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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2:38-4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대조적인 두 부류의 사람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삼가라”는 것은 “조심하라”,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즉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본받지 말라”, 그들에게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모든 서기관들을 싸잡아서 비판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 38-39절에서 보듯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신 것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긴 옷”이란 회당에서 공식적인 기도나 다른 종교적 행사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서기관들이 걸치는 일종의 숄 같은 것입니다. 발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고 끝에는 역시 긴 술이 달려 있는 흰색 숄입니다. 서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들이 길거리나 시장을 지나갈 때면 장사하느라고 바쁜 사람들 말고는 다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서기관들은 자기가 서기관임을 과시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존경어린 인사를 받기 위해 회당 밖에서도 그 긴 흰색 숄을 걸치고 다니곤 했던 것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사람들이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존경과 복종의 뜻을 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존경 받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란 회당 안의 두루마리 성경을 넣어두는 궤 앞에 있는 회중을 마주보고 앉는 긴 의자를 말합니다. “잔치의 윗자리”는 잔칫집 주인의 좌우 자리나 아니면 적어도 주인이 앉는 식탁에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지체 높은 사람들은 잔치를 베풀 때 장식품처럼 유명한 서기관들과 그 제자들을 많이 불러 “잔치의 윗자리”에 앉히곤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그 부모들보다도 더 존대를 받곤 했습니다. 즉 회당의 높은 자리나 잔치의 윗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 받는 분을 모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의 높은 자리나 잔치의 윗자리 자체를 비난하신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과 본받을 만한 삶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그런 자리에 앉도록 청함을 받는 것 자체를 탓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높은 자리에 앉으며 인사 받는 것 자체를 탐내서 거짓으로 경건한 척하고 모든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위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선하고 순수한 뜻이 아니라 헛된 욕심이 앞서고,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 마음속을 차지하게 하며, 하나님께만 돌려져야할 영광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비판이 40절에 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들에게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부금으로 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일반일과 같은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서기관들 중에는 거의 구걸을 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특별히 훌륭한 선행이며 경건행위로 적극 권장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필요할 때 쓰도록 일정한 재정을 할애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부 서기관들로 하여금 온당치 못한 기부금을 기대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마도 서기관 중에는 돈 많은 과부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며 그 과부가 자기의 가산을 몽땅 기증하게 만들거나 과부같이 힘없는 사람들의 집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법적 수단을 강구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서기관들은 과부들로부터 두둑한 기부금을 받아내기를 기대하며 특별히 길게 기도해주되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탐욕과 외식에 사로잡힌 서기관들을 가리키시며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과부를 상대로 한 서기관들의 이러한 타락행위는 사실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 범죄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보호하고 배려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출22:22-24에서는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했습니다. 신10:1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 했습니다. 신명기는 계속해서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신24:17),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19-21),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9) 합니다. 또 신14:29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토지소산의 십일조로 레위인과 함께 과부와 고아를 배불리 먹게 하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 했습니다(신26:12-13). 이렇게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특별한 보호와 배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가산을 삼키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앞부분에서 공명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위선과 외식을 일삼는 서기관들을 언급하신 예수님께서는 41절 이하에서는 이에 대비시켜 한 과부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헌금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지켜보신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헌금을 많이 넣는 부자도 여럿 있었는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본문 43-44절). “렙돈”은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동전 중 가장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 가치가 커야 64분의 1 데나리온이고 작게는 100분의 1 데나리온도 못되는 돈이었습니다. 쉽게 대충 요즘 우리 형편으로 말하면 라면 하나 살 정도의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다른 어떤 부자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넉넉히 살고도 남는 돈에서 헌금을 했지만 그 과부는 자기가 살기에도 모자라는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다시 말하면 라면 한 개 살 돈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 헌금함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이 과부의 헌금행위는 그리고 나서 어찌 살 것인가 하는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지켜주시고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하나님께서 또 계속해서 책임지시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는 믿음의 행위로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서기관들의 탐욕스럽고 가식적인 믿음생활과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순수한 신앙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의 헌금행위가 달리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의도하신 바가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서기관들을 언급하실 때는 그들을 삼가라 하셨고 그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비시켜 과부를 말씀하실 때는 “저 과부를 본받아라”든가 “저 과부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든가 하는 말씀을 하실 법한데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밀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사실확인만 하셨지 어떤 가치평가를 하셨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그 과부의 헌금행위가 삶의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순수한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해석일 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부는 왜 그토록 가난하면서도 자기에게 남은 그 보잘 것 없는 몇 푼 돈까지도 다 헌금함에 털어 넣었겠느냐 하는 물음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40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가리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 하신 말씀의 의미와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자기들보다 더 어려운 과부들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훌륭한 덕행이며 참된 경건의 증거라고 강조함으로써 그 순진한 과부로 하여금 앞뒤 가리지 않고 있는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치게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감언이설로 자기보다 더 가난한 과부까지 등쳐먹는 파렴치한 서기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그의 신앙을 예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녀를 그렇게 하게 만든 서기관들에 대해서 분개하시고 통탄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오는 것이 의미 있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막13:1-2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과부를 보호해야 함을 가르치고 솔선수범해야 할 서기관들이 오히려 그 가산을 삼키기까지 하는 영적 타락상이 가져올 무서운 결과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가 아니겠느냐 말씀하신 것 같이 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일지는 단언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이 다수가 아니라 해도 이 해석은 쉽게 내던지기에는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유대교신앙의 대변인으로 권위를 자랑하던 서기관들의 공명심과 탐욕과 위선과 가식을 날카롭게 관찰하시고 질타하신 예수님의 눈길입니다. 그 예수님의 눈길은 그 앞에서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 서기관들의 모습이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은 아닌지 짚어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날카로운 눈길 앞에서 나는 얼마나 편안할 수 있을지를 우리 모두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교회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서기관들처럼 무조건 존경받기를 좋아하다 보면 오히려 경멸을 당하게 되는 법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기어이 그 자리에 앉겠다고 하면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져 패대기를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먼저 인사할 줄 모르면서 인사 받기만 좋아하면 되레 욕을 먹거나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으로 경건한 척하다 보면 위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면 곧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다 보면 자연히 거기에 앉아야 할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불필요한 시기와 경쟁과 비방을 하게 되어 공동체 안에서 문제아로 전락하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서기관들의 문제점은 공명심과 탐욕 그리고 위선과 외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자기를 무너뜨리는 주범입니다. 거짓 경건의 핵심입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삼감으로써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의 덕을 동시에 바르게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저녁과 월요일저녁 우리는 제직수련회를 갖고 금년에 신실하고 충성된 제직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제직들이, 또 중직자일수록 더더욱, 교우들의 눈에 서기관처럼 비쳐지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우들의 눈보다 더 두려워할 것은 주님의 눈길입니다. 제직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눈길이 따뜻하고 미소 짓는 눈길이 되도록 기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1907년의 한국교회의 대각성과 대부흥운동이 오늘날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주 대조적인 두 부류의 사람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삼가라”는 것은 “조심하라”,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즉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본받지 말라”, 그들에게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모든 서기관들을 싸잡아서 비판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 38-39절에서 보듯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신 것입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긴 옷”이란 회당에서 공식적인 기도나 다른 종교적 행사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서기관들이 걸치는 일종의 숄 같은 것입니다. 발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고 끝에는 역시 긴 술이 달려 있는 흰색 숄입니다. 서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들이 길거리나 시장을 지나갈 때면 장사하느라고 바쁜 사람들 말고는 다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서기관들은 자기가 서기관임을 과시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존경어린 인사를 받기 위해 회당 밖에서도 그 긴 흰색 숄을 걸치고 다니곤 했던 것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사람들이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존경과 복종의 뜻을 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존경 받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란 회당 안의 두루마리 성경을 넣어두는 궤 앞에 있는 회중을 마주보고 앉는 긴 의자를 말합니다. “잔치의 윗자리”는 잔칫집 주인의 좌우 자리나 아니면 적어도 주인이 앉는 식탁에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지체 높은 사람들은 잔치를 베풀 때 장식품처럼 유명한 서기관들과 그 제자들을 많이 불러 “잔치의 윗자리”에 앉히곤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그 부모들보다도 더 존대를 받곤 했습니다. 즉 회당의 높은 자리나 잔치의 윗자리는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라 존경 받는 분을 모시는 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의 높은 자리나 잔치의 윗자리 자체를 비난하신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과 본받을 만한 삶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그런 자리에 앉도록 청함을 받는 것 자체를 탓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높은 자리에 앉으며 인사 받는 것 자체를 탐내서 거짓으로 경건한 척하고 모든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행위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선하고 순수한 뜻이 아니라 헛된 욕심이 앞서고,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 마음속을 차지하게 하며, 하나님께만 돌려져야할 영광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비판이 40절에 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서기관들에게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부금으로 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일반일과 같은 직업을 가져야 했습니다. 서기관들 중에는 거의 구걸을 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은 특별히 훌륭한 선행이며 경건행위로 적극 권장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필요할 때 쓰도록 일정한 재정을 할애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부 서기관들로 하여금 온당치 못한 기부금을 기대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아마도 서기관 중에는 돈 많은 과부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며 그 과부가 자기의 가산을 몽땅 기증하게 만들거나 과부같이 힘없는 사람들의 집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법적 수단을 강구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서기관들은 과부들로부터 두둑한 기부금을 받아내기를 기대하며 특별히 길게 기도해주되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탐욕과 외식에 사로잡힌 서기관들을 가리키시며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과부를 상대로 한 서기관들의 이러한 타락행위는 사실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 범죄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부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보호하고 배려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출22:22-24에서는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했습니다. 신10:1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 했습니다. 신명기는 계속해서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신24:17),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19-21),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19) 합니다. 또 신14:29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토지소산의 십일조로 레위인과 함께 과부와 고아를 배불리 먹게 하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 했습니다(신26:12-13). 이렇게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특별한 보호와 배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가산을 삼키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앞부분에서 공명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위선과 외식을 일삼는 서기관들을 언급하신 예수님께서는 41절 이하에서는 이에 대비시켜 한 과부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41절에 보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헌금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지켜보신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헌금을 많이 넣는 부자도 여럿 있었는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본문 43-44절). “렙돈”은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동전 중 가장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 가치가 커야 64분의 1 데나리온이고 작게는 100분의 1 데나리온도 못되는 돈이었습니다. 쉽게 대충 요즘 우리 형편으로 말하면 라면 하나 살 정도의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다른 어떤 부자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넉넉히 살고도 남는 돈에서 헌금을 했지만 그 과부는 자기가 살기에도 모자라는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다시 말하면 라면 한 개 살 돈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 헌금함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이 과부의 헌금행위는 그리고 나서 어찌 살 것인가 하는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지켜주시고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하나님께서 또 계속해서 책임지시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으며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는 믿음의 행위로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서기관들의 탐욕스럽고 가식적인 믿음생활과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순수한 신앙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의 헌금행위가 달리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의도하신 바가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서기관들을 언급하실 때는 그들을 삼가라 하셨고 그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비시켜 과부를 말씀하실 때는 “저 과부를 본받아라”든가 “저 과부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든가 하는 말씀을 하실 법한데 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밀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사실확인만 하셨지 어떤 가치평가를 하셨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그 과부의 헌금행위가 삶의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행위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순수한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해석일 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과부는 왜 그토록 가난하면서도 자기에게 남은 그 보잘 것 없는 몇 푼 돈까지도 다 헌금함에 털어 넣었겠느냐 하는 물음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40절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가리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 하신 말씀의 의미와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자기들보다 더 어려운 과부들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훌륭한 덕행이며 참된 경건의 증거라고 강조함으로써 그 순진한 과부로 하여금 앞뒤 가리지 않고 있는 모든 것을 헌금으로 바치게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감언이설로 자기보다 더 가난한 과부까지 등쳐먹는 파렴치한 서기관들의 행태를 질타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그의 신앙을 예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녀를 그렇게 하게 만든 서기관들에 대해서 분개하시고 통탄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오는 것이 의미 있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막13:1-2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과부를 보호해야 함을 가르치고 솔선수범해야 할 서기관들이 오히려 그 가산을 삼키기까지 하는 영적 타락상이 가져올 무서운 결과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가 아니겠느냐 말씀하신 것 같이 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일지는 단언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이 다수가 아니라 해도 이 해석은 쉽게 내던지기에는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유대교신앙의 대변인으로 권위를 자랑하던 서기관들의 공명심과 탐욕과 위선과 가식을 날카롭게 관찰하시고 질타하신 예수님의 눈길입니다. 그 예수님의 눈길은 그 앞에서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 서기관들의 모습이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은 아닌지 짚어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날카로운 눈길 앞에서 나는 얼마나 편안할 수 있을지를 우리 모두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교회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서기관들처럼 무조건 존경받기를 좋아하다 보면 오히려 경멸을 당하게 되는 법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기어이 그 자리에 앉겠다고 하면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져 패대기를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먼저 인사할 줄 모르면서 인사 받기만 좋아하면 되레 욕을 먹거나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으로 경건한 척하다 보면 위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면 곧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다 보면 자연히 거기에 앉아야 할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불필요한 시기와 경쟁과 비방을 하게 되어 공동체 안에서 문제아로 전락하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서기관들의 문제점은 공명심과 탐욕 그리고 위선과 외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어지럽히고 자기를 무너뜨리는 주범입니다. 거짓 경건의 핵심입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삼감으로써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의 덕을 동시에 바르게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저녁과 월요일저녁 우리는 제직수련회를 갖고 금년에 신실하고 충성된 제직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제직들이, 또 중직자일수록 더더욱, 교우들의 눈에 서기관처럼 비쳐지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우들의 눈보다 더 두려워할 것은 주님의 눈길입니다. 제직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눈길이 따뜻하고 미소 짓는 눈길이 되도록 기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1907년의 한국교회의 대각성과 대부흥운동이 오늘날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