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영원한 헌신 (요한복음 12:1~8)
프랑스 파리에 여행 중이던 한 미국 사람이 아내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파리 시내의 어떤 장신구점에 들어가서 중고품 호박 목걸이를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돌아올 때 공항 세관에서 그 목걸이에다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목걸이를 들고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보석상 주인은 2만 5천 불에 그 목걸이를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권위 있는 감정사에게 가서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현미경을 통해 한참 동안 목걸이를 살펴본 감정사는 3만 5천 불을 줄테니 그 목걸이를 자신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목걸이 주인은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목걸이가 왜 그렇게 값이 나가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감정사는 그에게 현미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 보세요. 무엇이 보입니까?”고 했습니다. 그는 현미경을 통해 목걸이에 새겨진 글을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조세핀에게. 나폴레옹으로부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목걸이는 나폴레옹 황제가 그 애인 조세핀에게 준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목걸이는 그리 값진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나폴레옹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에 그토록 값이 나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끔 유명인이 사용하던 물건을 경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별것도 아닌 옷이나 악세사리 등이 그 사람의 유명도에 따라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팔려나가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누구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까?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는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도장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보잘것 없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노벨은 일찍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여 횡재를 했습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굴착공사와 수로발파, 철도와 도로의 건설의 현장에서 다이나마이트의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다이나마이트 때문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대한 발명가”라고 칭찬하는 이들과 함께,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신문의 기사에서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접한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노벨의 형이 죽은 것을 잘못알고 기사로 내보낸 오보였지만, 노벨의 머리 속에는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이라는 제목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노벨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팔아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자선 사업의 기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에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유서를 써서 스톡홀름 은행에 보관하였습니다. 10년 후 그 유서가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는 인류의 미래를 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리학, 화학, 생리학과 의학, 문학 그리고 평화 등 다섯 개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국적에 관계없이 상을 수여한다고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재능은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지만, 남겨진 그의 재산은 인류에게 빛을 전하는데 쓰여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남기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오늘은 이 두 가지 질문을 가슴에 담고, 성경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1. 우리는 언제나 예수를 모시고 잔치하는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은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과 가까운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는 예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었는데,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신 놀라운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이날의 잔치는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마련된 잔치였습니다.
2절에 보면, “거기서 예수를 모시고 잔치할새”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기’는 나사로의 집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살아난 그 곳, 곧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곳, 예수의 은혜가 있는 곳 입니다. 바로 그 곳에서 나사로 가족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곳’은 오늘날 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예수의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모여, 그 은혜를 찬양하고 기뻐하는 곳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교회보다 영광스러운 곳은 없습니다. 교회보다 거룩한 곳이 없습니다. 화려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건물이나, 중요한 기관 회사가 많이 있지만, 교회보다 신령한 곳은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꽃은 한 송이라도 매우 아름답고 향기롭다. 하물며 수많은 꽃들이 질서정연하게 가꾸어져 있는 그 정원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꽃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정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거하는 영광에 대해 시편에서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문지기만 할 수 있어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시편의 고백처럼, 우리도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잔치를 베푼 나사로의 집은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는 예수님을 모신 잔치요, 그 기쁨은 예수님을 모신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을 모신 기쁨의 잔치가 매일 일어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 또한 예수님을 모시고 날마다 잔치하는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언제나 예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자리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 잔치를 위해 마르다는 열심히 일을 하고, 나사로는 손님들과 함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푸짐한 음식과 예수님과의 대화로 잔치자리는 점점 무르익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데 갑자기 마리아가 향유가 들어있는 병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여, 잠시 대화도 중단하고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가지고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정성스럽게 그 발을 씻었습니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다만 향유 냄새만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은 향유는 마리아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처녀들은 시집을 가기 위해서 혼수로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이니까 거의 일년 동안을 한 푼도 안쓰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가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로 씻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머리털로 남자의 발을 씻긴다는 것도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에서 머리털은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에도 “여자의 긴 머리는 자기에게 영광”(고전 11: 14-15) 이라고 했는데, 그 머리털로 남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었으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토록 이상한 행동을 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은혜를 이미 체험하였습니다. 지난 번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려주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인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모든 죄가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삶을 얻었는데, 그분에게 아까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한 향유라도 예수님을 위해 쓰는 것이라면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고,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때묻은 발을 씻겨 드린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와 ‘제 고향에 땅이 좀 있는데, 그곳에 교회를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그 마을에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조그마한 성결교회가 하나 있기는 한데, 저는 장로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한 목사님은 “그럼 그 성결교회를 더 잘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하고 권면했습니다. 장로교회를 세우기 원했던 그 여인은 아쉽기는 했지만 한 목사님의 말씀대로 다 쓰러져가는 성결교회를 수리하고 더 크게 잘 지어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땅을 영락교회에 바쳐, 그곳에 “영락여자신학교”를 세웠습니다. 훗날 그 신학교에서는 훌륭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지장란이어서, 그 신학교이름을 “지장란신학교”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나중에 한 목사님은 그 여자를 가리켜 “남한 산성의 향기”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주님과 그의 교회를 위한 헌신은 하나님나라에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고 지장란이라는 여인처럼 자신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향기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언제나 예수께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칭찬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긴 침묵을 깨고,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그 여인을 비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느냐”(요12:5)
그 제자는 다름 아닌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와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의 인정을 받아 예수 공동체의 회계 일을 맡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마리아의 행동은 어처구니없는 낭비요, 정신 나간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일이지, 왜 낭비하냐’고 마리아를 비난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분명히 비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를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마리아를 비난한 가룟 유다의 의중을 꿰뚫고 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사실 가룟 유다의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성이란 결국 황금만능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가룟 유다는 예수님조차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부터 남신도들이 여신도들을 돕기 위해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도록 했습니다. 평생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남신도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룟 유다의 시각으로 이 아름다운 헌신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는 너무나 아름다운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신도들의 헌신에 남신도들의 헌신을 보태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는 신앙적인 행동에 딴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가롯 유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 7-8)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척했던 가룟 유다보다, 예수님은 이상한 행동을 한 마리아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는 돈에 헌신하는 사람이었던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헌신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우리는 주님께 인정받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 재산과, 자신의 자존심까지 주님을 위해 남김없이 쏟아 부은 마리아의 헌신을 예수님도 최고로 아름다운 행위로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께 칭찬받을 만한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한 힌두교 국가에서 어느 크리스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절름발이 거지가 다가와 동냥을 했습니다. 선교사는 동전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 된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그 여인이 “선교사님의 전도지를 그에게 허비하지 마세요. 그는 결코 크리스천이 될 수 없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3일후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번 그 절름발이 거지가 선교사의 집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어렵게 선교사가 사는 곳을 찾아내서 8마일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전도지를 원했습니다. 새로운 전도지를 받은 그는 선교사의 집 문 앞에서 몇 시간을 앉아 그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와서 말하기를, "성경책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적혀 있더군요. 저도 그 책을 좀 빌려 볼 수 있을까요?"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한 달간의 교육을 받고 그 절름발이 거지는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그는 기독교 서점의 경비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책꽂이의 모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그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전도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도를 통해 무엇을 하실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적인 전도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가 내게 새겨진 이름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계십니까?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4월 22일 총동원 주일은 주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주님께 칭찬 듣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프랑스 파리에 여행 중이던 한 미국 사람이 아내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파리 시내의 어떤 장신구점에 들어가서 중고품 호박 목걸이를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돌아올 때 공항 세관에서 그 목걸이에다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목걸이를 들고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보석상 주인은 2만 5천 불에 그 목걸이를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그는 권위 있는 감정사에게 가서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현미경을 통해 한참 동안 목걸이를 살펴본 감정사는 3만 5천 불을 줄테니 그 목걸이를 자신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목걸이 주인은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목걸이가 왜 그렇게 값이 나가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감정사는 그에게 현미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 보세요. 무엇이 보입니까?”고 했습니다. 그는 현미경을 통해 목걸이에 새겨진 글을 읽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조세핀에게. 나폴레옹으로부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목걸이는 나폴레옹 황제가 그 애인 조세핀에게 준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목걸이는 그리 값진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나폴레옹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에 그토록 값이 나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끔 유명인이 사용하던 물건을 경매하는 경우가 있는데, 별것도 아닌 옷이나 악세사리 등이 그 사람의 유명도에 따라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팔려나가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누구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까?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라는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도장이 찍힌 사람들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보잘것 없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노벨은 일찍이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여 횡재를 했습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굴착공사와 수로발파, 철도와 도로의 건설의 현장에서 다이나마이트의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다이나마이트 때문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대한 발명가”라고 칭찬하는 이들과 함께,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신문의 기사에서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접한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노벨의 형이 죽은 것을 잘못알고 기사로 내보낸 오보였지만, 노벨의 머리 속에는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이라는 제목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노벨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팔아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자선 사업의 기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에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유서를 써서 스톡홀름 은행에 보관하였습니다. 10년 후 그 유서가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는 인류의 미래를 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리학, 화학, 생리학과 의학, 문학 그리고 평화 등 다섯 개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국적에 관계없이 상을 수여한다고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재능은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 주었지만, 남겨진 그의 재산은 인류에게 빛을 전하는데 쓰여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남기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오늘은 이 두 가지 질문을 가슴에 담고, 성경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1. 우리는 언제나 예수를 모시고 잔치하는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은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과 가까운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는 예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이 들어 죽었는데,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신 놀라운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이날의 잔치는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마련된 잔치였습니다.
2절에 보면, “거기서 예수를 모시고 잔치할새”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기’는 나사로의 집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살아난 그 곳, 곧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곳, 예수의 은혜가 있는 곳 입니다. 바로 그 곳에서 나사로 가족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곳’은 오늘날 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예수의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모여, 그 은혜를 찬양하고 기뻐하는 곳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교회보다 영광스러운 곳은 없습니다. 교회보다 거룩한 곳이 없습니다. 화려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건물이나, 중요한 기관 회사가 많이 있지만, 교회보다 신령한 곳은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꽃은 한 송이라도 매우 아름답고 향기롭다. 하물며 수많은 꽃들이 질서정연하게 가꾸어져 있는 그 정원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꽃들이며,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정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거하는 영광에 대해 시편에서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문지기만 할 수 있어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시편의 고백처럼, 우리도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잔치를 베푼 나사로의 집은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는 예수님을 모신 잔치요, 그 기쁨은 예수님을 모신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을 모신 기쁨의 잔치가 매일 일어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 또한 예수님을 모시고 날마다 잔치하는 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우리는 언제나 예수께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자리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 잔치를 위해 마르다는 열심히 일을 하고, 나사로는 손님들과 함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푸짐한 음식과 예수님과의 대화로 잔치자리는 점점 무르익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데 갑자기 마리아가 향유가 들어있는 병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여, 잠시 대화도 중단하고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가지고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정성스럽게 그 발을 씻었습니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다만 향유 냄새만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은 향유는 마리아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처녀들은 시집을 가기 위해서 혼수로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이니까 거의 일년 동안을 한 푼도 안쓰고 모아야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가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로 씻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이었습니다.
또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머리털로 남자의 발을 씻긴다는 것도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에서 머리털은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에도 “여자의 긴 머리는 자기에게 영광”(고전 11: 14-15) 이라고 했는데, 그 머리털로 남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었으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토록 이상한 행동을 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은혜를 이미 체험하였습니다. 지난 번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려주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인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모든 죄가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영원한 삶을 얻었는데, 그분에게 아까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한 향유라도 예수님을 위해 쓰는 것이라면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고,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때묻은 발을 씻겨 드린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와 ‘제 고향에 땅이 좀 있는데, 그곳에 교회를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그 마을에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조그마한 성결교회가 하나 있기는 한데, 저는 장로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한 목사님은 “그럼 그 성결교회를 더 잘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하고 권면했습니다. 장로교회를 세우기 원했던 그 여인은 아쉽기는 했지만 한 목사님의 말씀대로 다 쓰러져가는 성결교회를 수리하고 더 크게 잘 지어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땅을 영락교회에 바쳐, 그곳에 “영락여자신학교”를 세웠습니다. 훗날 그 신학교에서는 훌륭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지장란이어서, 그 신학교이름을 “지장란신학교”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나중에 한 목사님은 그 여자를 가리켜 “남한 산성의 향기”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주님과 그의 교회를 위한 헌신은 하나님나라에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고 지장란이라는 여인처럼 자신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향기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언제나 예수께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칭찬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긴 침묵을 깨고,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그 여인을 비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느냐”(요12:5)
그 제자는 다름 아닌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와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의 인정을 받아 예수 공동체의 회계 일을 맡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마리아의 행동은 어처구니없는 낭비요, 정신 나간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일이지, 왜 낭비하냐’고 마리아를 비난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분명히 비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를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마리아를 비난한 가룟 유다의 의중을 꿰뚫고 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사실 가룟 유다의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성이란 결국 황금만능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가룟 유다는 예수님조차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부터 남신도들이 여신도들을 돕기 위해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도록 했습니다. 평생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남신도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룟 유다의 시각으로 이 아름다운 헌신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는 너무나 아름다운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신도들의 헌신에 남신도들의 헌신을 보태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는 신앙적인 행동에 딴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가롯 유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 7-8)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척했던 가룟 유다보다, 예수님은 이상한 행동을 한 마리아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는 돈에 헌신하는 사람이었던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헌신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우리는 주님께 인정받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 재산과, 자신의 자존심까지 주님을 위해 남김없이 쏟아 부은 마리아의 헌신을 예수님도 최고로 아름다운 행위로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께 칭찬받을 만한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한 힌두교 국가에서 어느 크리스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절름발이 거지가 다가와 동냥을 했습니다. 선교사는 동전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 된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그 여인이 “선교사님의 전도지를 그에게 허비하지 마세요. 그는 결코 크리스천이 될 수 없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 3일후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난번 그 절름발이 거지가 선교사의 집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어렵게 선교사가 사는 곳을 찾아내서 8마일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는 이번에는 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전도지를 원했습니다. 새로운 전도지를 받은 그는 선교사의 집 문 앞에서 몇 시간을 앉아 그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와서 말하기를, "성경책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적혀 있더군요. 저도 그 책을 좀 빌려 볼 수 있을까요?"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한 달간의 교육을 받고 그 절름발이 거지는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그는 기독교 서점의 경비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책꽂이의 모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그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전도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도를 통해 무엇을 하실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적인 전도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가 내게 새겨진 이름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계십니까?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4월 22일 총동원 주일은 주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주님께 칭찬 듣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