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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은 자의 생활 (신명기 28:1-6)
적극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책을 저술한 노만 빈센트 필 박사님께서 어떤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할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시장기를 느껴서 그는 열차식당을 들어갔는데 여러분 아시는 데로 열차식당은 아주 좌석이 좁습니다. 그 좁은 자리에서들 이제 식사를 하게 되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부부가 있는데 그들도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하도 큰 소리로 이야기 하니까 옆좌석에서 부부가 주고받는 말을 그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 부인의 말입니다. 부인이 계속적으로 불평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야채가 신선하지 않은 것 같다고, 좀 있다가는 이 고기가 너무 오래된 거 같다고, 조금 있다가는 날씨가 왜 이렇게 변덕스럽고 좋지 않은가, 아무래도 오늘 이 여행은 잘못 떠난 거 같다고 계속 불평을 합니다. 남편이 이 빌 박사님 보기에 민망해서 그만 안절부절 하다가 빌 박사님에게 기어이 양해를 구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 아내의 직업이 그래서요" 이렇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빌 박사님은 더 궁금해 못 견디겠어요. 도대체 직업이 뭔데 이렇게 불평을 할까 생각을 해서 "무슨 직업인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대답하기를 "제조업입니다." 더 궁금해졌어요.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직업인데 이렇게 불평을 할까 생각해서 또 물었습니다. "무엇을 만드는데요?"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아주 미안하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은 불행제조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꼭 불행 제조 공장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말 그런 행동 그런 사고 이거는 자기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결국은 불행제조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 좌충우돌입니다. 뭐 구제불능입니다. 그건 어디 갖다 놓아도 불평이요, 또 그렇게 살다보면 어찌 복이 들어오겠습니까? 들어왔던 복도 다 나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됩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라고 하는 아주 베스트셀러를 쓴 리차드 칼슨이라고 아마 여러분이 많이 익히 아시는 분입니다. 그는 십년 동안을 무려 십년 동안을 스트레스 치유 상담가로 활약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의 스트레스라고 하는 고민을 위해서 상담역을 한 그런 분인데 그가 십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동일한 증상이 있어요. 동일 증후가 있다는 것이에요. 꼭 같은 증상이 있어요. 이제 본인들은 자기만 그런 줄 아는데 이 전문가의 시각으로 볼 때는 어쩌면 그렇게 한편같이 꼭 같아요. 그런 문제가 있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든가 자기가 처한 처지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해요. 그리고는 원하는 것, 가지지 못한 것, 가지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거기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욕망 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현실의 의미, 가진 것의 소중함은 아랑곳없고 가지지 못한 것, 저 앞에 있는 욕망, 그것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살더라. 어쩌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병이에요. 이것이 병의 원인이요,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요. 그리고 어쩌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도 한 번 들어보세요. 나는 어느 쪽에 속했나, "이것만 바라는 데로 되면 나는 행복해 질 것입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해 질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것만' 이라고 하는 것 그게 이루어졌어요. 그러면 또 방향을 옮깁니다. 또 "저것만 이루어지면." 또 그 다음 "또 이루어지면" 이렇게 한평생 원망과 불평 속에 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만 이루어지면', '이 하나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아무 소원도 없겠습니다' 그 사고방식이 그게 바로 불행의 씨예요. 그것이 바로 망조라는 걸 알아야 되요. 우리는 언제나 지금도 뭐 하나 '요것만되면, 요것만되면……' 그 사고의 구도가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버틀란트 러셀,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의 행복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고 자기 자신의 힘과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근본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평가하고 사는 사람은 항상 자기 성공에 놀란답니다. '아, 나는 이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어떻게 내게 이런 복이 왔나?' 자기 앞에 이루어지는 그 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놀라면서 삽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사는 사람은 실패에 대해서 놀라며 산다는 겁니다. '어떻게 내 앞에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내게 이런 불행이 있단 말인가?' 그러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 이 부부간에도 오늘 한 번 생각을 확 돌려보세요. 남편을 생각할 때 자기를 낮추어요. 자기를 아주 낮추고 생각하면 남편 지금 이대로도 '하나님이 어쩌면 이런 분을 내게 주셨나' 감지덕지요. 이거 깜짝 놀랄 일이지요. 또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어쩌다 저런 거하고 걸렸나. 내가 저런 사람하고 살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이게 하나님이 실수했나 내가 실수했나' 이러고 산다니까요. 이게 얼마나 깜짝 놀라지,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병신이거든요. 이 정신적으로 지금 그게 병신이에요, 그게. 이게 불행의 원인입니다. 자, 여러분 선택은 내게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것이올시다.
복은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그건 존재의 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과 저주를 함께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1장 26절에 보면 "복과 저주를 두노니 너희가 선택하라." 그렇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선택 뒤에 오는 후속 결과는 그것은 부득이 내가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봄이 될 때 내가 씨를 뿌리는 것은 내 마음대로입니다. 내 자유입니다만은 뿌린 다음에 가을에 거둘 때는 그건 심판입니다. 선택에 대한 결과, 그것은 내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선택한 데 대한 결과로 따라오고 때로는 심판으로 내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늘 말씀합니다. 복된 환경이 있는 게 아니라고. 복된 자가 있습니다. 복된 사람이 있고 복된 존재가 있고 복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 길이 있습니다. 복된 자가 되면 그는 복된 길로 가고, 복된 길로 가는 자에게 복이 따릅니다. 복은 뒤따르는 겁니다. 복을 따라간다고 복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세워놓은 복, 내가 생각하는 복을 쟁취하겠다고 하는데 복은 쟁취하는 게 아니에요. 주어지는 것이지요.
나는 쟁취라는 말을 아주 몸서리치게 무섭게 생각합니다. 쟁취에서 얻은 권리, 쟁취해서 얻은 복, 그것이 복이 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 것이지, 주어야 받는 것이지, 이것을 쟁취하고 갈취하고 탈취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복이 아닙니다. 복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간단합니다.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은 복받는 길은 간단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듣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복되리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여기서도 복을 받고 저기서도 복을 받고 너 뿐만 아니라 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짐승까지도 복을 받으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받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듣고" 그랬어요. 삼가 듣는 것.
저는 여러 해 동안 목회 하면서 많은 교인들과 같이 지내면서 교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두 교회 밖에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저와 만난 분들은 뭐 20년씩 10년씩 이렇게 같이 지내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요 이렇게 설교하면서 설교 듣는 자세를 봅니다. 그 듣는 걸 보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다는 것을 알 것 같아요. 요새 왜 왕건이가 그러죠. 거기 저 왕건이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관심법으로 보았느니라" 뭐 그러대요. 저는 궁예처럼 그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듣는 자세를 보고 그 운명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합니다. 사람은 듣는 자세가 좋아야지요. 제가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을 아는데 그 교회가 좀 분쟁을 하고 좀 시끄러워요. 한마디로 말하면 부흥되지 않는 아주 그런 어려운 일을 만난 교회인데 그 장로님이 이러대요 자기는 설교를 들을 때 50%밖에 안 듣는데요. 그래서 "50%는 어떤 말씀을 듣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듣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안 듣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참 세상 힘들게 사누만요" 그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 참 힘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음식으로 한 번 비교해 볼까요? 음식은 상에 올랐으면 무슨 음식이든지 가리지 말고 맛있게 아주 맛있게 먹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대체로 보세요. 비실비실 하는 사람은 입이 까다로워요. 또 만일에 그런 사람이 의심이 많아서 뭐 이건 어떻고 이건 어떻고 따질 뿐만 아니라 혹 독약을 넣었나 해서 은수저로 쑤시면서 먹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며칠이나 살겠어요. 그래 저희 아버님이 제게 참 간단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어요. 같이 음식을 먹어보고 음식 가리는 사람하고는 놀지 말라 그랬어요. 아 그 사실이 까다로운 사람이요 그거. 아주 힘든 사람이요. 그저 밥상에 올려놓은 거는 무조건 다 맛있게 먹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게 건강 비결이요.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건강도 먹성이 좋아야 돼요.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아야 돼요.
특별히 '삼가듣고' 그 말은 뭡니까? 조심스럽게 들어요, 놓칠세라. 삼가듣고 또 내 생각이 여기에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내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말씀이 왜곡돼도 안돼는 거예요. 그런고로 마음을 비우고, 내 욕심이나 이상이나 비판이나 이런 거 다 비우고 아주 순수한 어린 아이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거예요. 삼가들어라 그랬어요. 삼가 들어라. "커밍 워크" 라고 하는 사회학자는 책 한 권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인으로 성공하는 비결, 지능 지식 기술 태도 네가지를 말해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 지능도 기술도 아니요. 삶의 자세라 그랬어요. Attitude, 자세가 좋아야돼요. 듣는 자세, 예배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 말씀 듣는 자세,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하는 자세, 거기에 운명이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들어요. 신중하게 잘 받아들인다 그 말이에요. 듣는 마음, 듣는 귀, 듣는 자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죠. 인격자가 누구인데요. 인격이 높은 사람은 듣는 자세가 좋아요. 언제나 남이 무슨 말을 하면은 "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이러더라고요. 한경직 목사님, 특유한 제스츄어 "거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만나면 또 만나고 싶고 또 그분과 사귈 때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이게 듣는 자세예요. 근데 시원치 않은 사람들은 꼭 뭐라 그럽디까? 말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택도 없다." "말도 안돼." 이거는 인격모독입니다. 여러분 듣는 자세가 좋아야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삼가들어, 삼가면서, 내 몸과 마음을 삼가면서 집중적으로 듣는다. 그리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요. 말씀의 지혜가 바로 내 지혜가 되요. 그의 권능이 내 자신에게 임합니다. 생명력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여기 보니까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 이요. 명령을 지켜 행한다. 여러분 듣고 나서 그게 다 마음에 들 수는 없어요.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고 이해되는 것도 있고 되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요. 내 이성적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에요. 내 생각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에요. 이것이 복된 길입니다.
여러분 다 납득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우리의 병든 이성이 그렇게 제대로 작용을 못하거든요. 내 경험이 나의 생각을 어지럽히는 거예요. 다 버리세요.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그리할 때 여기서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 예배드리는 회당에 들어가서 같이 예배를 드려본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내용 가운데 보니 하나님께 이래서 감사합니다 저래서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하다는 말이 많이 있어요 기도문에. 그리고 끝에 가서는 이런 말이 있어요.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아니합니다만은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내 이 어리석은 좁은 생각, 내 경험에 집착되는 거 다 버리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된 길이란 말입니다.
F.B. Meyer 박사님의 신앙관은 이렇습니다. 신앙이란 내 모든 생각을 버리고 내 마음의 충동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내 뜻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증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증을 얻고 그 다음에는 이제부터 사는 생활은 모든 환경은 내게 주시는 기회다, 그랬어요. 환경을 바꾸라는 생각 없어요.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아요. 이것은 내게 주신 기회예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라" 할 때 떠났습니다. 도대체 어디 가서 어떻게 머물려고 무얼 하라는 것입니까? "떠나라" 하면 떠났어요.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도저히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모세에게 맡깁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라." "가라" 갔거든요. "홍해를 쳐라" 쳤고, "건너가라" 건너갔어요.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이요, 지혜요, 가능성이었던 것이고 모세의 용기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듣고 순종하는 것이에요.
여기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말입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100m 경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 주일날 아침으로 그 시간이 잡혔어요. 영국에서 대표로 출전하는 에릭 리라고 하는 청년이 아주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 실수만 없으면 그는 100m 경기에 단연 1등 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인데 그것이 주일날 하게 됐다고 해서 안 하겠다고 포기했어요. 아 이거 난리가 났죠. 영국신문 전체가 여기에 대해서 비판을 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것이고 국가의 배신자다. 옹졸한 신앙의 사람이다. 왜 그것을 안 하느냐? 그는 말합니다. "나는 주일날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이 오늘 주일을 거역하고 나가서 금메달 타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고로 안됩니다." 그만 뒀어요. 며칠 후에 400m경기가 열렸어요. 거기에 자원했어요. 100m경기를 뛰는 사람이 400m에 뛴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경기장에 나가서 100m 뛰는 솜씨로 총알 같이 뛰는 거요. 막 뛰는데 모든 사람이 걱정을 했어요. 저렇게 100m식으로 뛰다가 저거 400m 다 못 뛰고 심장이 터져 죽을 거다. 걱정들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100m 뛰는 속도로 그냥 내달려서 400m에서 세계기록을 내면서 일등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영광과 찬사를 받게됩니다.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고. 그는 진실하게 대답했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200m는 내 힘으로 뛰었습니다.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뛰신 겁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뛰었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랬어요. 얼마나 깨끗한 신앙의 청년입니까?
여러분 너무 변론을 벌이지 마시고 너무 꾀를 부리지 마세요. 정직하게 때로는 우직하게 때로는 고집스럽게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복된 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사람이 복되게 될 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복된 자가 되면 보세요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직업이 뭐냐? 내 현주소가 어디냐? 물을 것 없어요. 어디에 있든 그는 복을 받을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환경이 복이 아닙니다. GNP가 올라간다고 복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잘산다고 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복된 자가 되고 복된 길에 설 때 그 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이 복으로 화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복이 무언지도 모르고 복 받기를 바라고, 복된 길을 등지고 복 받기를 바라고, 꼭 저주스러운 일 못된 일만 골라 가면서 하면서 잘살기만 바라는 이런 멍청한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시 자세를 고치고 분명히 복된 길에 서서 복된 자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은 특별히 복 받기를 바라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빼앗으려고 들면서 아무 것도 얻은 것 없고, 복을 쟁취하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옵소서. 이제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겸손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만큼 깨끗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런 주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
적극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책을 저술한 노만 빈센트 필 박사님께서 어떤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할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시장기를 느껴서 그는 열차식당을 들어갔는데 여러분 아시는 데로 열차식당은 아주 좌석이 좁습니다. 그 좁은 자리에서들 이제 식사를 하게 되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은 초로의 부부가 있는데 그들도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하도 큰 소리로 이야기 하니까 옆좌석에서 부부가 주고받는 말을 그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 부인의 말입니다. 부인이 계속적으로 불평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야채가 신선하지 않은 것 같다고, 좀 있다가는 이 고기가 너무 오래된 거 같다고, 조금 있다가는 날씨가 왜 이렇게 변덕스럽고 좋지 않은가, 아무래도 오늘 이 여행은 잘못 떠난 거 같다고 계속 불평을 합니다. 남편이 이 빌 박사님 보기에 민망해서 그만 안절부절 하다가 빌 박사님에게 기어이 양해를 구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 아내의 직업이 그래서요" 이렇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빌 박사님은 더 궁금해 못 견디겠어요. 도대체 직업이 뭔데 이렇게 불평을 할까 생각을 해서 "무슨 직업인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대답하기를 "제조업입니다." 더 궁금해졌어요.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직업인데 이렇게 불평을 할까 생각해서 또 물었습니다. "무엇을 만드는데요?"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아주 미안하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은 불행제조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꼭 불행 제조 공장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말 그런 행동 그런 사고 이거는 자기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결국은 불행제조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 좌충우돌입니다. 뭐 구제불능입니다. 그건 어디 갖다 놓아도 불평이요, 또 그렇게 살다보면 어찌 복이 들어오겠습니까? 들어왔던 복도 다 나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됩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라고 하는 아주 베스트셀러를 쓴 리차드 칼슨이라고 아마 여러분이 많이 익히 아시는 분입니다. 그는 십년 동안을 무려 십년 동안을 스트레스 치유 상담가로 활약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의 스트레스라고 하는 고민을 위해서 상담역을 한 그런 분인데 그가 십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동일한 증상이 있어요. 동일 증후가 있다는 것이에요. 꼭 같은 증상이 있어요. 이제 본인들은 자기만 그런 줄 아는데 이 전문가의 시각으로 볼 때는 어쩌면 그렇게 한편같이 꼭 같아요. 그런 문제가 있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든가 자기가 처한 처지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해요. 그리고는 원하는 것, 가지지 못한 것, 가지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거기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욕망 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현실의 의미, 가진 것의 소중함은 아랑곳없고 가지지 못한 것, 저 앞에 있는 욕망, 그것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살더라. 어쩌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이 병이에요. 이것이 병의 원인이요,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요. 그리고 어쩌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도 한 번 들어보세요. 나는 어느 쪽에 속했나, "이것만 바라는 데로 되면 나는 행복해 질 것입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해 질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것만' 이라고 하는 것 그게 이루어졌어요. 그러면 또 방향을 옮깁니다. 또 "저것만 이루어지면." 또 그 다음 "또 이루어지면" 이렇게 한평생 원망과 불평 속에 살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만 이루어지면', '이 하나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아무 소원도 없겠습니다' 그 사고방식이 그게 바로 불행의 씨예요. 그것이 바로 망조라는 걸 알아야 되요. 우리는 언제나 지금도 뭐 하나 '요것만되면, 요것만되면……' 그 사고의 구도가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버틀란트 러셀,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의 행복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고 자기 자신의 힘과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근본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평가하고 사는 사람은 항상 자기 성공에 놀란답니다. '아, 나는 이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어떻게 내게 이런 복이 왔나?' 자기 앞에 이루어지는 그 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놀라면서 삽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사는 사람은 실패에 대해서 놀라며 산다는 겁니다. '어떻게 내 앞에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내게 이런 불행이 있단 말인가?' 그러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 이 부부간에도 오늘 한 번 생각을 확 돌려보세요. 남편을 생각할 때 자기를 낮추어요. 자기를 아주 낮추고 생각하면 남편 지금 이대로도 '하나님이 어쩌면 이런 분을 내게 주셨나' 감지덕지요. 이거 깜짝 놀랄 일이지요. 또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어쩌다 저런 거하고 걸렸나. 내가 저런 사람하고 살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가……. 이게 하나님이 실수했나 내가 실수했나' 이러고 산다니까요. 이게 얼마나 깜짝 놀라지, 놀랄 것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병신이거든요. 이 정신적으로 지금 그게 병신이에요, 그게. 이게 불행의 원인입니다. 자, 여러분 선택은 내게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것이올시다.
복은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그건 존재의 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과 저주를 함께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1장 26절에 보면 "복과 저주를 두노니 너희가 선택하라." 그렇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선택 뒤에 오는 후속 결과는 그것은 부득이 내가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봄이 될 때 내가 씨를 뿌리는 것은 내 마음대로입니다. 내 자유입니다만은 뿌린 다음에 가을에 거둘 때는 그건 심판입니다. 선택에 대한 결과, 그것은 내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선택한 데 대한 결과로 따라오고 때로는 심판으로 내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늘 말씀합니다. 복된 환경이 있는 게 아니라고. 복된 자가 있습니다. 복된 사람이 있고 복된 존재가 있고 복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 길이 있습니다. 복된 자가 되면 그는 복된 길로 가고, 복된 길로 가는 자에게 복이 따릅니다. 복은 뒤따르는 겁니다. 복을 따라간다고 복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세워놓은 복, 내가 생각하는 복을 쟁취하겠다고 하는데 복은 쟁취하는 게 아니에요. 주어지는 것이지요.
나는 쟁취라는 말을 아주 몸서리치게 무섭게 생각합니다. 쟁취에서 얻은 권리, 쟁취해서 얻은 복, 그것이 복이 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 것이지, 주어야 받는 것이지, 이것을 쟁취하고 갈취하고 탈취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복이 아닙니다. 복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간단합니다.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은 복받는 길은 간단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듣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복되리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여기서도 복을 받고 저기서도 복을 받고 너 뿐만 아니라 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짐승까지도 복을 받으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받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듣고" 그랬어요. 삼가 듣는 것.
저는 여러 해 동안 목회 하면서 많은 교인들과 같이 지내면서 교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두 교회 밖에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저와 만난 분들은 뭐 20년씩 10년씩 이렇게 같이 지내면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요 이렇게 설교하면서 설교 듣는 자세를 봅니다. 그 듣는 걸 보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다는 것을 알 것 같아요. 요새 왜 왕건이가 그러죠. 거기 저 왕건이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관심법으로 보았느니라" 뭐 그러대요. 저는 궁예처럼 그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듣는 자세를 보고 그 운명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합니다. 사람은 듣는 자세가 좋아야지요. 제가 어느 교회 장로님 한 분을 아는데 그 교회가 좀 분쟁을 하고 좀 시끄러워요. 한마디로 말하면 부흥되지 않는 아주 그런 어려운 일을 만난 교회인데 그 장로님이 이러대요 자기는 설교를 들을 때 50%밖에 안 듣는데요. 그래서 "50%는 어떤 말씀을 듣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듣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안 듣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참 세상 힘들게 사누만요" 그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 참 힘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음식으로 한 번 비교해 볼까요? 음식은 상에 올랐으면 무슨 음식이든지 가리지 말고 맛있게 아주 맛있게 먹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대체로 보세요. 비실비실 하는 사람은 입이 까다로워요. 또 만일에 그런 사람이 의심이 많아서 뭐 이건 어떻고 이건 어떻고 따질 뿐만 아니라 혹 독약을 넣었나 해서 은수저로 쑤시면서 먹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며칠이나 살겠어요. 그래 저희 아버님이 제게 참 간단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어요. 같이 음식을 먹어보고 음식 가리는 사람하고는 놀지 말라 그랬어요. 아 그 사실이 까다로운 사람이요 그거. 아주 힘든 사람이요. 그저 밥상에 올려놓은 거는 무조건 다 맛있게 먹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게 건강 비결이요.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건강도 먹성이 좋아야 돼요.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아야 돼요.
특별히 '삼가듣고' 그 말은 뭡니까? 조심스럽게 들어요, 놓칠세라. 삼가듣고 또 내 생각이 여기에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내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말씀이 왜곡돼도 안돼는 거예요. 그런고로 마음을 비우고, 내 욕심이나 이상이나 비판이나 이런 거 다 비우고 아주 순수한 어린 아이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거예요. 삼가들어라 그랬어요. 삼가 들어라. "커밍 워크" 라고 하는 사회학자는 책 한 권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인으로 성공하는 비결, 지능 지식 기술 태도 네가지를 말해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 지능도 기술도 아니요. 삶의 자세라 그랬어요. Attitude, 자세가 좋아야돼요. 듣는 자세, 예배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 말씀 듣는 자세,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하는 자세, 거기에 운명이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들어요. 신중하게 잘 받아들인다 그 말이에요. 듣는 마음, 듣는 귀, 듣는 자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죠. 인격자가 누구인데요. 인격이 높은 사람은 듣는 자세가 좋아요. 언제나 남이 무슨 말을 하면은 "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이러더라고요. 한경직 목사님, 특유한 제스츄어 "거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만나면 또 만나고 싶고 또 그분과 사귈 때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이게 듣는 자세예요. 근데 시원치 않은 사람들은 꼭 뭐라 그럽디까? 말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택도 없다." "말도 안돼." 이거는 인격모독입니다. 여러분 듣는 자세가 좋아야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삼가들어, 삼가면서, 내 몸과 마음을 삼가면서 집중적으로 듣는다. 그리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요. 말씀의 지혜가 바로 내 지혜가 되요. 그의 권능이 내 자신에게 임합니다. 생명력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합니다. 여기 보니까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 이요. 명령을 지켜 행한다. 여러분 듣고 나서 그게 다 마음에 들 수는 없어요.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고 이해되는 것도 있고 되지 않는 것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요. 내 이성적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에요. 내 생각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에요. 이것이 복된 길입니다.
여러분 다 납득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우리의 병든 이성이 그렇게 제대로 작용을 못하거든요. 내 경험이 나의 생각을 어지럽히는 거예요. 다 버리세요.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세요. 그리할 때 여기서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 예배드리는 회당에 들어가서 같이 예배를 드려본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내용 가운데 보니 하나님께 이래서 감사합니다 저래서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하다는 말이 많이 있어요 기도문에. 그리고 끝에 가서는 이런 말이 있어요.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아니합니다만은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내 이 어리석은 좁은 생각, 내 경험에 집착되는 거 다 버리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된 길이란 말입니다.
F.B. Meyer 박사님의 신앙관은 이렇습니다. 신앙이란 내 모든 생각을 버리고 내 마음의 충동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내 뜻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증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증을 얻고 그 다음에는 이제부터 사는 생활은 모든 환경은 내게 주시는 기회다, 그랬어요. 환경을 바꾸라는 생각 없어요.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아요. 이것은 내게 주신 기회예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라고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라" 할 때 떠났습니다. 도대체 어디 가서 어떻게 머물려고 무얼 하라는 것입니까? "떠나라" 하면 떠났어요.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도저히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모세에게 맡깁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라." "가라" 갔거든요. "홍해를 쳐라" 쳤고, "건너가라" 건너갔어요.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이요, 지혜요, 가능성이었던 것이고 모세의 용기였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듣고 순종하는 것이에요.
여기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말입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100m 경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 주일날 아침으로 그 시간이 잡혔어요. 영국에서 대표로 출전하는 에릭 리라고 하는 청년이 아주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어요. 이제 실수만 없으면 그는 100m 경기에 단연 1등 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인데 그것이 주일날 하게 됐다고 해서 안 하겠다고 포기했어요. 아 이거 난리가 났죠. 영국신문 전체가 여기에 대해서 비판을 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것이고 국가의 배신자다. 옹졸한 신앙의 사람이다. 왜 그것을 안 하느냐? 그는 말합니다. "나는 주일날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이 오늘 주일을 거역하고 나가서 금메달 타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고로 안됩니다." 그만 뒀어요. 며칠 후에 400m경기가 열렸어요. 거기에 자원했어요. 100m경기를 뛰는 사람이 400m에 뛴다는 건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경기장에 나가서 100m 뛰는 솜씨로 총알 같이 뛰는 거요. 막 뛰는데 모든 사람이 걱정을 했어요. 저렇게 100m식으로 뛰다가 저거 400m 다 못 뛰고 심장이 터져 죽을 거다. 걱정들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100m 뛰는 속도로 그냥 내달려서 400m에서 세계기록을 내면서 일등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영광과 찬사를 받게됩니다.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고. 그는 진실하게 대답했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200m는 내 힘으로 뛰었습니다.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이 뛰신 겁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뛰었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랬어요. 얼마나 깨끗한 신앙의 청년입니까?
여러분 너무 변론을 벌이지 마시고 너무 꾀를 부리지 마세요. 정직하게 때로는 우직하게 때로는 고집스럽게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복된 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사람이 복되게 될 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복된 자가 되면 보세요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직업이 뭐냐? 내 현주소가 어디냐? 물을 것 없어요. 어디에 있든 그는 복을 받을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환경이 복이 아닙니다. GNP가 올라간다고 복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잘산다고 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복된 자가 되고 복된 길에 설 때 그 앞에 전개되는 모든 것이 복으로 화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복이 무언지도 모르고 복 받기를 바라고, 복된 길을 등지고 복 받기를 바라고, 꼭 저주스러운 일 못된 일만 골라 가면서 하면서 잘살기만 바라는 이런 멍청한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시 자세를 고치고 분명히 복된 길에 서서 복된 자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은 특별히 복 받기를 바라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빼앗으려고 들면서 아무 것도 얻은 것 없고, 복을 쟁취하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옵소서. 이제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겸손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만큼 깨끗하고 정직하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런 주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