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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의 믿음 (호6:1-3)
지난주간 우리 사회에는 기쁘고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쉬웠던 소식도 많았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온 국민이 함께 염원하며 지켜보았지만, 결선투표에서 4표 차로 아깝게 떨어진 것이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청소년축구대표팀이 선전을 하고도 16강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로 숨진 사람들의 영결식도 슬픈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4살 어린아이가 사망 수십일 만에 발견된 것이 참 슬픈 일이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를 발견한 당시 집안은 온통 엉망이었고 현관문은 굳게 잠겨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 시신은 부검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손상돼 있어 사망일자와 원인을 밝혀내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아마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죽음은 누가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무심한 부모의 책임이 큽니다. 특히 엄마가 아이를 방치한 채 집을 나갔다는 것은 충격입니다. 아이를 낳은 것으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아이를 돌보고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면서 제가 더 놀란 것은 이웃들입니다. 아이가 울면서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죽어 집안에서 시신이 썩어 가는데도 몇 개월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고,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아이가 죽은 동네가 바로 구로동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시대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점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이기적이어서 자기밖에 모릅니다. 남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마지막 때의 너희들의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믿음이고, 믿음으로 나와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고, 시대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키워야 합니다. 선지자들의 믿음,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에 이어 오늘은 호세아입니다. 과연 호세아는 어떤 믿음을 사람일까요?
첫째, 아는 믿음입니다. 호세아는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를 크게 2부분으로 나눕니다. 대선지자와 소선지자로 구분하는데, 크고 작은 일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분량이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이렇게 나눕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대선지자라 부르고, 그 외에 남은 선지자를 소선지라고 부릅니다. 호세아는 소선지자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조용하고도 힘있게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본문은 그의 사역에 절정에 이른 선포의 말씀이면서, 그가 개인적으로 깨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할 말씀은 3절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가 여기서 믿음으로 신앙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한 단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알자’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머리를 가지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생으로서 바르고 참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아는 믿음에서 튼튼한 기초를 세워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세워지고 다져 가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왕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북쪽도 남쪽도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들, 특히 호세아 선지자가 진단한 이들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요? 4장에서 그것을 밝혀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에 망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넉넉하고 풍요롭게 삽니다. 아는 것이 힘이요, 아는 것이 튼튼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이어야 하고, 상고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처럼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며 사는 믿음의 중요합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이 땅에 잘못된 많은 이단들은 다 그렇게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을 신학이 아닌 신앙으로, 논리가 아닌 감정만으로 유혹합니다. 아는 믿음이 중요한 믿음입니다. 생각하는 믿음, 상고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경도 알고, 바른 삶을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호세아는 아는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3절의 아는 믿음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경험과 체험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틀, 삼일을 강조하는 말씀은 신앙과 삶에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아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믿음도 필요하지만 체험적인 믿음, 느끼는 믿음이 신앙생활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는 믿음이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 한다면 성경을 많이 알고, 말씀을 통달한 사람이 가장 믿음이 좋을 것입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줄 외우고,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터득한 신학교 교수들이 가장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말씀을 단순히 지식에서 머무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머리에 가진 모든 아는 지식이 가슴으로 느껴지고, 받아드리고, 체험되고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경험되어지는 것만 확실히 알고, 경험할 때 내 것이 됩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확실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안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지식으로만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중요합니다.
헐버트 웰즈(H. G. Wells)라는 영국의 작가가 쓴 단편소설 중에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대주교는 믿음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기도하고, 성경보고, 상담하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묵상으로 기도하고, 하루종일 기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도 매일 했던 것처럼 습관처럼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늘 했던 것처럼 그 날도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Yes, what is it?) 하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거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자마자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편은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대주교는 평생을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있고, 그 기도가 정말 응답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식이 있었지만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대답이 있자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입니다.
혹 우리도 이런 사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날마다 세미 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내가 실제로 기도하여 응답을 체험해야 합니다. 경험되어지는 것만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체험될 때 더 깊은 믿음의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내 주관적인 체험이 객관적인 말씀에 근거하여 확인될 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체험하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라고 강조합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이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결단을 세워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중요하고, 내 마음으로 체험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 이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행동을 촉구합니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개인과 민족에 어떤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크고 작은 기적과 능력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자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이미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이스라엘이 어려워지고, 나라가 궁극적으로 멸망하게 된 요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입니다. 아는 것에서 그치고, 체험되는 것에만 만족할 뿐, 행동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삶에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호세아의 믿음을 알려주기 위하여 명령을 내립니다. 호세아로 하여금 당시 음탕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명령에 따라 여인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습니다. 그러나 고멜은 은혜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호세아를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끝까지 고멜을 찾아가고, 감싸고, 마음으로 용서하고 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물론 하나님은 음탕한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간음과 타락을 상기시켜 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개인에게 향한 이런 모습은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결혼과 사랑과 용서를 통해 호세아의 어떤 믿음보다도 행동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믿음은 지식의 습득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감정의 풍부함에서 끝나서도 안됩니다. 믿음은 의지의 결단과 행동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요, 성숙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고 체험한 말씀과 주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고 떱니다.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내 의지를 굳건히 세워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 체험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이만큼 짧은 기간에 축복을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우리 믿는 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내 의지와 행동을 통해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썩어져 가고, 어둡고 더러운 세상에서 믿음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야 합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의 바로 그 행동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행동임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연극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납니다. 주인공은 온 관객을 향해 이렇게 외치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아니고 행동할 때입니다..” 어쩌면 오늘 예배를 드리며 나가는 여러분과 저를 향해 하나님이 들려주신 음성입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가 약하고 부족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내 겉 사람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기에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이끌어서 점점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내 약한 의지를 강한 의지로 세워 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약한 나를 인정하시고, 강한 나로 세우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는 믿음, 체험하는 믿음, 그리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고, 감정의 풍성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의지의 행동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하여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지난주간 우리 사회에는 기쁘고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쉬웠던 소식도 많았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온 국민이 함께 염원하며 지켜보았지만, 결선투표에서 4표 차로 아깝게 떨어진 것이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청소년축구대표팀이 선전을 하고도 16강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캄보디아 여객기 추락사고로 숨진 사람들의 영결식도 슬픈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4살 어린아이가 사망 수십일 만에 발견된 것이 참 슬픈 일이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행방불명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를 발견한 당시 집안은 온통 엉망이었고 현관문은 굳게 잠겨 오랫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 시신은 부검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손상돼 있어 사망일자와 원인을 밝혀내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아마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죽음은 누가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무심한 부모의 책임이 큽니다. 특히 엄마가 아이를 방치한 채 집을 나갔다는 것은 충격입니다. 아이를 낳은 것으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아이를 돌보고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면서 제가 더 놀란 것은 이웃들입니다. 아이가 울면서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죽어 집안에서 시신이 썩어 가는데도 몇 개월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고,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아이가 죽은 동네가 바로 구로동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시대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점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이기적이어서 자기밖에 모릅니다. 남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마지막 때의 너희들의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믿음이고, 믿음으로 나와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고, 시대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필요하고,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키워야 합니다. 선지자들의 믿음,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에 이어 오늘은 호세아입니다. 과연 호세아는 어떤 믿음을 사람일까요?
첫째, 아는 믿음입니다. 호세아는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를 크게 2부분으로 나눕니다. 대선지자와 소선지자로 구분하는데, 크고 작은 일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분량이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이렇게 나눕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을 대선지자라 부르고, 그 외에 남은 선지자를 소선지라고 부릅니다. 호세아는 소선지자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조용하고도 힘있게 당시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본문은 그의 사역에 절정에 이른 선포의 말씀이면서, 그가 개인적으로 깨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할 말씀은 3절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가 여기서 믿음으로 신앙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한 단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알자’는 것은 지식적인 앎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머리를 가지고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생으로서 바르고 참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아는 믿음에서 튼튼한 기초를 세워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세워지고 다져 가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왕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북쪽도 남쪽도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들, 특히 호세아 선지자가 진단한 이들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요? 4장에서 그것을 밝혀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에 망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넉넉하고 풍요롭게 삽니다. 아는 것이 힘이요, 아는 것이 튼튼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이어야 하고, 상고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처럼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며 사는 믿음의 중요합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이 땅에 잘못된 많은 이단들은 다 그렇게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을 신학이 아닌 신앙으로, 논리가 아닌 감정만으로 유혹합니다. 아는 믿음이 중요한 믿음입니다. 생각하는 믿음, 상고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경도 알고, 바른 삶을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호세아는 아는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3절의 아는 믿음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경험과 체험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틀, 삼일을 강조하는 말씀은 신앙과 삶에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아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믿음도 필요하지만 체험적인 믿음, 느끼는 믿음이 신앙생활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는 믿음이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 한다면 성경을 많이 알고, 말씀을 통달한 사람이 가장 믿음이 좋을 것입니다.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줄 외우고,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터득한 신학교 교수들이 가장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말씀을 단순히 지식에서 머무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머리에 가진 모든 아는 지식이 가슴으로 느껴지고, 받아드리고, 체험되고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경험되어지는 것만 확실히 알고, 경험할 때 내 것이 됩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확실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안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지식으로만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중요합니다.
헐버트 웰즈(H. G. Wells)라는 영국의 작가가 쓴 단편소설 중에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대주교는 믿음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기도하고, 성경보고, 상담하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묵상으로 기도하고, 하루종일 기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도 매일 했던 것처럼 습관처럼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늘 했던 것처럼 그 날도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Yes, what is it?) 하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거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자마자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편은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대주교는 평생을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있고, 그 기도가 정말 응답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식이 있었지만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대답이 있자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입니다.
혹 우리도 이런 사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날마다 세미 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면, 내가 실제로 기도하여 응답을 체험해야 합니다. 경험되어지는 것만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체험될 때 더 깊은 믿음의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내 주관적인 체험이 객관적인 말씀에 근거하여 확인될 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체험하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라고 강조합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이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결단을 세워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중요하고, 내 마음으로 체험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제 이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행동을 촉구합니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개인과 민족에 어떤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크고 작은 기적과 능력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자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이미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이스라엘이 어려워지고, 나라가 궁극적으로 멸망하게 된 요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입니다. 아는 것에서 그치고, 체험되는 것에만 만족할 뿐, 행동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삶에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호세아의 믿음을 알려주기 위하여 명령을 내립니다. 호세아로 하여금 당시 음탕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명령에 따라 여인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습니다. 그러나 고멜은 은혜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호세아를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끝까지 고멜을 찾아가고, 감싸고, 마음으로 용서하고 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물론 하나님은 음탕한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간음과 타락을 상기시켜 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개인에게 향한 이런 모습은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결혼과 사랑과 용서를 통해 호세아의 어떤 믿음보다도 행동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믿음은 지식의 습득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감정의 풍부함에서 끝나서도 안됩니다. 믿음은 의지의 결단과 행동까지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요, 성숙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고 체험한 말씀과 주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고 떱니다.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내 의지를 굳건히 세워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 체험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이만큼 짧은 기간에 축복을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우리 믿는 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내 의지와 행동을 통해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썩어져 가고, 어둡고 더러운 세상에서 믿음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야 합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의 바로 그 행동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행동임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연극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납니다. 주인공은 온 관객을 향해 이렇게 외치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아니고 행동할 때입니다..” 어쩌면 오늘 예배를 드리며 나가는 여러분과 저를 향해 하나님이 들려주신 음성입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입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가 약하고 부족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내 겉 사람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기에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이끌어서 점점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내 약한 의지를 강한 의지로 세워 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약한 나를 인정하시고, 강한 나로 세우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는 믿음, 체험하는 믿음, 그리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고, 감정의 풍성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의지의 행동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하여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