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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은 흙 (창2:7 고후4:7~11)
땅을 알면 하늘을 알고 땅을 보면 세상을 안다. 흙을 알면 사람을 알고 흙을 보면 환경을 본다. 그러므로 흙은 온 세상을 알게 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은 삼재(三才)로서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틀어 말한다. 그러므로 삼원(三元), 삼시(三始)라고 일컫는다. 여기에 사람의 몸은 흙이다. 창세기에서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처음 사람인 아담을 흙으로 빚었다. 사람의 몸은 흙이다. 제2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이것은 성육신의 의미이다. 몸을 낮추시고 자기의 비움, 자기 스스로의 비하(卑下)는 흙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흙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터득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흙’임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은 자기 몸 하나이다. 자기 몸을 잃으면 나는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所用)이 없어진다. 이것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다. 빈 손들고 와 빈 손으로 간다. 나의 것은 세상에 어디에도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릴 줄 아는 사람은 흙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의 제조는 가장 싼 것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가장 위대한 존재가 흙으로 빚은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흙과 사람과의 관계이다. 흙과 상관된 사람의 몸은 이렇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206개의 뼈를 까까서 얼개를 만들어 박고 거기다 650개의 근육과 100개 이상의 관절을 만들어 길이가 96,000km나 되는 핏줄로 몸 구석구석을 휘돌아 돌게 하고 25조 개나 되는 적혈구와 250억 개의 백혈구를 만들어 순환케 하며 온갖 오장 육부를 만들어 자리에 골고루 배치하는 가하면 무려 60조 개나 되는 세포와 130억 개의 신경세포를 만들어 잔디처럼 깔고 230만개나 되는 땀구멍을 통하여 숨 쉬는 구멍을 만든다.
그것뿐인가? 140만개나 되는 머리카락과 500만개의 털을 만들어 골고루 필요에 따라 심고 100조에 해당한 세균까지 만들어 몸 속 가득히 채워 놓았다. 여기다가 10만권 장서(藏書)의 정보 능력을 갖춘 몸 전체의 총사령부인 뇌(골)까지 만들어 몸을 조정하고 살아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도 알게 한다. 사람의 몸은 시속 40km로 달음질 할 수 있고 시속 160km로 볼(ball)을 던질 수 있으며 2m이상을 뛰어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힘줄은 1cm2당 1.24톤 장력(張力)을 견뎌낼 수 있고 대퇴골은 걷는 동안 1cm2당 80kg의 압력을 지탱한다. 염통은 1분마다 4.5l의 피를 몸 속 구석구석 실핏줄에 공급하고 배달한다. 사람은 일생동안 살면서 5억 번의 숨을 쉬고 심장은 30억 번이나 염통이 고동치게 한다.
그러면서 매일 세끼의 음식을 섭취한다고 한다. 이렇게 창조주는 사람의 몸을 만듦에 그저 신묘불측(神妙不測) 하기만 하다. 그러면 여기에 이왕이면 흙으로 빚어진 재료가 아니고 비싼 금속으로 사람의 몸을 만들었으면 장기적으로 그리고 견고하여 오래 살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갖는 다. 그러므로 사람의 신체구조에 따라 사파이어나, 에메랄드. 니켈이나 스테인리스와 같은 귀금속이나 강철로 만들었으면 불의의 교통사고나 병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이 흙으로 만들어 져 물질적인 값어치도 없고 오래가지도 않게 만들어진 데에 대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사람은 환절기의 날씨에 감기만 들어도 쩔쩔매고 모기의 입춤 한방에 사람은 병약해지기도 한다.
또한 사람이 60조 개나 되는 세포를 두는 가하면 그 두 배에 가까운 100조 개의 악성 세균을 몸에 같이 살게 하여 물리적 충돌 과정과 화학적 변화 과정, 동화(同化)과정, 융합 과정을 두어 일정 기간의 수명을 유지 하도록 수백 수천의 가지가지의 질병과 싸우도록 만듦에 대한 회의를 가져 본 것이다. 그리하여 몸은 피곤하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쉬지 못한다. 사람의 몸은 평생 동안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 까지 5억 번의 숨을 쉬도록 만들어 젓고 30억 번의 심장의 고동이 멈추지 않게 만들어짐에 대한 신기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 80년, 90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고만 있다면 어떻게 될 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설계되지 않음은 무엇일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계신다. 질그릇은 흙으로 지은 토기(土器) 그릇을 말함에 유의한다. 흙이란 땅의 원자이며 분자이다. 땅의 세포, 땅의 포자(胞子)가 흙이다. 이것은 모두가 흙으로 빚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흙에서 온 흙의 사람임을 알게 한다. 토인(土人)이다. 그러므로 흙 사람은 흙 없이는 못 산다. 이것이 흙과 사람과의 관계가 된다. 2007년 6월 20일(수) 밤 10:00-10:45 방송 ‘환경 스페셜 311회가 KBS제1TV에서 방영된 화면의 내용을 여기 소개한다. 제목은 “제 3의 피부 집, 흙으로 부활하다”이다.
우리의 몸의 제일 바깥 조직인 피부가 제1의 피부요 그 피부를 감싸고 있는 옷이 제2의 피부라면 제3의 피부는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집이라고 말한다. 살고 있는 집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지어 지느냐는 실내 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건강과 생활문화까지 지배한다고 말한다. 집의 재료로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흙인데 산업화 이후에는 시멘트로 대체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멘트와 각종 마감재에 사용된 여러 화학물질들로 사람들이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는 지금, 새롭게 흙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TV 화면에서는 집의 가장 오래된 재료이자 최근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흙의 가치와 천연 재료로서의 흙의 가능성에 보여주는 증언 현실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레르기성 천식과 피부 질환으로 고생한 청년이 흙집 짓기 교실에서 흙집의 가능성을 체험한다.
심한 아토피로 제주도에서 요양을 했던 한 여중생은 김제의 한 대안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나? 고 생각하게 한다. 시멘트는 가장 비싼 건축 재료로서 그동안 각광을 받아 왔다. 그런 시멘트는 상당한 고열을 가해 만들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폐 건축 재료의 부담을 안긴다. 그러나 흙은 별다른 가공 과정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고 나중에 다시 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과 흙은 하늘, 땅, 사람의 삼원(三元)의 자연환경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알게 함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삶을 가지고 사는 생명의 주위환경과 관계가 중요함을 알게 한다. 생명의 모태가 되는 흙! 흙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 아늑함과 흙이 사람의 건강과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어떤 건축 재료도 흉내 낼 수 없다. 흙집에서 사는 사람의 몸은 물론 생활과 문화까지도 지배하는 흙을 알게 하는 것이다. 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아버지인 하늘을 바라보며 땅은 만물을 낳는 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중에 오직 인간이 가장 귀하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간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짧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무상(無常)하다. 사람은 실바람에 흔들리며 간들거리는 풀잎, 그 끝의 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영롱한 이슬이다. 그래서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삶은 허무한 것, 텅텅 비고(虛), 아무것도 없는 것(無), 그래서 허무한 것, 죽으면 흙 만두(土饅頭=무덤의 불룩한 封墳) 속으로 옮겨져 한 줌의 흙이 되는 것, 몸집이 왜소한 사람은 ‘반 줌’ 흙으로 돌아가고 몸집이 큰 사람은 한 줌 반 또는 두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인생이란 가면 한 줌 들판의 흙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흙으로 지은 사람의 정체이다. 삶이란 헛된 것이기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성서의 말씀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란 무상하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진리 중 가장 평범한 진리는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진리 중 가장 마지막 진리 역시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고(苦)이다. 고통이라는 말이다. 파란만장의 풍랑과 같은 높은 고해(苦海)이다. 가시 밭 길이다. 진흙의 늪과 숯불 가마에 빠진 것과 같은 도탄의 고통이다. 원치 않는 죄와 순리와 질서의 혼돈에서 방황한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땅에 오신 분이 있다. 땅을 찾아 오셨다. 그는 흙의 삶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다. 이것이 성육신(incarnation)이다. 예수의 몸속에서 하나님의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인간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현존하며 실제적으로 삶을 만든다. 성육신은 몸을 취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몸은 흙이다. 사람이 흙과의 만남은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 사람이 흙과 같이 함은 삶의 본연(本然)이다. 사람의 생(生)과 사(死)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창조이유를 성서가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땅에 오신 예수를 알게 함인 것이다.
출처/배성산 목사 설교 중에서
땅을 알면 하늘을 알고 땅을 보면 세상을 안다. 흙을 알면 사람을 알고 흙을 보면 환경을 본다. 그러므로 흙은 온 세상을 알게 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은 삼재(三才)로서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틀어 말한다. 그러므로 삼원(三元), 삼시(三始)라고 일컫는다. 여기에 사람의 몸은 흙이다. 창세기에서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처음 사람인 아담을 흙으로 빚었다. 사람의 몸은 흙이다. 제2의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이것은 성육신의 의미이다. 몸을 낮추시고 자기의 비움, 자기 스스로의 비하(卑下)는 흙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흙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터득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흙’임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은 자기 몸 하나이다. 자기 몸을 잃으면 나는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所用)이 없어진다. 이것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다. 빈 손들고 와 빈 손으로 간다. 나의 것은 세상에 어디에도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릴 줄 아는 사람은 흙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의 제조는 가장 싼 것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가장 위대한 존재가 흙으로 빚은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흙과 사람과의 관계이다. 흙과 상관된 사람의 몸은 이렇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206개의 뼈를 까까서 얼개를 만들어 박고 거기다 650개의 근육과 100개 이상의 관절을 만들어 길이가 96,000km나 되는 핏줄로 몸 구석구석을 휘돌아 돌게 하고 25조 개나 되는 적혈구와 250억 개의 백혈구를 만들어 순환케 하며 온갖 오장 육부를 만들어 자리에 골고루 배치하는 가하면 무려 60조 개나 되는 세포와 130억 개의 신경세포를 만들어 잔디처럼 깔고 230만개나 되는 땀구멍을 통하여 숨 쉬는 구멍을 만든다.
그것뿐인가? 140만개나 되는 머리카락과 500만개의 털을 만들어 골고루 필요에 따라 심고 100조에 해당한 세균까지 만들어 몸 속 가득히 채워 놓았다. 여기다가 10만권 장서(藏書)의 정보 능력을 갖춘 몸 전체의 총사령부인 뇌(골)까지 만들어 몸을 조정하고 살아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도 알게 한다. 사람의 몸은 시속 40km로 달음질 할 수 있고 시속 160km로 볼(ball)을 던질 수 있으며 2m이상을 뛰어 오를 수 있다고 한다. 힘줄은 1cm2당 1.24톤 장력(張力)을 견뎌낼 수 있고 대퇴골은 걷는 동안 1cm2당 80kg의 압력을 지탱한다. 염통은 1분마다 4.5l의 피를 몸 속 구석구석 실핏줄에 공급하고 배달한다. 사람은 일생동안 살면서 5억 번의 숨을 쉬고 심장은 30억 번이나 염통이 고동치게 한다.
그러면서 매일 세끼의 음식을 섭취한다고 한다. 이렇게 창조주는 사람의 몸을 만듦에 그저 신묘불측(神妙不測) 하기만 하다. 그러면 여기에 이왕이면 흙으로 빚어진 재료가 아니고 비싼 금속으로 사람의 몸을 만들었으면 장기적으로 그리고 견고하여 오래 살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갖는 다. 그러므로 사람의 신체구조에 따라 사파이어나, 에메랄드. 니켈이나 스테인리스와 같은 귀금속이나 강철로 만들었으면 불의의 교통사고나 병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이 흙으로 만들어 져 물질적인 값어치도 없고 오래가지도 않게 만들어진 데에 대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사람은 환절기의 날씨에 감기만 들어도 쩔쩔매고 모기의 입춤 한방에 사람은 병약해지기도 한다.
또한 사람이 60조 개나 되는 세포를 두는 가하면 그 두 배에 가까운 100조 개의 악성 세균을 몸에 같이 살게 하여 물리적 충돌 과정과 화학적 변화 과정, 동화(同化)과정, 융합 과정을 두어 일정 기간의 수명을 유지 하도록 수백 수천의 가지가지의 질병과 싸우도록 만듦에 대한 회의를 가져 본 것이다. 그리하여 몸은 피곤하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쉬지 못한다. 사람의 몸은 평생 동안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 까지 5억 번의 숨을 쉬도록 만들어 젓고 30억 번의 심장의 고동이 멈추지 않게 만들어짐에 대한 신기함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 80년, 90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고만 있다면 어떻게 될 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설계되지 않음은 무엇일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계신다. 질그릇은 흙으로 지은 토기(土器) 그릇을 말함에 유의한다. 흙이란 땅의 원자이며 분자이다. 땅의 세포, 땅의 포자(胞子)가 흙이다. 이것은 모두가 흙으로 빚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흙에서 온 흙의 사람임을 알게 한다. 토인(土人)이다. 그러므로 흙 사람은 흙 없이는 못 산다. 이것이 흙과 사람과의 관계가 된다. 2007년 6월 20일(수) 밤 10:00-10:45 방송 ‘환경 스페셜 311회가 KBS제1TV에서 방영된 화면의 내용을 여기 소개한다. 제목은 “제 3의 피부 집, 흙으로 부활하다”이다.
우리의 몸의 제일 바깥 조직인 피부가 제1의 피부요 그 피부를 감싸고 있는 옷이 제2의 피부라면 제3의 피부는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집이라고 말한다. 살고 있는 집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지어 지느냐는 실내 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건강과 생활문화까지 지배한다고 말한다. 집의 재료로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흙인데 산업화 이후에는 시멘트로 대체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멘트와 각종 마감재에 사용된 여러 화학물질들로 사람들이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는 지금, 새롭게 흙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TV 화면에서는 집의 가장 오래된 재료이자 최근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흙의 가치와 천연 재료로서의 흙의 가능성에 보여주는 증언 현실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레르기성 천식과 피부 질환으로 고생한 청년이 흙집 짓기 교실에서 흙집의 가능성을 체험한다.
심한 아토피로 제주도에서 요양을 했던 한 여중생은 김제의 한 대안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나? 고 생각하게 한다. 시멘트는 가장 비싼 건축 재료로서 그동안 각광을 받아 왔다. 그런 시멘트는 상당한 고열을 가해 만들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폐 건축 재료의 부담을 안긴다. 그러나 흙은 별다른 가공 과정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고 나중에 다시 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과 흙은 하늘, 땅, 사람의 삼원(三元)의 자연환경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알게 함에 유의하게 하는 것이다. 삶을 가지고 사는 생명의 주위환경과 관계가 중요함을 알게 한다. 생명의 모태가 되는 흙! 흙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 아늑함과 흙이 사람의 건강과의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어떤 건축 재료도 흉내 낼 수 없다. 흙집에서 사는 사람의 몸은 물론 생활과 문화까지도 지배하는 흙을 알게 하는 것이다. 땅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아버지인 하늘을 바라보며 땅은 만물을 낳는 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중에 오직 인간이 가장 귀하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에서 살다가 흙으로 간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짧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무상(無常)하다. 사람은 실바람에 흔들리며 간들거리는 풀잎, 그 끝의 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영롱한 이슬이다. 그래서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삶은 허무한 것, 텅텅 비고(虛), 아무것도 없는 것(無), 그래서 허무한 것, 죽으면 흙 만두(土饅頭=무덤의 불룩한 封墳) 속으로 옮겨져 한 줌의 흙이 되는 것, 몸집이 왜소한 사람은 ‘반 줌’ 흙으로 돌아가고 몸집이 큰 사람은 한 줌 반 또는 두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인생이란 가면 한 줌 들판의 흙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흙으로 지은 사람의 정체이다. 삶이란 헛된 것이기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성서의 말씀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이란 무상하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진리 중 가장 평범한 진리는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진리 중 가장 마지막 진리 역시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몸은 고(苦)이다. 고통이라는 말이다. 파란만장의 풍랑과 같은 높은 고해(苦海)이다. 가시 밭 길이다. 진흙의 늪과 숯불 가마에 빠진 것과 같은 도탄의 고통이다. 원치 않는 죄와 순리와 질서의 혼돈에서 방황한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땅에 오신 분이 있다. 땅을 찾아 오셨다. 그는 흙의 삶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다. 이것이 성육신(incarnation)이다. 예수의 몸속에서 하나님의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인간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현존하며 실제적으로 삶을 만든다. 성육신은 몸을 취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몸은 흙이다. 사람이 흙과의 만남은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 사람이 흙과 같이 함은 삶의 본연(本然)이다. 사람의 생(生)과 사(死)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창조이유를 성서가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땅에 오신 예수를 알게 함인 것이다.
출처/배성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