 시간을 정복할 줄 아는 사람이 사업도 정복할 수 있고 세상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앞세우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환란과 실패를 당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아무리 다른 바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시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도 주실 것입니다.
4. 끊을 줄 알고 거절할 줄 아는 것
본문 61-62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즉시 좇기로 결단하고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떠나는 것을 가족에게 말하고 오겠습니다.” 그처럼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주님은 또 상처가 될만한 말을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매정하게 말을 하십니까? 결국 그 말씀은 과거의 미련을 잘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과거의 모든 잘못된 일과 상처의 기억을 버리고 육적인 일과 잘못된 습관을 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두 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는 과거에 이미 들어온 잘못된 것을 끊는 것과 앞으로 잘못된 것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세는 부귀영화를 거절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복된 존재가 되려면 특별히 5가지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훈련, 부모님께 드리는 훈련, 이웃에게 베푸는 훈련, 동료들 사이에서 식당 같은 데서 내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너무 형편이 어려워 낼 형편이 되지 못하면 앞으로 넉넉히 호주머니를 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합니다. 행복한 지도자가 되는 제일 훈련 코스는 ‘물질을 거절하는 훈련 코스’입니다.
저는 전도사 때 한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얻어먹기 좋아하고 낼 줄 모르는 직업이 세 개 있는데 그것은 목사, 경찰서장, 그리고 세무서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처럼 음식점에서 이 세 사람이 같이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누가 돈을 냈을까요? 아무도 안내서 음식점 주인이 냈다고 합니다.
그 유머를 듣고 저도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해서 그때부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얻어먹는 만큼 사주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얻어먹기보다는 많이 사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교회와 선교와 구제를 위해 헌금도 많이 하게 하소서!” 목회자가 돈에 욕심을 부리면 목회는 제일 조잡하게 돈을 버는 직업이 됩니다. 행복한 지도자가 되려면 물질 거절을 잘하고 얻어먹는 만큼 사주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둘째, 이성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남자나 여자를 노리는 사람처럼 추한 사람은 없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절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말아야 하고, 성도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교우를 보는 눈빛은 언제나 순수해야 하고, 아예 이성이 틈탈 여지는 전혀 주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명예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 받는 정승직이 아니라 섬기는 머슴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직분 때문에 시험에 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일은 자신의 진국 신앙을 보여주는 일이고, 사람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이고, 그저 끝까지 충성하는 일입니다.
넷째, 쾌락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바둑을 좋아해서 설교할 때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힘든 광야생활에서 백성들이 불평을 하며 모세에게 달려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아다리 되었습니다.” 물론 안식은 필요합니다. 그러 지나친 오락은 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컴퓨터 게임이나 채팅은 아예 배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섯째, 자존심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교인들 명단을 적어놓고 꼽아봤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나갔으면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나갔으면 좋고...”하는 식으로 다 꼽아보니까 나중에 사모님만 남았다고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맘에 들지 않는 교인도 눈에 보이고, 상처 입을 때도 있지만 “저런 사람도 필요하지! 나는 내 자신을 잘 지켜가기만 하자!”라고 생각하며 자존심 상해도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극적인 역전 인생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하면 끊는 것과 거절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이 깨질까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를 두려워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채워지기를 추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드리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자기를 드린다는 것은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최고의 삶으로 보고,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손해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린다면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면 우리교회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모두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도 깊어지고 사역의 역량과 미래를 향한 추진력도 강해질 것이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면 우리 영혼은 더욱 풍성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 앤 라이스(Anne Rice)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주술의 여왕(the Queen of the Occult)’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녀는 흡혈귀와 마녀에 관한 소설을 써서 수백만 권을 팔았고, 실제로 그녀의 많은 책들은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는 영화들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오직 주님만 위해서 소설을 쓸 것입니다.” 그녀는 최근에 ‘애굽에서 나온 그리스도(Christ the Lord: Out of Egypt)’라는 책을 썼는데, 그녀는 그 책에서 예수님의 7살 때 얘기를 쓰면서 성경에 모순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그녀에 대해 뉴스위크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그녀의 변화는 밥 딜런(Bob Dylan) 이후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만든 극적인 변화입니다.”
앤 라이스는 ‘흡혈귀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라는 소설로 많이 독자를 확보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서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기 위해 그녀의 경력과 삶의 스타일, 그리고 명성과 돈까지 포기하고 미래의 위험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축복에 대한 집념보다는 포기해야 할 것을 깨끗이 포기하는 자세가 더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단순히 떡을 원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신령한 떡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기적적으로 떡을 주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 얘기를 하자 사람들은 “그 말씀은 듣기도 어렵고 따르기도 어렵다!”고 거의 대부분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67절 말씀에서 12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68절 말씀에서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초라한 12제자는 가장 위대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들처럼 기적의 떡을 찾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림으로 최후 승리를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철학에서 흔히 얘기되는 플라톤의 동굴(Plato’s Cave)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는 어릴 때부터 동굴에 묶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머리도 고정되어서 한쪽 벽만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뒤에는 불이 있는데, 그들을 묶은 사람이 어떤 물건을 옮기면 불 때문에 벽에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 그림자를 보고 묶인 죄수들은 그 그림자 모양의 이름을 붙입니다. 그들에게 그 그림자는 진짜 세계 아니었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거기에서 만약 한 죄수가 밖으로 끌려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강한 빛에 의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눈이 점점 적응되면서 산과 나무, 하늘과 강, 다양한 동식물, 밤낮의 변화를 보면서 전율할 것입니다. 그때야 그는 동굴 안에서 거의 소경처럼 살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가 다른 죄수들에게 바깥 세계의 경이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를 미쳤다고 하며 죽이려고 합니다.
그 동굴 비유는 이 세상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아름답고 환상적인 천국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않았고, 빛보다 자기가 경험한 그림자를 더 선호하고 빛이 비추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빛이 비추면 자신의 부족한 허물이 다 드러나고, 과거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도전을 싫어하고 이제까지 살던 대로 편하게 살면서 거기에 예수님 믿는 것을 하나 더 더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편안한 삶의 일부분이 되기를 원할 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기보다는 자신의 그림자에 예수님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런 그림자 신앙을 버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삶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삶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이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삶의 전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안전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미래의 보다 소중한 축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기를 원합니다.
< 자기를 버리는 삶의 의미 >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집에 차고를 새로 만들어 ‘차고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옛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버리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
본문 57-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누군가 즉흥적으로 주님이 어디에 가든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궁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거의 동문서답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즉흥적으로 따르는 길이나 자기 영광을 위한 길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의지적으로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대개 사람이 원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내 환경과 자아를 극복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최대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인생은 가장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1994년 은혜를 처음 낳을 때 의사 선생님은 아내가 자연분만이 힘든 체형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 고통을 줄이고 순산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리듬을 타라!”는 내적인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먼저 순산을 위해 기도하고, 1994년 12월 24일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분만실 바로 앞방 침대에서 같이 호흡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가장 큰 장점이자 제가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저의 말을 최대한 신뢰하고 거의 따라준다는 것입니다. 결혼 초창기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때 제가 하라는 대로 숨을 들이마시라면 들이마시고 내뿜으라면 내뿜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하는 말대로 따라하니까 고통의 강도는 점차 심해졌지만 호흡에 어떤 리듬이 생겼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10시 30분 분만실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목회자라고 의사 선생님이 분만실로 따라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분만실에서도 아내가 호흡의 리듬을 잃지 않도록 계속 도우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보다가 약 15분 쯤 후에 제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보! 지금 힘내요!” 그 말을 듣고 아내가 순간적으로 젖 먹던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아내는 편안한 숨을 내쉬었고, 옆에서 간호사가 아이의 탯줄을 묵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분만이 힘든 체형이라고 했던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간 지 15분 만에 은혜를 낳았습니다. 아마 이제까지 아내가 가장 귀하게 느껴졌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제가 한 말을 1초 1초까지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그처럼 남편의 말을 철저히 따라주었기에 아내에게 있는 고통의 시간은 경감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따른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복 받는 최대의 길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마음이 맞아야 행복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뜻을 버리고 하나님 뜻에 맞춰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고, 고통도 줄여주시기를 원하고, 문제도 빨리 해결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기 때문에 때로 원치 않는 십자가라도 하나님이 지게 하시면 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본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큰 은혜를 주려는 것입니다. 그 본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가장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2. 재정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
본문 58절 말씀에서 주님께서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제자의 길을 따르려면 집에 없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아파트를 사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큰 의미에서 재정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스스로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재정 문제에 대해 저축이나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신뢰하는가? 나는 빵보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임을 정말 신뢰하는가?”
우리가 재정 문제를 맡기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마땅한 것을 드리는 단계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고민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아니라 일부분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팁을 원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헌신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요새 헌금 얘기로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낸 소중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이 선교와 구제에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 땅을 사고 건축물을 올리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면 진실한 성도라도 헌금생활에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처럼 헌금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문제점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라면 기쁘게 십일조와 선교헌금을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 시간이 되면 교인들이 “이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왔구나.”하면서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경제문제를 하나님께 철저히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두 명의 사업가가 부도가 났습니다. 엄청난 빚 앞에서 한 사람은 자기가 빚을 갚겠다고 수년 동안 자기 사업을 지키려고 애쓰다 결국 실패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파산선고를 하고 은행에 모든 처분을 맡겼습니다. 그는 은행이 이미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회사를 망하게 놔두지 않고 살리려고 애쓰며 책임 있게 경영해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년 후에 그는 은행의 도움으로 재기해서 억만장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은행이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그를 망하게 버려두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그분의 귀한 독생자를 투자하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투자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해 파산선고를 하고, 인간적인 몸부림을 그치고 재정문제도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물질을 의지하며 살면 영혼은 점차 피폐하게 되지만 열심히 일해서 물질을 벌면서도 동시에 드리고, 나누고, 베풀며 살면 심은 대로 거두는 역사가 어디선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3.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본문 59-60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그때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을 따를 마음이 있었지만 자기 부친의 장사를 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가 있어서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지만 먼저 부친을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 빨리 갔다 오라!” 아마 대부분의 목회자들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 시험에 들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전도하라!” 왜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고 봉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가 매일 정기적으로 말씀을 대하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지 않는 것은 “나는 내 힘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짜 성도라면 하루의 일정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시간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교회 봉사 중의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참여하십시오. 아무리 바쁜 인생도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하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조차 정말 없다면 그것은 너무 바쁜 것이고, 일중독에 빠진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위해 한 가지라도 봉사할 시간이나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일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교회와 교인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우리의 시간을 드리면서 결국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편하고 참여하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참여할 때 신앙도 자라고 사랑도 자라고 인생의 만족과 보람과 기쁨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우선순위를 잘 두는 창조적 시간관리의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몇 배로 증폭시켜 되돌려주십니다.
역사상 성공한 사람들과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었던 공통적인 삶의 자세는 바로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잘 구분해서 시간을 정복할 줄 아는 사람이 사업도 정복할 수 있고 세상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앞세우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환란과 실패를 당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아무리 다른 바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시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도 주실 것입니다.
4. 끊을 줄 알고 거절할 줄 아는 것
본문 61-62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즉시 좇기로 결단하고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떠나는 것을 가족에게 말하고 오겠습니다.” 그처럼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주님은 또 상처가 될만한 말을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매정하게 말을 하십니까? 결국 그 말씀은 과거의 미련을 잘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과거의 모든 잘못된 일과 상처의 기억을 버리고 육적인 일과 잘못된 습관을 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두 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는 과거에 이미 들어온 잘못된 것을 끊는 것과 앞으로 잘못된 것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세는 부귀영화를 거절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복된 존재가 되려면 특별히 5가지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훈련, 부모님께 드리는 훈련, 이웃에게 베푸는 훈련, 동료들 사이에서 식당 같은 데서 내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너무 형편이 어려워 낼 형편이 되지 못하면 앞으로 넉넉히 호주머니를 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합니다. 행복한 지도자가 되는 제일 훈련 코스는 ‘물질을 거절하는 훈련 코스’입니다.
저는 전도사 때 한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얻어먹기 좋아하고 낼 줄 모르는 직업이 세 개 있는데 그것은 목사, 경찰서장, 그리고 세무서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처럼 음식점에서 이 세 사람이 같이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누가 돈을 냈을까요? 아무도 안내서 음식점 주인이 냈다고 합니다.
그 유머를 듣고 저도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해서 그때부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얻어먹는 만큼 사주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얻어먹기보다는 많이 사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교회와 선교와 구제를 위해 헌금도 많이 하게 하소서!” 목회자가 돈에 욕심을 부리면 목회는 제일 조잡하게 돈을 버는 직업이 됩니다. 행복한 지도자가 되려면 물질 거절을 잘하고 얻어먹는 만큼 사주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둘째, 이성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남자나 여자를 노리는 사람처럼 추한 사람은 없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절대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말아야 하고, 성도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교우를 보는 눈빛은 언제나 순수해야 하고, 아예 이성이 틈탈 여지는 전혀 주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명예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김 받는 정승직이 아니라 섬기는 머슴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직분 때문에 시험에 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일은 자신의 진국 신앙을 보여주는 일이고, 사람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이고, 그저 끝까지 충성하는 일입니다.
넷째, 쾌락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바둑을 좋아해서 설교할 때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힘든 광야생활에서 백성들이 불평을 하며 모세에게 달려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아다리 되었습니다.” 물론 안식은 필요합니다. 그러 지나친 오락은 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컴퓨터 게임이나 채팅은 아예 배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섯째, 자존심 거절을 잘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교인들 명단을 적어놓고 꼽아봤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나갔으면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나갔으면 좋고...”하는 식으로 다 꼽아보니까 나중에 사모님만 남았다고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맘에 들지 않는 교인도 눈에 보이고, 상처 입을 때도 있지만 “저런 사람도 필요하지! 나는 내 자신을 잘 지켜가기만 하자!”라고 생각하며 자존심 상해도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극적인 역전 인생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하면 끊는 것과 거절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이 깨질까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를 두려워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채워지기를 추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드리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자기를 드린다는 것은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최고의 삶으로 보고,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손해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린다면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이고,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면 우리교회는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모두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도 깊어지고 사역의 역량과 미래를 향한 추진력도 강해질 것이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면 우리 영혼은 더욱 풍성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 앤 라이스(Anne Rice)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주술의 여왕(the Queen of the Occult)’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녀는 흡혈귀와 마녀에 관한 소설을 써서 수백만 권을 팔았고, 실제로 그녀의 많은 책들은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하는 영화들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얼마 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오직 주님만 위해서 소설을 쓸 것입니다.” 그녀는 최근에 ‘애굽에서 나온 그리스도(Christ the Lord: Out of Egypt)’라는 책을 썼는데, 그녀는 그 책에서 예수님의 7살 때 얘기를 쓰면서 성경에 모순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그녀에 대해 뉴스위크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그녀의 변화는 밥 딜런(Bob Dylan) 이후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만든 극적인 변화입니다.”
앤 라이스는 ‘흡혈귀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라는 소설로 많이 독자를 확보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서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기 위해 그녀의 경력과 삶의 스타일, 그리고 명성과 돈까지 포기하고 미래의 위험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축복에 대한 집념보다는 포기해야 할 것을 깨끗이 포기하는 자세가 더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단순히 떡을 원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신령한 떡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기적적으로 떡을 주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 얘기를 하자 사람들은 “그 말씀은 듣기도 어렵고 따르기도 어렵다!”고 거의 대부분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67절 말씀에서 12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68절 말씀에서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초라한 12제자는 가장 위대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제자들처럼 기적의 떡을 찾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림으로 최후 승리를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