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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고전10장1절~13절)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벤자민 플랭클린은 젊은 시절 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 주인이 가르쳐준 지름길을 따라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길을 반쯤 지나는데 갑자기 이웃집 주인이 머리를 숙이라고 외쳤습니다. 길 중앙에 키보다 낮은 들보가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늦어서 그는 머리를 나무에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주인은 급히 달려 나와서 상처 난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살게. 머리를 숙일수록 부딪치는 일이 적을 걸세.”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일로 많은 것을 깨닫고 평생 동안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세가 되었을 때, 스스로 13훈이라는 것을 만들어 평생 삶에서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만든 13훈은 겸손, 침묵, 규율,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중용, 청결, 보건, 평정, 순결, 결단이었다고 합니다. 이 덕목들을 삶에서 실천한 그는 23세에 신문을 발간했는데, 그가 발간한 신문은 얼마 후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신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작가가 되어 명성을 날렸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죽어서도 이어나가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사업에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변화되어 바르게 살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변화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말씀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우리도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하여 이 세상에 밝은 빛을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영적인 사람은 영원한 자유인이 됩니다.
20세기 말,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에서는 앞으로 일본이 세계를 인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전국에서 선발한 20명의 수재를 세계 각국으로 여행시키며 연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세계를 두루 다니며 연구하던 그들이 가장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은, 독일의 훔볼트 대학의 정문에 새겨져 있는 글귀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성경말씀이 쓰여 있었는데 그 말씀 앞에 20여명의 수재들이 마치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리포트를 써서 회사에 제출하였고, 훗날 이 성경구절은 일본 국회 도서관 앞 돌비석에까지 새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초과학의 시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공상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현실로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화에서처럼 인간처럼 생각하고 반응하는 로봇이 등장한다고 하니 인간의 과학기술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극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아이러니칼 하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과학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 할수록 인간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은 극심해지는 인간 소외 현상 속에서 오히려 참된 영성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진리에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이 세상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러한 본질적인 진리를 망각한 채,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다 정작 중요한 진리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경우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서는 고기를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지방에서 제공되는 고기는 먼저 이방신전에 드려졌던 제물이었기에 고기를 먹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우상제물을 먹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단순히 이방 제단에 한 번 올라 갔다는 이유로 고기를 못 먹게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우상제물 사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어떤 음식이든 자유롭게 먹을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의견을 앞세우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유보하는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자기의 자유를 유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평생이라도 고기를 삼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난을 겪었던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살았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자유인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나 경제인이나 예술가보다 이처럼 참자유인이며 영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영적인 사람은 매일 신령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막상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에 들어서자, 현실적인 문제가 눈 앞에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곧 식량과 식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척박한 광야에서 만나와 생수를 그들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마셨던 만나와 생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목격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접경까지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12명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두려움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현상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보고가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이집트 고센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가나안의 강력한 민족들을 몰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열명의 정탐꾼의 말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반대 주장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자신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생명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째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인 보고를 믿지 않고, 열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서 낙심하며 절망했었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음료보다 다른 음식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한 부인이 앵무새를 사서 기르기 위해 애완용 동물을 파는 상점으로 갔습니다. 앵무새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간 부인은 바로 다음날 상점으로 되돌아와서 '앵무새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상점주인은 “새장 안에 거울을 넣어 주셨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앵무새들은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장 거울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상점으로 되돌아와서는 새가 여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다리를 사서 넣어주면 앵무새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다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상점으로 와서 앵무새가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반복했습니다. 상점 주인은 이번에도 뭔가 제안을 했습니다. “그네를 넣어주셨나요? 새들은 그네타고 놀기를 즐기거든요.” 그녀는 다시 그네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상점으로 다시 온 그녀는 새가 죽었노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상점주인은 놀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혹시 앵무새가 죽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 여자는 힘없이 말했습니다. “한마디 하긴 하더군요.”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매일 가는 상점에서 음식은 안파냐고 하더군요.” 불쌍한 앵무새는 굶어 죽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실제로 몸치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구입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들여놓으며, 그네를 구입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먹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양식을 사모하며, 매일 주님의 식탁에 나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살길이 있습니다.
3. 영적인 사람은 언제나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생수를 매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7절)와 음행(8절)과 하나님께 원망(9~10)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나, 자신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죄의 노예, 이방신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자유는 곧 방종이며,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속박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인생의 뿌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라,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고기는 고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데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고기를 먹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상한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웃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마음과 삶,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은 그 뿌리를 자기에게 둔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우리의 마음과 삶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 세상에서 참 자유인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1981년, 그 해 타임지의 인물로 선정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폴란드의 유명한 자유 노조 지도자인 바웬사입니다. 그는 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닙니다. 가문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폴란드의 공산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며 자유 노조를 지지하다가 결국은 1981년에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폴란드 정부는 막대한 군사력과 정치를 동원했지만, 바웬사 한사람을 좀처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무서운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유물론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나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공산당 앞에서 대담하게 자유 노조를 위해 앞장서면서도 자신의 삶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에 싸울 수 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무한한 영적 자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자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세상은 그 같은 성도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자유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주초문제에 부자유스럽다고 가톨릭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쾌락을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안에는 참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를 빙자해서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나 자신의 쾌락을 위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방종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영원한 자유를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내 것을 포기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벤자민 플랭클린은 젊은 시절 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 주인이 가르쳐준 지름길을 따라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길을 반쯤 지나는데 갑자기 이웃집 주인이 머리를 숙이라고 외쳤습니다. 길 중앙에 키보다 낮은 들보가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늦어서 그는 머리를 나무에 심하게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주인은 급히 달려 나와서 상처 난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머리를 숙이고 살게. 머리를 숙일수록 부딪치는 일이 적을 걸세.”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일로 많은 것을 깨닫고 평생 동안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세가 되었을 때, 스스로 13훈이라는 것을 만들어 평생 삶에서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만든 13훈은 겸손, 침묵, 규율,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중용, 청결, 보건, 평정, 순결, 결단이었다고 합니다. 이 덕목들을 삶에서 실천한 그는 23세에 신문을 발간했는데, 그가 발간한 신문은 얼마 후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신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작가가 되어 명성을 날렸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죽어서도 이어나가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사업에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변화되어 바르게 살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변화된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말씀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우리도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하여 이 세상에 밝은 빛을 전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영적인 사람은 영원한 자유인이 됩니다.
20세기 말,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에서는 앞으로 일본이 세계를 인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전국에서 선발한 20명의 수재를 세계 각국으로 여행시키며 연구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세계를 두루 다니며 연구하던 그들이 가장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은, 독일의 훔볼트 대학의 정문에 새겨져 있는 글귀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성경말씀이 쓰여 있었는데 그 말씀 앞에 20여명의 수재들이 마치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리포트를 써서 회사에 제출하였고, 훗날 이 성경구절은 일본 국회 도서관 앞 돌비석에까지 새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초과학의 시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공상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현실로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화에서처럼 인간처럼 생각하고 반응하는 로봇이 등장한다고 하니 인간의 과학기술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은 극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아이러니칼 하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과학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 할수록 인간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은 극심해지는 인간 소외 현상 속에서 오히려 참된 영성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진리에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이 세상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러한 본질적인 진리를 망각한 채,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다 정작 중요한 진리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경우를 잘 보여줍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서는 고기를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지방에서 제공되는 고기는 먼저 이방신전에 드려졌던 제물이었기에 고기를 먹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우상제물을 먹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단순히 이방 제단에 한 번 올라 갔다는 이유로 고기를 못 먹게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우상제물 사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어떤 음식이든 자유롭게 먹을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의견을 앞세우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유보하는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자기의 자유를 유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평생이라도 고기를 삼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난을 겪었던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살았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자유인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나 경제인이나 예술가보다 이처럼 참자유인이며 영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영적인 사람은 매일 신령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막상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에 들어서자, 현실적인 문제가 눈 앞에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곧 식량과 식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척박한 광야에서 만나와 생수를 그들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 마셨던 만나와 생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목격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접경까지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12명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두려움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현상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보고가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이집트 고센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가나안의 강력한 민족들을 몰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열명의 정탐꾼의 말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반대 주장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자신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생명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째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인 보고를 믿지 않고, 열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서 낙심하며 절망했었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양식과 신령한 음료보다 다른 음식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한 부인이 앵무새를 사서 기르기 위해 애완용 동물을 파는 상점으로 갔습니다. 앵무새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간 부인은 바로 다음날 상점으로 되돌아와서 '앵무새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상점주인은 “새장 안에 거울을 넣어 주셨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앵무새들은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장 거울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상점으로 되돌아와서는 새가 여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다리를 사서 넣어주면 앵무새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다리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상점으로 와서 앵무새가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반복했습니다. 상점 주인은 이번에도 뭔가 제안을 했습니다. “그네를 넣어주셨나요? 새들은 그네타고 놀기를 즐기거든요.” 그녀는 다시 그네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상점으로 다시 온 그녀는 새가 죽었노라고 힘없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상점주인은 놀라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혹시 앵무새가 죽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 여자는 힘없이 말했습니다. “한마디 하긴 하더군요.” “그래요? 뭐라고 하던가요?” “매일 가는 상점에서 음식은 안파냐고 하더군요.” 불쌍한 앵무새는 굶어 죽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실제로 몸치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구입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들여놓으며, 그네를 구입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을 위한 양식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먹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양식을 사모하며, 매일 주님의 식탁에 나와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살길이 있습니다.
3. 영적인 사람은 언제나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생수를 매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7절)와 음행(8절)과 하나님께 원망(9~10)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나, 자신들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죄의 노예, 이방신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자유는 곧 방종이며,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속박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인생의 뿌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라,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고기는 고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데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고기를 먹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상한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웃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구원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마음과 삶,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은 그 뿌리를 자기에게 둔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우리의 마음과 삶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 세상에서 참 자유인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1981년, 그 해 타임지의 인물로 선정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폴란드의 유명한 자유 노조 지도자인 바웬사입니다. 그는 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닙니다. 가문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폴란드의 공산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며 자유 노조를 지지하다가 결국은 1981년에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폴란드 정부는 막대한 군사력과 정치를 동원했지만, 바웬사 한사람을 좀처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무서운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유물론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나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공산당 앞에서 대담하게 자유 노조를 위해 앞장서면서도 자신의 삶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에 싸울 수 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무한한 영적 자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자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세상은 그 같은 성도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자유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주초문제에 부자유스럽다고 가톨릭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쾌락을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안에는 참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를 빙자해서 덕을 세우지 못하거나, 나 자신의 쾌락을 위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방종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죄와 사망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영원한 자유를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내 것을 포기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