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롬7:1-6
로마서7장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오랫만에 고향에 온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늘 그러하셨던 것 처럼 우리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 은혜와 감격의 바다에 잠기게 할 것 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성경중에서 제일 뜻이 깊고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 로마서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책인 것 같지만 그 숨겨진 복음의 줄기가 너무도 깊고 오묘하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 로마서중에도 우리가 함께 묵상하게될 7장은 가장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래서 다드라는 신학자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 본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석은 이 본문은 인간이 풀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오묘하다는 고백뿐입니다. 했습니다. 로마서 7장이 오묘하기도 한데 깊이 묵상을 하면 롬6:7절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 이는 소속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모두는 법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은 우리 모두는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옮겨 이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법동에 살 때에는 법의 지배아래 있어 죄가 주관하는 삶을 살았으나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죄도 법도 나를 상관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렇게 나는 은혜아래 사는 자 된 것입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옮겨왔으니 이제 나는 은혜동 사람처럼 살면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 아래 있는 자처럼 법아래 매여 있다면 은혜동으로 옮겨왔어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생각속에서나마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는 착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것입니다. 마귀가 얼마나 간교한지 아십니까?
처음에도 사람들은 죄와 사망이라는 울타리안에 가두고 유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사람들은 죄와 사망에서 자유합니다. 마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손가락하나 건드릴 수 없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단은 포기하는가 아닙니다. 이제 자신에게서 자유한 사람들을 생각의 울타리에 갇히게 합니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실은 아닌데 생각속에서 사단이 주는 생각에 매여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귀는 생각속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요즘 사람들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힘들지요 옆의 사람하고 나하고 누가 힘들게 사는 것 같습니까? 생각으로 두려움과 염려를 심어 줍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과거 어릴적 상처로 인하여 비만 오면 두려워하고 천둥번개만치면 고통속에 헤메이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속에서 그 천둥벼락이 나를 향할 것 같습니다. 나만을 향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마귀입니다. 생각속에 두려움과 염려를 심어줍니다. 결국 생각속에 메이게 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합니다. 사랑하는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은혜동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설픈 과거의 생각이 죄의 생각이 저와 여러분을 쓰러뜨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법동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동으로 옮겨 오면서 죄와 사망에서 과거와 과거의 모든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단호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
오늘 본문에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여인으로 태어나 한 남자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결혼하여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남편을 만난 것입니다. 부부로서 한 몸이 되어 살지만 따로 결혼 한 것이 아니라 어느날 보니 함께 하고 있었고 어느날 보니 신랑이 되어 있었고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랑과 함께 산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함께 살지만 늘 일방적입니다. 때로 폭군이 되어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때로 정죄하며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짓눌러 버립니다. 도무지 그 남편앞에서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남편이지만 그 남편앞에 서면 기가 죽고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그 남편이 결국은 자신을 짓눌러 죽일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아주 나쁜 남편이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그 남편도 하나님이 주신 남편입니다. 이 남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세상에서 복중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 남편은 모든 면에 있어 완벽합니다. 자신만 완벽한 것이 아니면 모두에게 완벽한 존재입니다. 그 남편은 모든 면에 있어 깨끗합니다. 너무도 깨끗하여 남의 허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남편의 손에는 언제나 613개의 조항이 있습니다. 613개의 조항을 가지고 하라 하지말라 하며 그 조항을 가지고 아내된 여인에게 요구합니다. 그 613가지의 조항에서 하나라도 무너지면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그 여인에게 613가지의 조항을 지켜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라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 잘난 남편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완벽한 남편과 함께 살기에는 여인으로서 너무 허물도 많고 연약한 것입니다. 남편의 손에 들려있는 613가지의 요구 중에 하나하나 지키기에는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그 잘난 남편앞에서 자유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과 헤어져 그 남편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려고도 해 보았지만 한번 맺어진 그 남편과는 헤어질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남편앞에서 도망하여 다른 남자에게 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리하면 음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음부에는 613개의 조항중 하나라도 어기면 돌을 던져 죽이라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또 몰래가서 산다해도 새로 만난 남편은 훨씬 더 험악하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자유를 주는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그 신랑을 찾아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남편은 처음에는 자유하고 마음대로 살게 하는 것 같다가 결국에는 훨씬 더 폭력남편이 되어 사람들의 영과 육을 패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갈수도 없습니다. 끌리기는 하지만 결국을 알기때문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인가를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남편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완벽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한 신랑에게 자신이 맞추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남편과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의 허물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납니다.
그 완벽한 남편 앞에서 자유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있습니다. 죽음입니다. 그 남편에게서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아내가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문제는 그 남편이 죽지 않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좀 변했으면 좋겠지만 그 남편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주님 오실 때까지 존재하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여인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죽어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인에게 있어 죽음은 해결책같지만 해결책은 아닙니다. 죽어 남편에게는 자유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그 영혼이 지옥신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죽음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차라리 죽는게 나아 죽는 것이 여러사람 돕는 것이야 하는 사단의 참소를 이겨야 합니다.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개인적으로는 지옥에 가고 남아 있는 가족들은 상처와 아픔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인은 남편앞에서 죽어야 될 것 같은데 방법은 없습니다. 또 남편이 결국 죽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절망입니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며 다가옵니다. 다 이루었다 하며 다가옵니다. 전 남편의 요구를 자신이 다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온 남자는 옛남편의 요구하는 바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에게 자유하는 방법이 죽음이라면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간음한 여인에게조차도 깊은 사랑으로 다가갈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새로 다가온 남자는 죽었더라도 다시 사는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옛날 남편 걱정 말고 오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의 요구를 대신 다 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613가지 정도가 아니라 만 가지라도 그 요구에 응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요구하면 죽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다만 여인 혼자 죽는 것과 달리 새롭게 다가 온 남편과 함께 죽으면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믿어집니다. 드디어 옛날 남편에게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남편에게 갔습니다. 미련 없이 그 신랑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시 함께 살아났습니다. 드디어 옛날 남편에게 자유했습니다. 드디어 전 남편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해졌습니다.
새로운 남편은 만난 것입니다. 새로 만난 남편은 옛 남편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잘난 남편이지만 그 손에는 613개의 조항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손에는 은혜만 있었습니다. 행여 미련을 못 버린채 전 남편이 다가오려하면 새로 만난 남편이 지켜 줍니다. 새 남편앞에서는 죽었다 살아났기에 음부가 음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새 남편과 살지만 때론 자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새로운 남편이 안아줍니다. 생각속에서 자유하라 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옛날남편에게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새로 만난 남편은 어떤 법칙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인정해 줍니다. 드디어 여인은 사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이 무엇인가 알아갑니다. 드디어 여인은 자유가 무엇인가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갑니다.
여전히 자격은 없지만 행복을 찾은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이제 커텐을 걷어보겠습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전 남편은 율법이라는 남편이고 새로운 남편은 복음남편인 우리 주 예수님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사도는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반문합니다. 당시 복음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매여있는 성도들을 향한 외침입니다. 여인과 남편의 예를 듭니다.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여 다른 남자에게 가는 음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안에 있는 성도들은 율법안에서 자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모두가 죄로부터 용서받은 자임을 믿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은혜는 과거와 현재 마귀의 죄까지 용서받은 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용서받았다 하면서도 신앙생활이 그리스도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채 여전히 하라 하지말라는 율법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니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의외로 신앙생활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용서는 믿지만 한번도 행복해 보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율법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법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동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율법앞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까? 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미 율법앞에서 죽었으니 율법의 요구앞에 자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롬6: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음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함께 장사되었나니입니다. 6:8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함께 살 줄을 믿노니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믿는 것이요 입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아이들은 언제나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잘못을 했어도 당당히 밥을 달라 합니다. 왜입니까?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죽을때에만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죽는데서 출발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죽었음을 믿을 때 율법에서 자유합니다. 이렇게 죽었음을 믿을 때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굴레에거 벗어나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자유가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어제 한 성도님에게서 메세지가 들어왔습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라는 문자입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욕심앞에서 미움과 시기앞에서 죽어보십시오. 매력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 했습니다. 갈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미 죽은 사람은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4절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다른 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입니다. 다시 산자가 되어 주님에게 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서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있고 의지적 행함이 있습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삶을 엮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두 종류의 신랑이 있었음을 확신합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신랑앙과 복음신랑의 차이를 보면 이렇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똑 같이 완벽합니다. 율법신랑은 613가지 조항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신랑은 십자가의 용서를 가지고 옵니다. 율법은 하지 말라 하라 하며 정죄하지만 복음은 다 이루었다 합니다. 율법은 요구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충족하지만 복음은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합니다. 율법은 우리 죄를 드러내지만 복음은 죄를 감싸줍니다. 율법은 행복하지 않지만 자유하고 행복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행복하십니까? 내가 행복해야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성도님들은 지금 어떤 신랑하고 교제하며 신앙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엄마들은 구분해 봅니다. 그릇을 깬 아이들 보며 선지자적 엄마는 내 그럴 줄 알았다.
율법적 엄마는 네가 깻으면 네가 치워 복음적 엄마는 어디 안 다쳤니? 합니다. 우리 삶에 잘난 남편 잘난 아내일수록 율법적 스타일이 많이 있습니다. 늘 요구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런 가족은 의외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심방대원하고 함께 심방한 적이 있는데 아내의 초청으로 예배를 드리고 함께 이야기를 하던 차에 초인종 소리에 아내가 문을 열고 남편이 오는 것을 보고 쟁반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잘 사는 집이었지만 무엇인가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신랑이 너무 완벽해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도 율법적 목사님 밑에서는 성도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늘 설교도 하라 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예수믿어야 구원받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야 하는데 어떤 성도가 잘못을 g했을 경우 하는 말이 그렇게 행동해서 천국가겠소 합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때문이 아니라 주님때문에 많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여러분 때문에 다른 가족이 행복합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동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출처/유재명 목사 설교 중에서
로마서7장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오랫만에 고향에 온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늘 그러하셨던 것 처럼 우리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 은혜와 감격의 바다에 잠기게 할 것 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성경중에서 제일 뜻이 깊고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 로마서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책인 것 같지만 그 숨겨진 복음의 줄기가 너무도 깊고 오묘하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 로마서중에도 우리가 함께 묵상하게될 7장은 가장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래서 다드라는 신학자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 본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석은 이 본문은 인간이 풀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오묘하다는 고백뿐입니다. 했습니다. 로마서 7장이 오묘하기도 한데 깊이 묵상을 하면 롬6:7절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 이는 소속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모두는 법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은 우리 모두는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옮겨 이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법동에 살 때에는 법의 지배아래 있어 죄가 주관하는 삶을 살았으나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죄도 법도 나를 상관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렇게 나는 은혜아래 사는 자 된 것입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옮겨왔으니 이제 나는 은혜동 사람처럼 살면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 아래 있는 자처럼 법아래 매여 있다면 은혜동으로 옮겨왔어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생각속에서나마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는 착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것입니다. 마귀가 얼마나 간교한지 아십니까?
처음에도 사람들은 죄와 사망이라는 울타리안에 가두고 유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사람들은 죄와 사망에서 자유합니다. 마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손가락하나 건드릴 수 없게 됩니다. 여기에서 사단은 포기하는가 아닙니다. 이제 자신에게서 자유한 사람들을 생각의 울타리에 갇히게 합니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실은 아닌데 생각속에서 사단이 주는 생각에 매여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귀는 생각속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요즘 사람들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힘들지요 옆의 사람하고 나하고 누가 힘들게 사는 것 같습니까? 생각으로 두려움과 염려를 심어 줍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과거 어릴적 상처로 인하여 비만 오면 두려워하고 천둥번개만치면 고통속에 헤메이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속에서 그 천둥벼락이 나를 향할 것 같습니다. 나만을 향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마귀입니다. 생각속에 두려움과 염려를 심어줍니다. 결국 생각속에 메이게 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합니다. 사랑하는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은혜동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설픈 과거의 생각이 죄의 생각이 저와 여러분을 쓰러뜨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법동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동으로 옮겨 오면서 죄와 사망에서 과거와 과거의 모든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단호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
오늘 본문에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여인으로 태어나 한 남자와 결혼을 한 것입니다. 결혼하여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남편을 만난 것입니다. 부부로서 한 몸이 되어 살지만 따로 결혼 한 것이 아니라 어느날 보니 함께 하고 있었고 어느날 보니 신랑이 되어 있었고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랑과 함께 산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함께 살지만 늘 일방적입니다. 때로 폭군이 되어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때로 정죄하며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짓눌러 버립니다. 도무지 그 남편앞에서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남편이지만 그 남편앞에 서면 기가 죽고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그 남편이 결국은 자신을 짓눌러 죽일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아주 나쁜 남편이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그 남편도 하나님이 주신 남편입니다. 이 남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세상에서 복중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 남편은 모든 면에 있어 완벽합니다. 자신만 완벽한 것이 아니면 모두에게 완벽한 존재입니다. 그 남편은 모든 면에 있어 깨끗합니다. 너무도 깨끗하여 남의 허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남편의 손에는 언제나 613개의 조항이 있습니다. 613개의 조항을 가지고 하라 하지말라 하며 그 조항을 가지고 아내된 여인에게 요구합니다. 그 613가지의 조항에서 하나라도 무너지면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그 여인에게 613가지의 조항을 지켜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라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 잘난 남편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완벽한 남편과 함께 살기에는 여인으로서 너무 허물도 많고 연약한 것입니다. 남편의 손에 들려있는 613가지의 요구 중에 하나하나 지키기에는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여인은 그 잘난 남편앞에서 자유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과 헤어져 그 남편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려고도 해 보았지만 한번 맺어진 그 남편과는 헤어질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남편앞에서 도망하여 다른 남자에게 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리하면 음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음부에는 613개의 조항중 하나라도 어기면 돌을 던져 죽이라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또 몰래가서 산다해도 새로 만난 남편은 훨씬 더 험악하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자유를 주는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그 신랑을 찾아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남편은 처음에는 자유하고 마음대로 살게 하는 것 같다가 결국에는 훨씬 더 폭력남편이 되어 사람들의 영과 육을 패망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갈수도 없습니다. 끌리기는 하지만 결국을 알기때문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인가를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남편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완벽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한 신랑에게 자신이 맞추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습니다. 남편과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의 허물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납니다.
그 완벽한 남편 앞에서 자유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있습니다. 죽음입니다. 그 남편에게서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아내가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문제는 그 남편이 죽지 않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좀 변했으면 좋겠지만 그 남편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주님 오실 때까지 존재하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여인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죽어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인에게 있어 죽음은 해결책같지만 해결책은 아닙니다. 죽어 남편에게는 자유할 수는 있지만 사실은 그 영혼이 지옥신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죽음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차라리 죽는게 나아 죽는 것이 여러사람 돕는 것이야 하는 사단의 참소를 이겨야 합니다.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개인적으로는 지옥에 가고 남아 있는 가족들은 상처와 아픔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인은 남편앞에서 죽어야 될 것 같은데 방법은 없습니다. 또 남편이 결국 죽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절망입니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며 다가옵니다. 다 이루었다 하며 다가옵니다. 전 남편의 요구를 자신이 다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온 남자는 옛남편의 요구하는 바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에게 자유하는 방법이 죽음이라면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간음한 여인에게조차도 깊은 사랑으로 다가갈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새로 다가온 남자는 죽었더라도 다시 사는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옛날 남편 걱정 말고 오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의 요구를 대신 다 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613가지 정도가 아니라 만 가지라도 그 요구에 응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요구하면 죽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다만 여인 혼자 죽는 것과 달리 새롭게 다가 온 남편과 함께 죽으면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믿어집니다. 드디어 옛날 남편에게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남편에게 갔습니다. 미련 없이 그 신랑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시 함께 살아났습니다. 드디어 옛날 남편에게 자유했습니다. 드디어 전 남편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해졌습니다.
새로운 남편은 만난 것입니다. 새로 만난 남편은 옛 남편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잘난 남편이지만 그 손에는 613개의 조항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손에는 은혜만 있었습니다. 행여 미련을 못 버린채 전 남편이 다가오려하면 새로 만난 남편이 지켜 줍니다. 새 남편앞에서는 죽었다 살아났기에 음부가 음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새 남편과 살지만 때론 자다가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새로운 남편이 안아줍니다. 생각속에서 자유하라 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옛날남편에게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새로 만난 남편은 어떤 법칙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인정해 줍니다. 드디어 여인은 사는 것이 무엇인가 행복이 무엇인가 알아갑니다. 드디어 여인은 자유가 무엇인가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갑니다.
여전히 자격은 없지만 행복을 찾은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이제 커텐을 걷어보겠습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전 남편은 율법이라는 남편이고 새로운 남편은 복음남편인 우리 주 예수님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사도는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반문합니다. 당시 복음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매여있는 성도들을 향한 외침입니다. 여인과 남편의 예를 듭니다.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여 다른 남자에게 가는 음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안에 있는 성도들은 율법안에서 자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모두가 죄로부터 용서받은 자임을 믿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은혜는 과거와 현재 마귀의 죄까지 용서받은 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용서받았다 하면서도 신앙생활이 그리스도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채 여전히 하라 하지말라는 율법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니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의외로 신앙생활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용서는 믿지만 한번도 행복해 보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제 율법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법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동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율법앞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까? 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미 율법앞에서 죽었으니 율법의 요구앞에 자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롬6: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음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함께 장사되었나니입니다. 6:8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함께 살 줄을 믿노니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믿는 것이요 입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아이들은 언제나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잘못을 했어도 당당히 밥을 달라 합니다. 왜입니까?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죽을때에만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죽는데서 출발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죽었음을 믿을 때 율법에서 자유합니다. 이렇게 죽었음을 믿을 때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굴레에거 벗어나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자유가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어제 한 성도님에게서 메세지가 들어왔습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라는 문자입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욕심앞에서 미움과 시기앞에서 죽어보십시오. 매력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 했습니다. 갈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미 죽은 사람은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4절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다른 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입니다. 다시 산자가 되어 주님에게 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서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있고 의지적 행함이 있습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삶을 엮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두 종류의 신랑이 있었음을 확신합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신랑앙과 복음신랑의 차이를 보면 이렇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똑 같이 완벽합니다. 율법신랑은 613가지 조항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신랑은 십자가의 용서를 가지고 옵니다. 율법은 하지 말라 하라 하며 정죄하지만 복음은 다 이루었다 합니다. 율법은 요구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충족하지만 복음은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합니다. 율법은 우리 죄를 드러내지만 복음은 죄를 감싸줍니다. 율법은 행복하지 않지만 자유하고 행복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행복하십니까? 내가 행복해야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성도님들은 지금 어떤 신랑하고 교제하며 신앙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엄마들은 구분해 봅니다. 그릇을 깬 아이들 보며 선지자적 엄마는 내 그럴 줄 알았다.
율법적 엄마는 네가 깻으면 네가 치워 복음적 엄마는 어디 안 다쳤니? 합니다. 우리 삶에 잘난 남편 잘난 아내일수록 율법적 스타일이 많이 있습니다. 늘 요구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런 가족은 의외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심방대원하고 함께 심방한 적이 있는데 아내의 초청으로 예배를 드리고 함께 이야기를 하던 차에 초인종 소리에 아내가 문을 열고 남편이 오는 것을 보고 쟁반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잘 사는 집이었지만 무엇인가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신랑이 너무 완벽해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도 율법적 목사님 밑에서는 성도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늘 설교도 하라 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예수믿어야 구원받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야 하는데 어떤 성도가 잘못을 g했을 경우 하는 말이 그렇게 행동해서 천국가겠소 합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때문이 아니라 주님때문에 많이 행복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여러분 때문에 다른 가족이 행복합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동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출처/유재명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