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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3~51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자기의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는 순간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이스라엘 사람”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본래 예수를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새롭게 된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의 권유로 예수님께 나왔지만 결국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1. 참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
여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인격이나 생활이 당장 성자처럼 바뀌어 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집안이 혈통적으로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이스라엘인임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라고 하였습니다(빌 3:5). 참 이스라엘의 요건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합니다. 신명기 7:6에 “너는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1:3-5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함이며 그러기 위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있는 자입니다. 본래 이방인이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변화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도리를 말씀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3:6-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을 좇는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나는 변화의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리고 성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남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하여는 4배나 변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9:8-9).
2. 참 이스라엘 사람의 특징
옛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저희 조상이라는 것과 할례를 받은 것에 대하여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2:28-29).
1) 진실한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47절에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것은 그에게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모습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경우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는 세리요 부자였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가 돈만 아는 구두쇠이거나 또 남의 재산을 토색한 자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스스로 남의 재산을 착취한 것에 대하여 4배나 변상하겠다고 실토하는 것은 진실한 양심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선언 하신 것입니다(눅 19:9).
2)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 받았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같은 고향인 벳세다 출신으로서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며 첫말에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강권에 못 이겨 나다나엘은 예수님께로 나아갔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는 자요 또 그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는 자입니다. 로마서 8:15에는 우리가 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3) 제자의 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누가 봐도 첫눈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자인 것입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자기를 낮추며 겸손한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4).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고전 10:23-24).
3. 환상이 있는 사람입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하는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0절).
1)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1절).
하늘이 열리는 환상은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마 3:16).
사도 바울도 셋째하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2).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신실한 성도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1:17에 보면 마음 눈이 밝아진 사람은 부르심의 소망과 장차 받게 될 기업의 풍성함과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힘의 강력한 은사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을 통하여 그가 의도하시는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8:19).
예수님께서도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마 4:19).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증거하며 영혼 구원의 위대한 사역을 맡기기 위하여 부르신 자들을 훈련시켜 세상에 내어 보내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라 부를 만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맡은 사명에 진력할 수 있도록 환상을 주시며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2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3) 축복의 싸인(sign)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오는 환상과 함께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창 2:14). 성경은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였습니다(시 11:4). 인간이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린다고 할 때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이삭은 밧단 아람으로 떠나는 야곱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 27:28). 이것은 신령한 복과 육신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하늘에서 내려준 양식입니다. 시편 78:24에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신실한 그의 백성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말 4:10).
목회자 칼럼 -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다투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어 왔다. 설명하자면 대충 이런 이야기이다. 어느 시골 동네에서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서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서울역에 내려서 남산 위에 올라가 소나무도 보고 또 경복궁 창경원 등 이름난 곳을 다 보았는데 남대문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서울역 가까운 곳에 국보 1호로 지정된 2층 기와집의 큰 건물을 사람들은 남대문이라고 했는데 그 헌판에 새겨진 이름은 남대문이 아닌 다른 이름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 가 본적이 없는 사람이 나서서 “남대문을 남대문이라 쓴 것이 당연하지 무슨 다른 이름을 썼겠느냐? 자네가 잘못 보고 하는 말이다”고 핀잔을 주었다. 지금도 그 앞을 지나가 본 사람은 남대문의 헌판이 숭례문(崇禮門)으로 표기된 것을 대번에 알게 된다. 그래서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은 대단히 옳은 말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요즈음은 교통과 통신이 좋아졌고 우리의 문화도 과히 지구촌 시대를 실감하게 되었지만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는 성지순례 가는 것을 꿈같은 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성지순례 한번 안하고도 성경에 있는 지명이나 이스라엘의 생활풍습 같은 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든지 주일학교 공과를 가르칠 때 자기가 보고 겪은 것처럼 자신 있게 가르치곤 하였다. 그러다가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사실과 다르게 알고 가르친 것이 탄로 나기 시작했다. 그곳의 기후나 풍토 또는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무시한 채 순전히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인식하고 있던 것들이 현장에 가서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고대 랍비들이 성경 사본을 필사할 때 양 가죽(羊皮紙)위에나 갈대로 만든 종이에다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기록했다고 배웠다. 그때도 우리의 관점에서는 양의 가죽을 어떻게 가공하여 종이가 되는 것인지, 딱딱하고 부러지기 잘하는 갈대를 어떻게 종이처럼 펴서 글을 쓸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 애굽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나일강 근처에서 나는 식물을 잘라 와서 물을 빼고 방망이 같은 것으로 얇게 누른 다음 우리나라의 창호지 같은 종이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게 성경의 사본 역사와 함께 오랜 전통의 파피루스(papyrus)문화인 것이다. 지금은 성지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성지문화를 편리하게 접할 수 있도록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구와 생활풍습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표본 마을도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어학연수를 위하여 세계 여러 곳으로 진출하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있다. 바깥세계로 나가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의 세계를 넓히며 인식의 정확성을 고취하게 된다는 교육적인 목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비용과 어려운 시간을 밑천 들여서 무형의 자산을 얻기 위한 값진 도전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교회도 오는 2월 26일부터 4박 5일간 권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태국과 베트남 지역으로 단기선교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선교현장을 직접 보고 부딪치는 가운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며 효과적인 정책을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쪼록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현지 선교사들에게 힘을 보태 주고 또 자신들이 크게 도전받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자기의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는 순간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이스라엘 사람”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본래 예수를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새롭게 된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의 권유로 예수님께 나왔지만 결국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고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1. 참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
여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인격이나 생활이 당장 성자처럼 바뀌어 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집안이 혈통적으로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이스라엘인임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라고 하였습니다(빌 3:5). 참 이스라엘의 요건은 먼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합니다. 신명기 7:6에 “너는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1:3-5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 위함이며 그러기 위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의미에서 참 이스라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있는 자입니다. 본래 이방인이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변화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도리를 말씀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3:6-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을 좇는 신령한 사람으로 다시 나는 변화의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리고 성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남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하여는 4배나 변상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눅 19:8-9).
2. 참 이스라엘 사람의 특징
옛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저희 조상이라는 것과 할례를 받은 것에 대하여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2:28-29).
1) 진실한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47절에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것은 그에게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모습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경우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는 세리요 부자였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가 돈만 아는 구두쇠이거나 또 남의 재산을 토색한 자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스스로 남의 재산을 착취한 것에 대하여 4배나 변상하겠다고 실토하는 것은 진실한 양심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선언 하신 것입니다(눅 19:9).
2)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 받았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같은 고향인 벳세다 출신으로서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며 첫말에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강권에 못 이겨 나다나엘은 예수님께로 나아갔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는 자요 또 그 사실을 입으로 고백하는 자입니다. 로마서 8:15에는 우리가 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3) 제자의 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누가 봐도 첫눈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자인 것입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자기를 낮추며 겸손한 삶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8:4).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고전 10:23-24).
3. 환상이 있는 사람입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하는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0절).
1)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51절).
하늘이 열리는 환상은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마 3:16).
사도 바울도 셋째하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2).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하시는 신실한 성도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십니다. 에베소서 1:17에 보면 마음 눈이 밝아진 사람은 부르심의 소망과 장차 받게 될 기업의 풍성함과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힘의 강력한 은사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을 통하여 그가 의도하시는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8:19).
예수님께서도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마 4:19).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증거하며 영혼 구원의 위대한 사역을 맡기기 위하여 부르신 자들을 훈련시켜 세상에 내어 보내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라 부를 만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맡은 사명에 진력할 수 있도록 환상을 주시며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2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3) 축복의 싸인(sign)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오는 환상과 함께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창 2:14). 성경은 하늘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였습니다(시 11:4). 인간이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린다고 할 때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이삭은 밧단 아람으로 떠나는 야곱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 27:28). 이것은 신령한 복과 육신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도 하늘에서 내려준 양식입니다. 시편 78:24에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신실한 그의 백성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말 4:10).
목회자 칼럼 -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다투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어 왔다. 설명하자면 대충 이런 이야기이다. 어느 시골 동네에서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서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서울역에 내려서 남산 위에 올라가 소나무도 보고 또 경복궁 창경원 등 이름난 곳을 다 보았는데 남대문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서울역 가까운 곳에 국보 1호로 지정된 2층 기와집의 큰 건물을 사람들은 남대문이라고 했는데 그 헌판에 새겨진 이름은 남대문이 아닌 다른 이름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 가 본적이 없는 사람이 나서서 “남대문을 남대문이라 쓴 것이 당연하지 무슨 다른 이름을 썼겠느냐? 자네가 잘못 보고 하는 말이다”고 핀잔을 주었다. 지금도 그 앞을 지나가 본 사람은 남대문의 헌판이 숭례문(崇禮門)으로 표기된 것을 대번에 알게 된다. 그래서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은 대단히 옳은 말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요즈음은 교통과 통신이 좋아졌고 우리의 문화도 과히 지구촌 시대를 실감하게 되었지만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는 성지순례 가는 것을 꿈같은 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성지순례 한번 안하고도 성경에 있는 지명이나 이스라엘의 생활풍습 같은 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든지 주일학교 공과를 가르칠 때 자기가 보고 겪은 것처럼 자신 있게 가르치곤 하였다. 그러다가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사실과 다르게 알고 가르친 것이 탄로 나기 시작했다. 그곳의 기후나 풍토 또는 역사와 문화의 배경을 무시한 채 순전히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인식하고 있던 것들이 현장에 가서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고대 랍비들이 성경 사본을 필사할 때 양 가죽(羊皮紙)위에나 갈대로 만든 종이에다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기록했다고 배웠다. 그때도 우리의 관점에서는 양의 가죽을 어떻게 가공하여 종이가 되는 것인지, 딱딱하고 부러지기 잘하는 갈대를 어떻게 종이처럼 펴서 글을 쓸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 애굽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나일강 근처에서 나는 식물을 잘라 와서 물을 빼고 방망이 같은 것으로 얇게 누른 다음 우리나라의 창호지 같은 종이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게 성경의 사본 역사와 함께 오랜 전통의 파피루스(papyrus)문화인 것이다. 지금은 성지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성지문화를 편리하게 접할 수 있도록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구와 생활풍습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표본 마을도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어학연수를 위하여 세계 여러 곳으로 진출하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있다. 바깥세계로 나가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자기의 마음의 세계를 넓히며 인식의 정확성을 고취하게 된다는 교육적인 목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비용과 어려운 시간을 밑천 들여서 무형의 자산을 얻기 위한 값진 도전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교회도 오는 2월 26일부터 4박 5일간 권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태국과 베트남 지역으로 단기선교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선교현장을 직접 보고 부딪치는 가운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며 효과적인 정책을 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쪼록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현지 선교사들에게 힘을 보태 주고 또 자신들이 크게 도전받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