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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하지 않는 믿음 (막4:35-41)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한 사건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게 되었습니다. 본문 35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호수 반대편 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것으로 보아 물길이 낮고 안전한 호숫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 물속이 깊은 호수 가운데로 배를 띄우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작은 호수가 아니었습니다. 종종 바다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아주 넓은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참으로 아름답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호수입니다. 그러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 갈릴리 호수에서는 종종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곤 합니다. 겨울에 큰 빌딩 주위에는 유난히 찬바람이 거센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아침이나 저녁보다는 오후에 부는 바람이 더 강해서 대개 고기잡이를 밤에 하지만, 어쩌다 저녁 때 바람이 불 때는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도 저녁바람이 불며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첫머리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날은 저물어가는데 큰 광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눅8:24에는 "광풍이 호수로 내리쳤다"고 했습니다.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니까 자연 "바다에 큰 놀(즉 사나운 큰 물결)이 일어났습니다"(눅8:24). 그러니 물결 따라 배가 몹시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어"(37) 사람과 배가 다 위태롭게 되었습니다(눅8:24). 제자들은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무서워했습니다(38).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광풍노도와 그로 인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잠들어 계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우리 좀 살려주세요." 그러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말씀하시고는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진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심히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로 말하기를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바다도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해줍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신 데 대해 제자들이 보인 반응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주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다 그에게 순종하는가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모순된 사고와 언행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며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에는 뭔가 초자연적인 이적의 능력을 행하셔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깨우며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다와 배를 부리는 일에 관해서라면 목수였던 예수님보다야 그들이 전문가이고 노련한 뱃군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명하시며 잔잔케 하시자 제자들은 "저 이가 뭔데 바람과 바다도 다 순종하는가?"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아직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그저 믿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신기한 어떤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질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일차적으로는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믿음입니다. 주님께 모든 근심걱정을 다 맡기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태평하실 때 같이 태평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가만 계신데 자기가 나서서 야단법석 떨며 온갖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에게는 이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 등 자연에 대해서 주권자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고 잔잔케 하신 것은 만유에 대한 그의 주권과 위엄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광풍노도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잠들고 계셨다는 사실 또한 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 자연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할 수 없으며, 그의 구원사역을 방해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런 분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저 추상적인 우주의 주권자로서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속에 개입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도 아주 귀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면서도 아직 "주님을 따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그를 따르게 하신 제자들은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타지 않았더라면 광풍노도에 생명을 잃을 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에게는 재난과 위험이 뒤따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을 좇는 것이 제자도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란 뭍에서나 물에서나 어디서든지 주님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평온한 들길이나 성난 바닷길이나 가리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하는 길 가운데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광풍노도 속에서도 태연히 잠들고 계셨던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까지도 주장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그 자신의 신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신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아무데서나 제 집처럼 머리 두고 잘 주무시는 보여주셨습니다.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좇기 위하여 모든 소유욕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도 자유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또한 주님을 따르는 길과 삶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고난의 극복과 평화와 영광이 또한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속한 평화와 안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은 우리에게 생명의 보증이 되며, 죽음의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를 따르라 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항상 지키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의 삶을 위한 많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갈릴리 호수지만 느닷없이 광풍노도가 일듯이 평온하던 우리의 인생도 갑작스러운 광풍노도에 시달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 만날 수도 있는 그 인생의 광풍노도를 주님과 한 배를 탐으로써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어떤 인생의 시련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가 처한 위험과 우리의 고통과 우리가 죽어가는 사실을 외면하고 계신 듯이 여겨질 때가 있으나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우리에 대해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잠들어 계시다고 불평했지만 사실 잠들어 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지만 사실은 그들의 신앙을 흔들어 깨웠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과 진정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허구 헌 날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 잠꼬대하듯 "주여 주여" 하며 주님만 흔들어 깨우려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의 믿음을 깨우는 우리들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들 자신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 주님과 함께한다 하면서도 온갖 근심걱정에 찌들어 있는 나는 아닌지? 뭐 조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그 동안의 믿음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죽게 된 듯이 울고불고 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신 이 말씀이 어쩌면 오늘 나를 향하신 질책이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잠재우신 것은 광풍과 파도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공포와 근심을 또한 가라앉히셨습니다. 옛날, 특히 교회가 박해받을 때에는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을 교회를 위협하고 말살시키려는 박해 속에서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임재와 역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옛 교회의 미술 속에서는 교회를 위험한 바다에 떠다니지만 그 가운데 주님이 계셔서 무서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배로 묘사함으로써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여러분 각자의 모습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우리의 삶을 뒤집어놓고 우리의 생명을 삼킬 것 같은 그 광풍노도 가운데서도 아무 두려움 없이 주님과 함께 태연하게 누워 잠을 자기도 하고, 주님과 함께 벌떡 일어나 세상을 향해 큰 소리 외치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함께 세상을 이기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설교 / 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한 사건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게 되었습니다. 본문 35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호수 반대편 쪽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것으로 보아 물길이 낮고 안전한 호숫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 물속이 깊은 호수 가운데로 배를 띄우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작은 호수가 아니었습니다. 종종 바다라고도 불리울 정도로 아주 넓은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참으로 아름답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호수입니다. 그러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이 갈릴리 호수에서는 종종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치곤 합니다. 겨울에 큰 빌딩 주위에는 유난히 찬바람이 거센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아침이나 저녁보다는 오후에 부는 바람이 더 강해서 대개 고기잡이를 밤에 하지만, 어쩌다 저녁 때 바람이 불 때는 훨씬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도 저녁바람이 불며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첫머리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날은 저물어가는데 큰 광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눅8:24에는 "광풍이 호수로 내리쳤다"고 했습니다.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니까 자연 "바다에 큰 놀(즉 사나운 큰 물결)이 일어났습니다"(눅8:24). 그러니 물결 따라 배가 몹시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어"(37) 사람과 배가 다 위태롭게 되었습니다(눅8:24). 제자들은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무서워했습니다(38).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광풍노도와 그로 인한 죽음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잠들어 계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우리 좀 살려주세요." 그러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말씀하시고는 곧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진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심히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로 말하기를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바다도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해줍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신 데 대해 제자들이 보인 반응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아직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주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다 그에게 순종하는가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모순된 사고와 언행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며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에는 뭔가 초자연적인 이적의 능력을 행하셔서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깨우며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다와 배를 부리는 일에 관해서라면 목수였던 예수님보다야 그들이 전문가이고 노련한 뱃군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명하시며 잔잔케 하시자 제자들은 "저 이가 뭔데 바람과 바다도 다 순종하는가?"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아직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그저 믿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신기한 어떤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질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일차적으로는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믿음입니다. 주님께 모든 근심걱정을 다 맡기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태평하실 때 같이 태평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가만 계신데 자기가 나서서 야단법석 떨며 온갖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에게는 이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 등 자연에 대해서 주권자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고 잔잔케 하신 것은 만유에 대한 그의 주권과 위엄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광풍노도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잠들고 계셨다는 사실 또한 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 자연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할 수 없으며, 그의 구원사역을 방해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런 분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저 추상적인 우주의 주권자로서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속에 개입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도 아주 귀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면서도 아직 "주님을 따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그를 따르게 하신 제자들은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타지 않았더라면 광풍노도에 생명을 잃을 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에게는 재난과 위험이 뒤따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을 좇는 것이 제자도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란 뭍에서나 물에서나 어디서든지 주님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평온한 들길이나 성난 바닷길이나 가리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하는 길 가운데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광풍노도 속에서도 태연히 잠들고 계셨던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까지도 주장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그 자신의 신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신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아무데서나 제 집처럼 머리 두고 잘 주무시는 보여주셨습니다.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좇기 위하여 모든 소유욕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도 자유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또한 주님을 따르는 길과 삶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고난의 극복과 평화와 영광이 또한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속한 평화와 안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심은 우리에게 생명의 보증이 되며, 죽음의 패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를 따르라 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항상 지키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의 삶을 위한 많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갈릴리 호수지만 느닷없이 광풍노도가 일듯이 평온하던 우리의 인생도 갑작스러운 광풍노도에 시달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 만날 수도 있는 그 인생의 광풍노도를 주님과 한 배를 탐으로써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어떤 인생의 시련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가 처한 위험과 우리의 고통과 우리가 죽어가는 사실을 외면하고 계신 듯이 여겨질 때가 있으나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우리에 대해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잠들어 계시다고 불평했지만 사실 잠들어 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지만 사실은 그들의 신앙을 흔들어 깨웠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과 진정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허구 헌 날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 잠꼬대하듯 "주여 주여" 하며 주님만 흔들어 깨우려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의 믿음을 깨우는 우리들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본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들 자신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 주님과 함께한다 하면서도 온갖 근심걱정에 찌들어 있는 나는 아닌지? 뭐 조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그 동안의 믿음은 어디 갔는지 모르게 다 죽게 된 듯이 울고불고 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신 이 말씀이 어쩌면 오늘 나를 향하신 질책이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잠재우신 것은 광풍과 파도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공포와 근심을 또한 가라앉히셨습니다. 옛날, 특히 교회가 박해받을 때에는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을 교회를 위협하고 말살시키려는 박해 속에서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임재와 역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옛 교회의 미술 속에서는 교회를 위험한 바다에 떠다니지만 그 가운데 주님이 계셔서 무서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배로 묘사함으로써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여러분 각자의 모습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우리의 삶을 뒤집어놓고 우리의 생명을 삼킬 것 같은 그 광풍노도 가운데서도 아무 두려움 없이 주님과 함께 태연하게 누워 잠을 자기도 하고, 주님과 함께 벌떡 일어나 세상을 향해 큰 소리 외치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함께 세상을 이기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설교 / 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