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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4:7-15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며 세계적인 일본경영인으로 알려진 아이와나 파낙소닉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이 71개 계열사에 13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에게 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회장님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까?”그런데 마쓰시다 회장은 의외로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나는 세 가지 하늘(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네... 세 가지 큰 은혜란 첫째는 가난함이요, 둘째는 허약한 것이요, 셋째는 못 배운 것이라네.”그 말에 기자가 무척 놀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 세상이 불행한 것은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 그걸 오히려 하늘(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러자 마쓰시다 회장이 다시 말했습니다.“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지.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썼기 때문에 아흔이 넘는 지금도 겨울에 냉수마찰을 한다네. 알다시피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한 게 내 학력의 전부야. 그래서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고 배웠다네. 배우는 노력을 계속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지... 이런 불행한 환경들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었으니 하늘(하나님)이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네.”
여러분! 참 감동적인 고백 아닙니까? 어렵고 불행한 환경들을 가졌는데도 그것을 축복받는 삶의 도구로 여겼다는 사실, 낮아짐 속에서 배우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올해 축복의 삶은 나를 얼마나 비우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는 만큼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은혜의 감동으로 채워지려면 불편한 감정을 지워야 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과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낮추고 또 낮추는 만큼 주님이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열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나를 비우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비젼을 향해 나아갈 힘과 용기, 지혜를 공급하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과 축복과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충족시켜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하셨습니다. 생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물이 없는 곳은 죽음의 사막입니다. 또한 생수는 만족의 상징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갈시켜줍니다. 또한 생수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의미합니다(요 7:39).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 목말라 하는 본능이 있지만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아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사랑의 그리움이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어떠한 종류의 사랑도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종점이 없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만 사랑의 참 만족을 얻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십자가의 도는 사랑의 도이며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인간이란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는 존재입니다. 달리는 사슴이 물을 갈망하듯 인간은 새로운 생명수를 갈구합니다. 그러다가 물을 마시고 나면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마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늘 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준비되지 않을 때 겪는 어려움은, 때로 배고픔보다도 더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3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또한 예레미아 2장 13절에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생수를 주시는 분, 그리하여 생명을 소생시키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생수인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에서는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표현했고, 요한복음 6장 34절에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생수를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는데 새로운 남편을 만날 때마다 기대가 컸을 것이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사랑을 기대했지만 새로운 남편들 간에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절대적인 존재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그런 것입니다. 그 점을 알면서도 마시고 또 마시며, 추구하고 또 추구하는 것입니다. 만족하는 것은 순간이고 갈증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어디 마시는 물 뿐이겠습니까? 인간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남이 가진 것 보면서 부러워서 열심히 추구해가지만 막상 그 것이 주어지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멋있었던 사람은 한 순간만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모릅니다. 많은 경우 만나서 이야기만 해도 신선함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멋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같이 살려고 한다면 실망할 것입니다. 인간의 목마름이란 그런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성취된 뒤에도 계속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샘물,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날로 새로운 샘물
날로 새로운 샘물, 사귀면 사귈수록 더욱 멋있고, 더욱 든든하고, 신선한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인간에게는 예수님 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 공간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허전하거나 허무할 때가 있습니까?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돈이나 지위, 누구의 칭찬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기 전에는 이 갈증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시원함이 없는 생활, 불쌍한 생입니다. 목마름과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14-15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참 생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 마음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어떠한 갈증도 해갈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이 생수라는 것은 일정하게 나오고 물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비가 올 때 물이 많이 나온다면 그 물은 가짜입니다. 빗물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조금 가물었다고 물의 양이 적어져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합니다.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일정량이 나오고 항상 시원합니다. 물맛이 변해도 가짜입니다.
여기서 배워야할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상태는 늘 변합니다. 때로 기분 좋을 때면 신이 나서 하지만, 조금만 힘들어도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중심에 계셔서 생명의 샘이 되신 예수님은 늘 일정하게 우리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 실망하면 위로의 생수를 공급해 주시고, 지쳐있으면 용기의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 이렇게 생명의 샘되신 예수님을 우리 영혼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이 과정을 영적인 변화라고 합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들의 마음 중심, 영혼 중심에 모시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면 생수의 강이 흘러내린다.
온전히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생수의 강이 생깁니다. 생명의 말씀이 흘러내립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물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면 신앙상태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것을 세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생명의 샘물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다. 영혼의 중심에 샘물이 있습니다. 성령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머리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수라 말하더라"입니다. 이 사람은 생명수라고 믿지만, 예수님 보다 더 좋은 지식이 머리속으로 들어오면 금방 그것에 빠져서 그것이 예수님 대신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 별 것 아니구나" 하고 깨달아야 다시 돌아옵니다. 또 다른 타입은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생명 샘은 자기 아닌 밖에 있습니다. 그러다 목마름 느낄 때만 찾아갑니다. 마시는 것은 잠깐 그리고는 또다시 목말라 찾아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세 가지 타입 중 첫 번째가 제일 좋습니다. 목회자가 진정 기뻐할 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예수님이라는 생명 샘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때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결코 타는 목마름이 없다.
여인이 구했던 것은 영원한 샘물이었습니다. 그 분이 계시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수이기에 목마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면 다른 것으로 바꿀 마음이 전혀 안들 정도로 나의 목마름을 늘 채워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인격적인 영입니다.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문제를 상담해 주는 자입니다.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맘에 계셔서 우리의 사정을 들어주시고 우리가 욕심에 사로잡혀 갈증을 느낀다는 것을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백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인격적인 영으로 자리 잡으셔서 영원한 샘물처럼 우리를 용서하시고, 갈증을 채워주시는 영원한 샘물 같은 분입니다. 온갖 어려움이 닥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길을 제시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내 안에 계시면 목마름은 전혀 없습니다. 성령이 계시면 목마름은 없습니다. 우리의 허전한 마음, 고독한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야말로 종교생활의 핵심이요 신앙의 본질이며 다른 모든 종교적인 덕목보다 위대한 것이다.”(A.J.헤셀). 기쁨이 없는 인생은 기름이 없는 램프와 같습니다.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자유를 보장받을 때 과연 기쁨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진실한 기쁨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15: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혼인 잔치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이 표적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부된 성도들이 장차 천국 혼인 잔치에서 누리게 될 구속의 은혜의 풍성함과 기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남의 종교
잔칫집은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이 마냥 행복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미혹에 의해서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게 되었습니다. 멀리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사랑과 의와 화평으로 만나고, 서로 감사와 축복으로 만나는 곳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변화의 종교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졌을 때 귀빈들과 모든 축하객들의 상에 올라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용도로 변화되고, 위치가 변화되고,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멸망 받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요 1:12,13). 기독교는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자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으로,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게으른 사람을 충성된 사람으로,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던 사람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축복의 종교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즐거움이 넘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감사와 즐거움이 있게 된 것은 곧 축복입니다. 주의 영광으로 충만해지는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요, 변화의 종교이며, 축복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새롭게 변화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며,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고, 즐거움이 넘치며, 주의 영광으로 충만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역할을 끊임없이 감당하는 교회,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을 제공하며 생수의 역할을 감당하며 축제의 삶을 누리는 영암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며 세계적인 일본경영인으로 알려진 아이와나 파낙소닉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이 71개 계열사에 13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에게 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회장님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까?”그런데 마쓰시다 회장은 의외로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나는 세 가지 하늘(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네... 세 가지 큰 은혜란 첫째는 가난함이요, 둘째는 허약한 것이요, 셋째는 못 배운 것이라네.”그 말에 기자가 무척 놀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 세상이 불행한 것은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 그걸 오히려 하늘(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러자 마쓰시다 회장이 다시 말했습니다.“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지.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썼기 때문에 아흔이 넘는 지금도 겨울에 냉수마찰을 한다네. 알다시피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한 게 내 학력의 전부야. 그래서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고 배웠다네. 배우는 노력을 계속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지... 이런 불행한 환경들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었으니 하늘(하나님)이 준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네.”
여러분! 참 감동적인 고백 아닙니까? 어렵고 불행한 환경들을 가졌는데도 그것을 축복받는 삶의 도구로 여겼다는 사실, 낮아짐 속에서 배우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올해 축복의 삶은 나를 얼마나 비우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는 만큼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은혜의 감동으로 채워지려면 불편한 감정을 지워야 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과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낮추고 또 낮추는 만큼 주님이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열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나를 비우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비젼을 향해 나아갈 힘과 용기, 지혜를 공급하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과 축복과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충족시켜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하셨습니다. 생수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물이 없는 곳은 죽음의 사막입니다. 또한 생수는 만족의 상징입니다.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갈시켜줍니다. 또한 생수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의미합니다(요 7:39).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 목말라 하는 본능이 있지만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아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사랑의 그리움이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어떠한 종류의 사랑도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만족이 없고 종점이 없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만 사랑의 참 만족을 얻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십자가의 도는 사랑의 도이며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인간이란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 하는 존재입니다. 달리는 사슴이 물을 갈망하듯 인간은 새로운 생명수를 갈구합니다. 그러다가 물을 마시고 나면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마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늘 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준비되지 않을 때 겪는 어려움은, 때로 배고픔보다도 더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3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또한 예레미아 2장 13절에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생수를 주시는 분, 그리하여 생명을 소생시키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은 생수인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에서는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표현했고, 요한복음 6장 34절에 "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생수를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는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두었는데 새로운 남편을 만날 때마다 기대가 컸을 것이지만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사랑을 기대했지만 새로운 남편들 간에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절대적인 존재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기대하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그런 것입니다. 그 점을 알면서도 마시고 또 마시며, 추구하고 또 추구하는 것입니다. 만족하는 것은 순간이고 갈증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어디 마시는 물 뿐이겠습니까? 인간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남이 가진 것 보면서 부러워서 열심히 추구해가지만 막상 그 것이 주어지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멋있었던 사람은 한 순간만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모릅니다. 많은 경우 만나서 이야기만 해도 신선함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멋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같이 살려고 한다면 실망할 것입니다. 인간의 목마름이란 그런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성취된 뒤에도 계속적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샘물,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날로 새로운 샘물
날로 새로운 샘물, 사귀면 사귈수록 더욱 멋있고, 더욱 든든하고, 신선한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인간에게는 예수님 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 공간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허전하거나 허무할 때가 있습니까?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돈이나 지위, 누구의 칭찬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기 전에는 이 갈증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시원함이 없는 생활, 불쌍한 생입니다. 목마름과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14-15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참 생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 마음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어떠한 갈증도 해갈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이 생수라는 것은 일정하게 나오고 물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비가 올 때 물이 많이 나온다면 그 물은 가짜입니다. 빗물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조금 가물었다고 물의 양이 적어져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정합니다.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일정량이 나오고 항상 시원합니다. 물맛이 변해도 가짜입니다.
여기서 배워야할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상태는 늘 변합니다. 때로 기분 좋을 때면 신이 나서 하지만, 조금만 힘들어도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중심에 계셔서 생명의 샘이 되신 예수님은 늘 일정하게 우리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 실망하면 위로의 생수를 공급해 주시고, 지쳐있으면 용기의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 이렇게 생명의 샘되신 예수님을 우리 영혼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이 과정을 영적인 변화라고 합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들의 마음 중심, 영혼 중심에 모시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면 생수의 강이 흘러내린다.
온전히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생수의 강이 생깁니다. 생명의 말씀이 흘러내립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물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면 신앙상태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것을 세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생명의 샘물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다. 영혼의 중심에 샘물이 있습니다. 성령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머리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수라 말하더라"입니다. 이 사람은 생명수라고 믿지만, 예수님 보다 더 좋은 지식이 머리속으로 들어오면 금방 그것에 빠져서 그것이 예수님 대신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 별 것 아니구나" 하고 깨달아야 다시 돌아옵니다. 또 다른 타입은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생명 샘은 자기 아닌 밖에 있습니다. 그러다 목마름 느낄 때만 찾아갑니다. 마시는 것은 잠깐 그리고는 또다시 목말라 찾아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세 가지 타입 중 첫 번째가 제일 좋습니다. 목회자가 진정 기뻐할 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예수님이라는 생명 샘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때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결코 타는 목마름이 없다.
여인이 구했던 것은 영원한 샘물이었습니다. 그 분이 계시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수이기에 목마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와 계시면 다른 것으로 바꿀 마음이 전혀 안들 정도로 나의 목마름을 늘 채워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인격적인 영입니다.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문제를 상담해 주는 자입니다.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맘에 계셔서 우리의 사정을 들어주시고 우리가 욕심에 사로잡혀 갈증을 느낀다는 것을 지적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백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인격적인 영으로 자리 잡으셔서 영원한 샘물처럼 우리를 용서하시고, 갈증을 채워주시는 영원한 샘물 같은 분입니다. 온갖 어려움이 닥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길을 제시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내 안에 계시면 목마름은 전혀 없습니다. 성령이 계시면 목마름은 없습니다. 우리의 허전한 마음, 고독한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야말로 종교생활의 핵심이요 신앙의 본질이며 다른 모든 종교적인 덕목보다 위대한 것이다.”(A.J.헤셀). 기쁨이 없는 인생은 기름이 없는 램프와 같습니다. <막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자유를 보장받을 때 과연 기쁨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마디로 표현해서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진실한 기쁨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15: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혼인 잔치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이 표적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부된 성도들이 장차 천국 혼인 잔치에서 누리게 될 구속의 은혜의 풍성함과 기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남의 종교
잔칫집은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이 마냥 행복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미혹에 의해서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게 되었습니다. 멀리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사랑과 의와 화평으로 만나고, 서로 감사와 축복으로 만나는 곳이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변화의 종교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졌을 때 귀빈들과 모든 축하객들의 상에 올라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용도로 변화되고, 위치가 변화되고,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멸망 받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것입니다(요 1:12,13). 기독교는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교만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자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으로,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게으른 사람을 충성된 사람으로,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던 사람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축복의 종교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즐거움이 넘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감사와 즐거움이 있게 된 것은 곧 축복입니다. 주의 영광으로 충만해지는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만남의 종교요, 변화의 종교이며, 축복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새롭게 변화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며,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고, 즐거움이 넘치며, 주의 영광으로 충만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역할을 끊임없이 감당하는 교회,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을 제공하며 생수의 역할을 감당하며 축제의 삶을 누리는 영암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