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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강하시다 (사무엘상 15:17-23 고린도후서 12:7-10)
5%의 비밀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사냥을 할 때,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맹수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입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있습니다. 튼튼한 이빨이 있습니다. 사자가 우리 팔을 물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팔이 부러져 버립니다.
이런 사자가 먹잇감을 향해 백번을 달려갔다면 잡을 수 있는 숫자는 얼마일까요? 거의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겨우 다섯마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성공율 5%. 겨우 5%입니까?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맹수들이 사냥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도 왜 그토록 많은 실패를 하는지 동물학자들은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육식동물은 짧은 시간 안에 먹이를 잡으려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칩니다. 그리고 초식동물도 위기 상황이 되면 자기방어를 위해서 또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실패율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맹수가 이토록 많은 실패를 한다면 맹수는 실제로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반대되는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육식동물의 사냥 성공률이 95%라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육식동물은 사냥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냥이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놀이나 장난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속담도 없어질 것입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사자는 먹잇감이 넘쳐나서 과식으로 비만이 되고 현대인들이 가진 성인병에도 걸리게 될 것입니다. 사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생긴 강인함도 사라지고, 결국엔 단 한 마리도 사냥할 수 없게 더 약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95%의 성공률은 맹수들에게 도리어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도 맹수들처럼 95%의 실패와 5%의 성공으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것입니까? 단 한번의 실패도 감당하지 못하고 우리들은 당장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엉터리 신이라고, 능력이 없다고, 교육방법이 틀렸다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바꾸라고 항의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향해서나 남을 향해서나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100%를 바라고 조금의 부족함도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의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습니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책과 자기 증오에 빠져듭니다. 고난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배반하고 항의하곤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스스로 병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기대 자체가 현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현실적인 기대가 문제이지 현실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100%를 기대하는 삶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는 아주 작은 능력만으로 살아갑니다. 집, 자동차, 컴퓨터, 냉장고, 음식과 옷가지들 어느 것 하나 내 능력만으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도 지극히 작은 일부분만이 만들 수 있고, 지극히 성실한 농부도 자신의 삶에 필요한 단 5%조차 키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동물들과는 달리 실패할 때 더 많이 좌절하는 것은 우리의 주어진 작은 능력에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성공한 자에게는 박수를, 실패한 자에게는 비난과 못난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의 비밀’, ‘부족함의 비밀’, ‘약함의 비밀’을 모르는 세상의 논리일 뿐입니다.
자기 능력을 키우고 더 많은 성공을 통해서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실패를 통해서 더 낮아지고 서로 부족함을 긍정할 때 삶은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신앙과 현실
한 자매님이 예수님을 알고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비밀도 많이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깨닫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에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 자매님의 경제적인 면이나 가족들의 건강 등의 현실이 실상은 별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기쁨도 알고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도 알게 되었는데, 내게는 고통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전에는 모든 것이 우연이려니 내 운명이려니 생각했는데, 하나님을 알고부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현실적 어려움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은 현실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나의 현실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욕심에 이끌리는 질문도 아니고, 원망으로 인한 불신앙의 질문도 아니고 신앙 안에서 생기는 자연스런 질문입니다. 인생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안에 있으므로 무슨 의미가 있지 않겠나 하는 신앙의 진지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시험을 받아서 오는 질문도 아니고, 믿는 사람이면 신앙과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맹목적인 신앙과 어린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분명한 근거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흔히들 이런 질문들을 불신앙이라고 억눌러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억누르면 그 사람의 신앙은 현실이 없는 신앙이 되고, 현실이 없는 신앙은 공허한 신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바울의 두 가지 경험
우리가 바울의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이해함으로써 이 자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세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가는 신비스런 경험을 했습니다. 세째 하늘이라 함은 하나님의 거처로서 가장 신비한 곳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이 이렇게 신비한 경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반대의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동시에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질병을 ‘몸에 가시’라는 말과 ‘사탄의 사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울의 병이 무엇인가 하고 연구들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병이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가 다마스커스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으려고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날 때 너무 강한 빛을 받아서 잠시 눈이 멀게 되는데, 그 이후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는 일생을 지독한 ‘근시’로 살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이것을 ‘주기적 말라리아 열병’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표현에 의하며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쳐서 넘어뜨리는 발작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간질 발작을 하면 무엇에 얻어 맞은 것처럼 바닥에 넘어지게 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간질은 아니지만 ‘발작 증세’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과거에는 원인 모르는 육체적 고통들, 즉 신경적 병들, 류마티스, 심리적인 병들을 모두 악마의 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질병을 ‘사탄의 가시’라고 했을 때, 이런 질병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내인성 우울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는 바울의 병명은 알 수 없지만, 그가 매우 심각한 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전도 여행을 누가라는 의사가 동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질병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단순히 육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병 때문에 사도적 권위까지도 무시당할 때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아서 왜소하며 얼굴이 못생겼고 말도 힘있게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병을 안고 그 험한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권을 인정 받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주제에 남의 병을 고친다’고 하니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제아무리 지식이 많고 영적 경험이 풍부하고 누구보다도 방언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고질적인 질병에 의해 당해야 하는 고통을 줄여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모순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가장 높은 높음과 가장 낮은 비천함이 어우러진 삶입니다. 삼층천에까지 높아진 경험과 가장 낮은 병약함이 그에게는 함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병을 없애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네가 지금 병을 가지고 있어도 이미 너는 충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주시되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고통을 보는 눈을 바꾸어 주십니다. 고통에 대한 다른 해석을 주셨습니다.
고난의 새로운 해석
바울은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자신의 고난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현실은 안 바꾸어 주시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셨습니다. 종교는 현실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참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현실을 이기는 힘의 근원입니다. 현실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현실을 무조건 부정해서는 현실이 바뀌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할 때에 비로소 현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현실이 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겸손의 도구
첫째로 약함은 ‘겸손의 도구’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겸손의 도구로 삼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바울은 고난도 하나님의 겸손의 선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는 많은 영적인 계시와 함께 그와 대조되는 육체적 약점을 가짐으로써, 장점과 단점이 균형을 이루어 교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커서 자타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교만해 질 까봐 하나님께서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므로 참 지혜에 도달하게 합니다. 겸손은 참 지혜의 도구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하여 겸손을 갖게 되었으니 더욱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과거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사울과 같은 이름의 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 자’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 목동이었던 다윗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변하게 하여 바울이라는 ‘작은 자’가 되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벅찬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엡3:8).
2. 은혜의 통로
둘째로 약함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바울은 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바울의 집착을 끊으셨습니다. 사람이 집착하는 순간 장님이 됩니다. 그러나 집착을 끊으면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더 넓은 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약함을 고쳐주시는 것을 거절하시자, 도리어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약함은 위기입니다. 또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강할 때는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높은 영적 차원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즉 교만으로부터 막아 주어 언제나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줍니다.
3. 능력의 통로
셋째로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도리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도리어 강해지는 도구인 것입니다. 은혜는 약함을 고치지 않습니다. 은혜는 강한 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능력은 약한 데서 완성됩니다.
4. 자랑거리
넷째로 약함은 ‘자랑거리’입니다.
사람의 약함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므로 약한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도리어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약함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약함을 자랑하게 되면 도리어 고난의 상품이 될 수 있고 브랜드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누구인가요? 토크쇼의 사회자 오프라 윈프리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십대의 오프라 윈프리는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고 여러 남자들과 데이트를 하는 불량 소녀였습니다. 그러다가 열 네살 때, 결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뱃속의 아이는 엄마의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7개월 째 태어나게 되고 세상에 나온 지 2주 만에 죽었습니다.
그녀는 이런 과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의 암울한 기억을 솔직히 털어 놓았습니다. 또한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체중 감량과 요요 현상을 반복하는 과정을 솔직히 털어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윈프리가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고 많은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약함과 고난을 많은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윈프리가 이런 능력이 어디서 생긴 줄 아십니까? 어린 시절 교회에서의 성경암송과 독서입니다. 윈프리는 성경 암송을 아주 잘 하는 목소리가 낭랑한 아이였습니다. 매번 교회에서 성경 암송을 하면서 말하기와 목소리를 개발하여 결국 유명한 토크쇼의 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약함은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표준새번역, 고후12:9b).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약할 때에 강함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고후12:10절).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 (10절). 사람은 약할 때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강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강하게 되어서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지만, 내가 나를 강하다고 생각하고 나를 주장하는 한 나는 결코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 계속적인 실패와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유혹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넘어짐을 보고 ‘아, 나도 넘어질 수 있느니 조심해야지’ 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악은 강합니다. 악의 힘은 강한데, 악을 맞서서 싸울만큼 아주 강한 인간은 없습니다.
사무엘이 교만에 빠진 사울 왕을 꾸짖으면서 하는 말입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1-13)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바울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장점과 신비한 경험이 바울로 하여금 사도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영적 경험에서가 아니라, 사도로서 받은 고난과 그의 약점을 간직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진행한 점입니다.
사람에게 약함의 고통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이 없으면 몸만 자라고 영혼은 자라지 않는 식물인간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하여 더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약점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종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고 삶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은 고통을 의미있게 해주고, 삶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짊어지게 하고, 문제와 함께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병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 속에 있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 위에 부활이라는 향기로운 꽃을 피워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은 없습니다. 꽃은 바람에 흔들리지만, 이 바람을 통해서 꽃 향기가 널리 널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이 바람이 고통과 같습니다.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
지금의 울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을 가질 수 있다면, 오늘의 울음은 큰 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예수님의 약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렁이같이 무능하고 힘없는 자에게도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