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회복하라   (로마서 12:3-13)

자존감이란?
목회상담학자인 하워드 클라인벨이 쓴 Well Being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Empowering your mind 라고 하는 그런 부분에서 "사람의 마음에 힘을 주는 일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라고 하는 자기 존재 의식, 다시 말해서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있게 태어난 것이요. 내가 알건 모르건 간?! ?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내게 꼭 어떤 의미를 담아서 나로 세상에 존재하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소중하다. 자기 자존감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내가 기술과 지식을 습득해야한다. 즉 능력을 얻어야한다. 능력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얻어서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된다. 셋째는 스스로를 이끄는 내적인 힘이 있어야한다. 자신감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나를 믿어줍니까? 내가 나를 못 믿는 주제에 누구를 믿어라 할 것입니까? 자신이 자기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라"!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삶

꽤 오래된 실화입니다마는여러분들 중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천재소년 김응룡 군! 매스콤에서 천재소년이 나타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3살 때 한글을 읽어내었고, 천자문을 척척 읽고 대학생들이 풀어내는 수학문제도 거뜬히 풀어냈습니다.그래서 김군을 신동이라고 하였습니다.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이 현상은 노력하여 되는 현상이 아니므로 신이 주신 은혜요 신이 내려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이 내려 주신 특별한 은혜나 선물을 가리켜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조수미, 그녀 목소리는 신이 내려준 목소리라고 대부분 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꾀꼬리가 노래하는 것 같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목소리도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하늘이 내려준 목소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로서의 목소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오늘은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특별한 선물, 은사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은사에는 일반은사가 있고 영적 은사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영적은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고 일반은사는 그것과는 관계없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남달리 주신 은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두 종류의 은사가 다 자기자신만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재능이 아니라 일반은사이건 영적은사이건 간에 남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란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서 탁구의 마술사라는 어떤 분이 한국으로 초청되어 경기를 중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조그마한 테아블 위에서 탁구공을 정확하게 쳐내는 탁구의 마술사였습니다.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그의 탁구 솜씨가 노력 끝에 이루어진 솜씨인지 천부적으로 타고난 은사로 받은 솜씨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대단하였습니다.은사라고 불러도 괞챦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탁구 기술을 가리켜 영적은사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를 보아도 탁구의 은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肩?한 은사들을 가리켜 영적 은사라고 하지 않고 일반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축구의 은사, 피아노의 은사, 마라톤의 은사, 바이올린의 은사.. 이러한 은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영적 은사만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적 은사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6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것이 각각 다르니.. 라고 표현하면서 영적 은사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은사는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의 은사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은사입니다.


이 은사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주신 것이지 은사 받은 개개인의 유익만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란 점이 말씀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적 은사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만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이 영적 은사가 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 밖에서 사용되든지 간에 단독적인 개인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그 영적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만 한다는데  은사를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신령한 영적 은사에 대하여 기록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또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 베드로전서 4장, 고린도전서 7장, 에베소서 3장에도 영적 은사가 좀 더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약성경 여러 군데에 등장하는 영적 은사들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면의! 은사, 지도력의 은사, 긍휼의 은사,  지혜의 은사, 믿음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사도의 은사, 서로 돕는 은사, 복음 전하는 은사, 목사의 은사,  순교의 은사, 타인 대접의 은사, 선교사의 은사, 중보기도의 은사, 축사의 은사 등.이렇게 여러 가지 영적 은사가 있습니다 마는 때로 우리는 이러한 영적 은사와 혼동되는 은사가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는 대부분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일반은사나 영적 은사가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은사이든지 은사는 일하라고 주신 것이며 특히 그 주신 은사 받은 은사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특별한 재능, 그 은사를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라고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과업 지향적으로 주셨다는 점을 늘 기억하고 그 은사를 바르고 겸손하게 잘 사용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양영자, 그는 한때 한국 탁구계의 간판스타였습니다. 그가 받은 은사는 탁구라는 일반은사였습니다 마는 그 은사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바쳤을 때 그 탁구라는 일반은사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멋있는 은사가  되었고 그 은사를 그렇게 거룩하게 사용함으로 그의 삶도 더욱 거룩하게 되었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찬양을 한 성가대원들이나, 지휘 반주, 관현악단... 이분들이 가진 은사도 다 일반은사, 음악의 은사입니다. 성악의 은사, 피아노의 은사, 오르간의 은사, 바이올린의 은사, 첼로의 은사, 비올라의 은사...이러한 것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은사들은 아니지만 이렇게 주신 은사, 받은 재능을 가지고 양영자 선수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드려질 때 받은 은사도 빛나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은 거룩한 삶이 되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4:12 말씀입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몇 년 전에 맥스웰 말츠라는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가 「사이코 사이버네틱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인즉,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얼굴을 고침을 통해서 새로운 생애의 문이 열렸다는 개개인의 경험담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느냐? 대부?! 隙? 사람들이 얼굴이 달라지니까 마음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니까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니까 인생관이 바꾸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성형수술을 통해 얼굴을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불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얼굴을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은 외모를 아무리 바꾸어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하나는 외적인 얼굴이고, 하나는 내적인 얼굴입니다. 이 내적인 얼굴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자화상(自畵像)이라?! ?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자기 자신의 자화상에 대하여 부여하는 가치'를 우리는 자존감(自尊感)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참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싫어합니다. 가장 좋아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싫어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면 분하고 화를 내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더 무시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자존감이 낮다(low self-esteem)고 말하며, 좀 쉽게 표현하면,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너무 무시하고 낮추는 감정입니다. 흔히 영어로는 "self-sorry-image" 라고 합니다. 스스로 미안하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겐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해야 될 과제가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심리적인 질병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공주병?)도 나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서운 질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탄식하고 울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성공하고 찬란한 영광의 금자탑을 남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자로 끝내버립니다. 부부간에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분내고 가정을 감옥처럼 폐쇄해서 대화를 잃어버리고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자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항상 질투심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낮은 자존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자아상을 갖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낮은 자존감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자, 그러면 낮은 자존감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부터 보겠습니다.


낮은 자존감이 미치는 영향

첫째, 낮은 자존감은 우리 속에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또 내게 있는 무한한 가능성,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잠식시켜 버립니다.

둘째,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희망을 꺾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담력을 상실하게 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게 하여, 자기 자신을 쓸모 없는 나약한 존재, 패배자로 낙인 시켜서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갑니다.

셋째, 낮은 자존감은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꺼려합니다. 누구 앞에 가도 말도 잘 못하고 쭈삣쭈삣 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열등하게  인정하고 가치 없는 자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가치 없는 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엔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넷째, 낮은 자존감은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큰 방해가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각각의 훌륭한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한다" 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교회학교에서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고 포기합니다. "못해요"라는 말이 입에 늘 붙어 다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낮은 자존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그러한 감정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채우려고 한다. 즉, 주위 사람들, 친구, 남편, 아내, 형제, 애인, 선생님, 목사님, 등에게 의지하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요구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결국 그러한 요구는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고 다시 절망에 빠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능력, 꿈, 이상, 대인관계를 파괴시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까지도 망치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고, 하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능을 다 사장시켜서 초라하게 썩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낮은 자존감의 문제인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일종의 병적인 심리현상입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만사에 자신이 없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는 할 수 없다." 는 말입니다. 교인 중에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교회 봉사도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오해하고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원인

그러면 낮은 자존감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 낮은 자존감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받은 가정과 사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로 자라납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의존하고, 기저귀에 의존하면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의 심리 속에는 "나는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거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낮은 자존감을 만듭니다. "네 형은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해" 하면서 형제간에 비교시킵니다. 또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하면서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세상이 온통 한 사람을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어린아이들은 심리적인 여과기능이 없기 때문에 어렸을 때 귀속에 들려오는 그대로 다 수용합니다. 어른들은 그런 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는 대로 잠재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이 열등감을 만들어 주고, 형제들이 만들어 주고, 선생님이 만들어 줍니다. 또 성장해서는 직장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면서 열등감이 옵니다.

둘째, 그릇된 신학적 사고가 원인이 되어 낮은 자존감이 형성됩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더 심하게는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야" "마른 뼈다귀만도 못한 이 죄인…" 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없이 정죄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죄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세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1.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시139:13-16)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그 분께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받는 인생들입니다.

2. 그러나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롬3:9-20) 나의 모든 부분, 목, 혀, 입술, 입, 발, 눈, 모든 부분이 죄로 가득 찬 죄인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영원히 거룩함을 입은 존재들입니다.(히10:5-18) 하나님이 십자가에 대가를 지불하시고 산 값진 인생들입니다.

4.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롬8:28-39)

5. 결국 하나님의 영적 복을 받은 복 덩어리들이란 말씀입니다.(엡1:3-14) 하나님께 택함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깨달아서 결국 하나님의 기업이 된 자들이란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게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형상을 상실해버린 상태만 강조한 나머지 완전히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로 간주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낮은 자존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하다고 말할 때 자신을 무시하고 격하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는 못났다고 학대하면서 남에게 굽실거리는 것은 겸손이 아니고 비굴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값 주고 사신 위대한 존재다" 이렇게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자기를 너무 격하시키고 자학하고 학대하는 비극, 이것이 바로 낮은 자존감입니다. 우리는 이 낮은 자존감이 우리 속에 어떻게 잠재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서 낮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회복

1. 나의 현재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며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자신의 창조가치를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나의 현실, 나의 한계, 신체적인 조건, 나의 기질, 나의 성장 배경까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주관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바탕으로 한 계획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 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우월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약점이 있고 장애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열등감으로 비하시키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열등감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물론 비교의식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비교라는 감(感)나무에 감이 열리는데, 그건 열등감과 우월감이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땡감이라는 것이다" 언! 뜻 우월감은 좋을 것 같지만 이것은 나중에 십중팔구 교만으로 발전합니다. 비교에서 생기는 기분은 세속적 느낌이기에 결국에는 씁씁한 느낌으로 남습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열등감, 혹은 우월감을 갖지 마시길 바랍니다. 괜히 비교하면서 우쭐하거나 우울해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그 심령에 골병드는 것입니다. 외모나, 재능, 환경, 학벌 등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부여하신 은사요, 천부적인 특성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을 바로 세워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평적인 시선을 위로 올려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로 태어났는가?"라고 물지 말고 "나를 이 땅에 이 시기에 이렇게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라고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들어 나를 이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나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적인 자화상을 세워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극복해야 됩니다. 내가 나약해서 무엇을 못한다고 할 때 주의 음성을 들읍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 사명감을 회복해야 합니다.(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섬기는 일이건, 가르치는 일이건, 권면하는 일이건, 구제하는 일이건, 다스리는 일이건, 긍휼을 베푸는 일이건, 다 가진 바 은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자기가 받은 은사는 제쳐두고 다른 데 가서 기웃거린다는 것입니다. 주로 인기 있는 곳, 높이 올라가는 곳, 대접받는 곳에 자기 몫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곳으로만 몰립니다. 마치 불을 찾아 몰려드는 불나비처럼 말입니다.

아닙니다. 다 은사가 다릅니다. 다 인기 얻으려고 하면 시시한, 아니 시시한 것은 사실 없지요. 눈에 안 보이는 일은 누가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열악할지라도 다 사명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운명의 패배자가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여 시대의 사명자로 살아가느냐 입니다.

뉴욕의 한 알콜 중독 전문 병원에 환자가 입원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말합니다. "영감님, 벌써 50번째 입원입니다." "그래, 축하할만한 일이군. 축하주나 한 잔 주게" 이쯤 되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 때 의사가 이렇게 제안합니다. "이렇게 하시죠. 영감님, 지금 옆방엔 처음 알콜 중독으로 입원한 젊은 청년이 있습니다. 영감님은 경험(?)이 많으시니까 그 청년의 말벗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술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노인은 청년의 말벗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로지 술을 얻기 위한 일념으로.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의 마음엔 한가지 안타까움이 흐릅니다. 자신도 젊었을 적에 알콜에 중독이 되어서 인생을 탕진한 것을 되돌려보며 그 청년만큼은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청년에게 제안합니다. "언제?! 瑩? 술이 먹고 싶을 땐 나를 찾게. 내게 말벗이 되어 주지. 그때 그때마다 술 먹고 넘어가는 방법이 있고, 술 안 먹고 넘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내가 자네를 돕겠네." 청년에게 술 안 먹고 이기는 길을 가르치려니 자신도 술 먹기가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술에 대한 충동이 일어날 적마다 함께 만나 이야기를 하며 어떻게 이 고비를 넘길까 궁리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술을 이기는 힘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젊은 청년뿐만이 아니라, 50번씩이나 입원했던, 그래서 도저히 가망이 없다던 그 노인에게도 술을 이기게 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결국 이 둘은 나란히 병원 문을 걸어 나갔습니다. 퇴원한 후에도 둘은 계속 만나 어떻게 병원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도 단주하며 살 수 있을까를 의논합니다. 이 만남은 결국 알콜 중독자들끼리 모여 스스로를 돕는 A.A(Alcoholic Anonymous)모임, 국제단주동맹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여기던 알콜 중독에서 벗어난 비결, 그것은 이대로 죽음만을 기다리던 노인에게도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고부터 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원망하면 운명의 패배자가 되지만, 그 운명을 사랑하면 운명이 결국 사명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아무리 부족하게 보여도 다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는 소질과 재능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고 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을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있는 재능보다는 없는 재능 쪽에 눈을 돌리는 잘못된 삶,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 ?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못합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괜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괜히 이 모양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괜히 이런 재능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각 사람을 향한 구원의 경륜과 이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계획이 오늘 나에게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명으로 알고 그 속에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되는 것을 하시길 바랍니다.


3. 서로 지체가 되어 섬겨야 합니다.(5, 9-13절) "(5절)이와 같이 우리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9절)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원수 맺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돕고 서로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해 주라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서로에게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먼저 존경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내 이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서로에게 쓸 것을 공급하는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요즘 기가 죽어 계십니까? 나는 왜 이 모양으로 태어났나? 한탄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오늘 이 시간부터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십시다. 그리고 나를 지으시고 기뻐하시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이기에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오늘도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나타나게 될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십시다. 낮은 자존감은 갑자기 하루 아침에 높아질 수 없습니다.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나의 자존감 선언'이라는 글을  날마다 거울 앞에 붙여 놓고 소리내어 읽어보시면 점점 낮은 자존감이 극복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나/의/자/존/감/선/언  

나는 나다.

온 세상 천지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부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겠으나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나 혼자서 하기로 선택한 것이므로 진정 나의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소유한다 - 내 몸과 몸이 하는 모든 것; 내 정신과 그 속에 담겨진 모든 생각과 사상들; 내 눈과 그 눈들이 보는 모든 형상들; 노여움이나 기쁨, 좌절, 사랑, 실망, 흥분 그 어떤 것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들; 내 입과 거기서 나오는 공손하거나, 달콤하거나, 거칠거나, 옳거나, 그른 모든 말들; 그리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모든 행위들.

나는 나의 환상과 꿈과 희망과 공포심을 소유한다.

나는 나의 모든 업적과 성공, 실패와 잘못을 소유한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나 자신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나의 모든 면과 친해질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다음으로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현할 수 있다.

나 자신에게는 나를 궁금하게 하는 면이 있고 또 있는 지도 몰랐던 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한 나는 용감스럽고 희망차게 나를 궁금하게 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이고 들리든,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 또 주어진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그 모든 것은 나다. 이것은 확실하며 내가 그 순간 어디 있느냐를 상징한다.

나중에 나의 모습과 목소리와 말과 행동과 생각과 감정을 살펴보면 어떤 부분들은 알맞지 않다. 나는 그 알맞지 않은 부분을 버리고 알맞은 것만 간직하며, 버린 부분 대신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생존하고 남과 가깝게 지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내 둘레의 세상 사람들과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며 나는 나를 조절할 수 있다.

나는 나이며 나는 괜찮은 존재이다.


날마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그분이 나에게 바라시는 삶을 나의 일상에서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일어나, 오늘 나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환한 원리)


대체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될 때는 몰두가 쉽습니다. 이를테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월드컵 축구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될 때 쉽게 몰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통해서만 몰두를 경험한다면, 삶에서 몰두의 폭이 좁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일에 몰두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차츰 몰두하는 일의 폭을 넓혀 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몰두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원망과 자책이고, 미래의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늘을 신뢰하고,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입니다.


예컨대 바닷가에서 고운 노을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탄성을 울리며 노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곧 어떤 생각들이 올라오는 겁니다. 곧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을지, 혹은 돌아가는 고속도로가 많이 막히면 어떡하지, 뭐 그런 생각들이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노을을 보는 일에 몰두할 수 없게 됩니다.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나, 돌아가는 고속도로의 사정 등을 모두 하늘에 내맡기는 겁니다. 하늘에 내맡김에서 순간에 몰두가 가능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소 직장이나 집에서 일을 하며 늘 답답함을 느끼는 겁니다. 그래 늘 바닷가 여행을 꿈꿉니다. 몸은 직장이나 집에 있으면서, 마음은 늘 바닷가에 가 있는 겁니다. 그러다 정작 바닷가에 가서 고운 노을을 보게 되면, 생각이 직장이나 집으로 갑니다. 몸은 바닷가에 있으면서, 마음은 집에 가 있는 겁니다. 언제나 이렇게 뒤집혀진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늘에 내맡김이 없는 것이고, 그래 행복감을 느낄 틈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하늘에 내맡김, 이는 몰두를 통한 행복감의 중요한 ! 비결인 것입니다.


현재를 사는 삶, 곧 순간에 몰두가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그건 대단한 실력이 필요한 일인데, 우리에게 그만큼의 실력이 없는 겁니다. 그래 더 많은 시간을 과거나 미래에 살게 됩니다. 현재를 한 순간도 살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과거나 미래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많다가, 차츰 현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 가야 합니다. 현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 갈수록, 곧 순간에 몰두하는 시간이 늘어 가는 만큼, 우리의 행복감도 늘어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