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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57~62)
더글라스 맬록(Douglas Malloch, 1877~1938)이라는 시인의 작품 중에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라!”(Be the best of whatever you are)는 시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라!
언덕 위의 소나무가 될 수 없다면
골짜기의 관목이 되어라
그러나 시냇가의 제일 좋은 관목이 되어라
나무가 될 수 없다면 덤불이 되어라
덤불이 될 수 없다면 한 포기 풀이 되어라
그래서 넓게 트인 길을 걷는 이를 행복하게 만들어라
모두 다 선장이 될 수 없듯 선원도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있다
넓게 트인 길이 될 수 없다면 오솔길이 되어라
태양이 될 수 없다면 별이 되어라
네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라.
많은 사람들이 꼭 큰 일을 해야만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간장 종지가 있습니다. 비록 작고 또 볼품 없이 생겼지만 간장을 채우기에는 가장 적당합니다. 그런데 간장 종지가 더 많은 것을 채우지 못해서 불평한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까? 간장 종지가 간장이 아닌 좀 더 값진 것을 채우지 못해서 투덜댄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태도입니까? 간장 종지는 간장 종지로서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사명조차 수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미처 발휘하지 못한 재능을 아쉽게 생각하며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속에 숨겨져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을 꺼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작고 일상적인 일에 최선을 다할 것 같으면 기회는 반드시 오게 마련입니다. 밝은 태양만 꼭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교회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성장의 요인은 과연 무엇입니까?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믿음의 선배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한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충성과 봉사로 인해서 참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김동호 목사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란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김 목사가 언제나 원칙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자 하루는 어떤 교인이 찾아와서 진지하게 충고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세상을 잘 모르십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밥을 굶기 딱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일 년에 한두 번만 원칙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김 목사는 ‘하나님이 언제부터 부담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하셨는가?’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 목사는 그 교인이 부담스럽게 생각할 만한 설교 원고를 가지고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약 2 년 정도 지난 후 그 교인이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원칙을 이야기해 주셔서 참 좋습니다. 처음엔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실천하고 노력하니까 원칙대로 사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 살려고 하면 결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다운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들은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던 도중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특히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니 사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로 세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한 사람이 비장한 각오로 주님 앞에 나아와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주님은 다만 그 사람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 삶이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피곤한 삶인데 그래도 네가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조차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마 8:19 참조) 서기관은 상당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주님이 행하신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욕심을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조차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것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마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그는 전혀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부친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하지도 않은 부친의 장사를 핑계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미루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요 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 전도보다 더 중하고 급한 일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와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그러자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는 가족들과 작별할 시간을 좀 달라고 요청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번에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일에 미련을 갖는 사람 역시 주님의 제자로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밭을 똑바로 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에 여전히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했던 그도 결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 충성하고 또 온전히 헌신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할 막중한 사명을 가진 제자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만 바라보고 그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충성을 다한 참된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하반절)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주 목사님은 십자가의 길을 죽기까지 걸어갔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처럼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 국민 의례입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게 해 주겠다는 제안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결국 주 목사님과 그 가족들은 안정된 생활 보장을 포기한 채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팔순 노모와 처자식들을 다 하나님 손에 맡기고 자신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과 동일한 결단을 요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주님의 삶을 따르려면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운 상황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에 온전히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주님이 친히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귀한 상급으로 주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더글라스 맬록(Douglas Malloch, 1877~1938)이라는 시인의 작품 중에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라!”(Be the best of whatever you are)는 시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라!
언덕 위의 소나무가 될 수 없다면
골짜기의 관목이 되어라
그러나 시냇가의 제일 좋은 관목이 되어라
나무가 될 수 없다면 덤불이 되어라
덤불이 될 수 없다면 한 포기 풀이 되어라
그래서 넓게 트인 길을 걷는 이를 행복하게 만들어라
모두 다 선장이 될 수 없듯 선원도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있다
넓게 트인 길이 될 수 없다면 오솔길이 되어라
태양이 될 수 없다면 별이 되어라
네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무엇이든 전력을 다하라.
많은 사람들이 꼭 큰 일을 해야만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간장 종지가 있습니다. 비록 작고 또 볼품 없이 생겼지만 간장을 채우기에는 가장 적당합니다. 그런데 간장 종지가 더 많은 것을 채우지 못해서 불평한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까? 간장 종지가 간장이 아닌 좀 더 값진 것을 채우지 못해서 투덜댄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태도입니까? 간장 종지는 간장 종지로서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사명조차 수행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미처 발휘하지 못한 재능을 아쉽게 생각하며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한 속에 숨겨져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을 꺼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작고 일상적인 일에 최선을 다할 것 같으면 기회는 반드시 오게 마련입니다. 밝은 태양만 꼭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교회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성장의 요인은 과연 무엇입니까?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믿음의 선배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한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충성과 봉사로 인해서 참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김동호 목사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란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김 목사가 언제나 원칙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자 하루는 어떤 교인이 찾아와서 진지하게 충고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세상을 잘 모르십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밥을 굶기 딱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일 년에 한두 번만 원칙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김 목사는 ‘하나님이 언제부터 부담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하셨는가?’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 목사는 그 교인이 부담스럽게 생각할 만한 설교 원고를 가지고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약 2 년 정도 지난 후 그 교인이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원칙을 이야기해 주셔서 참 좋습니다. 처음엔 힘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실천하고 노력하니까 원칙대로 사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을 따라 살려고 하면 결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의 원칙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다운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들은 대부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던 도중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특히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니 사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로 세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한 사람이 비장한 각오로 주님 앞에 나아와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주님은 다만 그 사람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 삶이 머리 둘 곳도 없을 정도로 피곤한 삶인데 그래도 네가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조차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마 8:19 참조) 서기관은 상당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주님이 행하신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욕심을 버려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최소한의 안정된 생활조차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것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마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그는 전혀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부친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당하지도 않은 부친의 장사를 핑계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미루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요 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 전도보다 더 중하고 급한 일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와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그러자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는 가족들과 작별할 시간을 좀 달라고 요청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번에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일에 미련을 갖는 사람 역시 주님의 제자로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사람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밭을 똑바로 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에 여전히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했던 그도 결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 충성하고 또 온전히 헌신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할 막중한 사명을 가진 제자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주님만 바라보고 그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충성을 다한 참된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하반절)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주 목사님은 십자가의 길을 죽기까지 걸어갔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처럼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 국민 의례입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게 해 주겠다는 제안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결국 주 목사님과 그 가족들은 안정된 생활 보장을 포기한 채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팔순 노모와 처자식들을 다 하나님 손에 맡기고 자신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과 동일한 결단을 요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주님의 삶을 따르려면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어려운 상황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에 온전히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주님이 친히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 귀한 상급으로 주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