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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10)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79년 11월 3일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마이크 앞에 홀로 선 제 선친은 성경 구절 몇 군데를 찾아서 읽고 남겨진 자녀들을 위해서 간단히 기도했습니다. 그 때 읽었던 성경 구절 가운데 한 구절이 바로 오늘 봉독한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입니다. 그 때 읽었던 그대로 공동번역 성서로 읽겠습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그 때보다 더 강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 원칙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율법이라는 원칙이요 또 다른 하나는 은혜라는 원칙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공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은 행위에 대한 원칙으로 그 누구도 이 원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율법의 원칙대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율법이라는 원칙만 갖고서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원칙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거저 주신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범한 인간을 그냥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원칙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잣대로 잴 것 같으면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죄를 그냥 용서받는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강조한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개혁자들의 구호처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뒤늦게 뭔가 좀 부족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반절) 그가 또 다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심는 대로 거두는 이치는 지극히 보편적인 원리인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 아닙니까? 우리 조상들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열리고 대추나무에는 대추가 열립니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는 개를 낳고 소는 소를 낳습니다. 개가 고양이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자연계는 이 법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이 원리를 잘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새삼스럽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심는 대로 거둘 것이라는 이치를 강조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행위는 어떻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속이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각종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요즈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랜드 사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애당초 직원을 뽑을 때부터 믿는 사람을 뽑기 때문에 이랜드 가족의 절반 이상이 신자들이라고 자랑합니다. 직장마다 사목이라는 것을 두고 예배도 드리고 신앙 상담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과정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믿는 자는 성령을 당연히 받게 되며 성령을 받은 자는 또한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믿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는 그 자체가 믿지 않는 자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렇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성령으로 행할지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농부들이 무엇을 믿고 씨를 뿌립니까?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이치를 믿고 씨를 뿌리지 않습니까? 보리를 뿌리면 보리가 날 것이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이 씨를 뿌리면 얼마 후 반드시 여러 배의 결실과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씨를 뿌립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이치는 한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한 인간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틀 속에서 보내게 마련입니다. 과거의 어떤 행위가 현재와 관련이 되어 있고, 또 현재의 행위가 미래와 관련이 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제의 행실이 씨앗이 되어 오늘의 열매가 되고 또 오늘의 행실은 또 다른 씨앗이 되어 내일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년 전에 어떤 행위를 했지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즉 심는 대로 거두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귀한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귀한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6장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육적인 존재로 전락함으로 말미암아 영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무지 그 길을 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그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 아니면 육체의 사람 두 가지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육체의 사람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행위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위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는 성령을 통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 그 이상의 것을 행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핑계나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날마다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심는 대로 거둘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늘 성령을 위하여 심어 마침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79년 11월 3일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마이크 앞에 홀로 선 제 선친은 성경 구절 몇 군데를 찾아서 읽고 남겨진 자녀들을 위해서 간단히 기도했습니다. 그 때 읽었던 성경 구절 가운데 한 구절이 바로 오늘 봉독한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입니다. 그 때 읽었던 그대로 공동번역 성서로 읽겠습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그 때보다 더 강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 원칙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율법이라는 원칙이요 또 다른 하나는 은혜라는 원칙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공의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은 행위에 대한 원칙으로 그 누구도 이 원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율법의 원칙대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율법이라는 원칙만 갖고서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원칙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거저 주신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범한 인간을 그냥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원칙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잣대로 잴 것 같으면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죄를 그냥 용서받는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강조한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개혁자들의 구호처럼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뒤늦게 뭔가 좀 부족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반절) 그가 또 다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심는 대로 거두는 이치는 지극히 보편적인 원리인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 아닙니까? 우리 조상들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열리고 대추나무에는 대추가 열립니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는 개를 낳고 소는 소를 낳습니다. 개가 고양이를 낳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자연계는 이 법칙을 아주 정확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이 원리를 잘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새삼스럽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심는 대로 거둘 것이라는 이치를 강조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행위는 어떻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속이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각종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요즈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랜드 사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애당초 직원을 뽑을 때부터 믿는 사람을 뽑기 때문에 이랜드 가족의 절반 이상이 신자들이라고 자랑합니다. 직장마다 사목이라는 것을 두고 예배도 드리고 신앙 상담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과정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믿는 자는 성령을 당연히 받게 되며 성령을 받은 자는 또한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믿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는 그 자체가 믿지 않는 자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렇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성령으로 행할지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농부들이 무엇을 믿고 씨를 뿌립니까?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이치를 믿고 씨를 뿌리지 않습니까? 보리를 뿌리면 보리가 날 것이라고 확실히 믿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이 씨를 뿌리면 얼마 후 반드시 여러 배의 결실과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씨를 뿌립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이치는 한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한 인간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틀 속에서 보내게 마련입니다. 과거의 어떤 행위가 현재와 관련이 되어 있고, 또 현재의 행위가 미래와 관련이 되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제의 행실이 씨앗이 되어 오늘의 열매가 되고 또 오늘의 행실은 또 다른 씨앗이 되어 내일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년 전에 어떤 행위를 했지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즉 심는 대로 거두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귀한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귀한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존재가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6장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다시 말해서 인간이 육적인 존재로 전락함으로 말미암아 영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무지 그 길을 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그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 아니면 육체의 사람 두 가지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고 육체의 사람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행위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위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는 성령을 통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 그 이상의 것을 행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핑계나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날마다의 삶 속에서 풍성하게 맺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심는 대로 거둘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늘 성령을 위하여 심어 마침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