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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31~36)
지난 1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광복 이후 60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엄청난 성장과 변화를 거쳤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요 항목의 수치를 몇가지 살펴보면 먼저 인구는 해방 당시 1,613만에서 지난해 4,829만으로 세 배가 증가했고, 자동차 생산대수는 1955년 일곱 대를 생산하던 것에서 지난해 347만대로 무려 50만 배가되었고, 국민총생산은 53년의 13억 달러에서 지난해 6801억 달러로 520배 올라 세계 11위 규모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여러 통계에서 보여주는 자료를 굳이 제시하지 않더라도 우리 대한민국이 그 동안 놀라운 경제 부흥과 발전을 거쳤음은 세계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는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느끼지 않은 수 없습니다. 특별히 일제시대의 고초와 6,25사변, 그리고 혼란 속의 지난 수 십 년을 쓰라린 삶의 체험으로 겪어 오신 많은 어르신들은 눈만 감아도 깊은 감회에 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감격하며 기쁨의 감사를 드릴 때 전후 세대 또는 젊은 세대 가운데 일부는 우리 민족의 쓰라린 과거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잘 알지 못하여 발전상 실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태국에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가난한 그들을 보며, 5,60년대는 태국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부자였고 우리는 이보다 훨씬 못 먹고 못살았다고 하면 믿지를 않아요. 언제 그렇게 가난한 시절이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한번도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도대체 가난하면 얼마나 가난했다는 것일까? 하고는 만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감격하는데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면, 공감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같은 공동체의 대단히 중요한 특성입니다. 같은 비전을 품는 것도 기실, 같은 기억 속의 감사제목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은 작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1948년 팔레스틴 지역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그들은 땅도 없고, 나라 없는 설움에 세계 각처를 헤매며 눈물의 세월을 보냈지만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강인한 공동체성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같은 기억을 소유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다른 생각으로 살았는지 모르나 그들은 하나의 동일한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며 이것을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같은 기억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두 한가지의 경험을 하고 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하나님이 이끄셨다는 믿음이 없는 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돌아서면 배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하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던 자들은 하나같이 모든 사건과 섭리를 자기들 마음대로 이해하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함부로 역사를 왜곡하며 말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역사를 고치고, 가리고, 새롭게 덧칠하기도 합니다. 같은 기억을 포기하고 서로 다르게 말하며 다른 기억으로 고쳐놓으려 한다면 이미 그들은 더 이상 같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신앙적 공동체가 깨어지는 슬픈 순간이 바로 이때입니다.
사실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알아가며 기억하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기억이란 "안다"는 것의 구체적인 형식이며 동시에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안다"라는 표현보다는 이해했다, 그리고 기억했다는 표현이 더욱 분명한 인지적 상황을 설명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기억은 학습의 원리에 의하여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두 가지의 일을 합니다.
우선은 강한 경험을 갖는 것입니다. 강한 경험은 오래 기억되고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뇌리에 분명히 새겨져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둘째로 반복하여 경험합니다. 반복을 거듭하면 인간의 뇌는 오랫동안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떠나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려 열 가지나 되는 이적을 보여주신 것도 그 때문이요, 되풀이되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이방민족을 물리치시고 저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반복되는 은총의 메시지는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며 도우시고 지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라는 것 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40년 동안 돌고 돌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그들은 수많은 싸움을 치러야 했고 모두 31개의 도시국가와의 전쟁을 치르며 한 걸음씩 약속의 땅을 회복한 끝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하나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마다 큰 희생과 손실도 뒤따랐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모릅니다. 모두 다 충격적인 경험적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잊지 말라고 하는 강력한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죄악과 영적 타락을 거듭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반복하며 말씀하시고 설득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잊어도 다시 돌보아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금 해방의 감격과 광복의 은총을 기억하며 맞는 광복주일에, 그러나 여전히 해방의 감격과 자유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버려야 할 저마다의 그릇된 기억 속에 얽매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의 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계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참된 자유란 대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유롭고자 애쓰며 자유를 얻기 위하여 희생과 노력을 마다하지 않고 투쟁하며 쟁취하려고 생명까지도 내던집니다만 정작 자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 동안 얻고자 그토록 애썼던 그 자유가 진정 오늘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했는지, 얻을 만큼 얻었고, 쟁취할 만큼 했다면 이제는 그래서 정녕 자유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어떤 이는 경제적인 자유를 자유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난을 벗어나면 자유로와 질 것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야 비로소 물질로부터 초월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가졌다해도 물질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듯 하지만 그 어떤 지식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간혹 다른 어떤 이로 인해서 마음이 편치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때가 있을 줄 압니다. 그가 직장에서 혹은 이웃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불행하게도 가족일 때도 있으며 심지어 내 배 아파서 낳은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속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고, 때론 보는 것만으로도, 생각만 해도 속이 끓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과 생각의 자유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야 내가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상대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 사람 없어지면 또 다른 이가, 이 문제가 해결되면 저 문제가 나를 거듭 괴롭게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상대가 변한다고 내가 자유로와 지는 게 아닙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내 자신입니다.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상대방의 문제인줄 알았으나 조건과 상황 탓 인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자유하고 내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여건의 문제가 아니고 풍요와 만족의 이유도 아니요, 오직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분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손 붙들고 오늘도 그분의 평강을 구하며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주권 가운데 거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자유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사유하심으로 우리 영혼이 자유를 얻기도 했습니다. 생각이, 몸이 자유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유는 어떻게 주어졌단 말입니까? 전적인 주님의 은총임을 알고나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받을 만한 삶을 살아서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희생적인 사랑을 넘치도록 받습니다만 과연 그 아이들이 무슨 값을 지불했기에 그 사랑을 받습니까?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온전했기에 이토록 넘치는 은혜와 자유를 주십니까? 과연 이것이 우리가 받을만한 해서 받은 자유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서 방법을 찾던 중에 한 주간 동안 성경을 통독하기로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은 왜 이토록 고생을 하며 힘겨운 날들을 살아야만 했을까 하는 궁금함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며칠간 집중적으로 이스라엘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들여다보니 결론은 이랬답니다. "해도 너무했다" 이스라엘에 주신 은총에 비해 그 백성들이 행했던 패역함과 죄악됨을 바라보니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가슴을 쳤답니다.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말입니다. 그러한 중에 주신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끊임없이 범죄하며 목도한 은총을 내어 버리는 패역무도한 민족에 허락하신 그 자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으로 얻어졌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했듯이 60년 전 우리 민족에게 허락하신 광복의 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요 섭리임을 극명하게 나타내신 민족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며 동행하시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억압과 사슬로부터의 해방은 곧 빛을 되찾은 광복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광복 후 바로 5년만에 북한의 남침을 받을 만큼 허술한 상태가 아니었읍니까? 강력한 힘과 능력으로 무장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치 않은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어느 민족에게보다도, 어느 때에 보다도 절실히 필요했던 힘겨운 상황속에 놓여 있던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현실이 아니었습니까?
일부 알려진 바대로 해방 직전에 광복군은 한반도에 진군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군사조직인 광복군은 스스로의 힘이 충분치 못하여 다른 나라들의 도움 속에 훈련을 받고 무기를 조달하여 한반도에 진입함으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다른 이유가 아니라, 즉, 준비가 부족하거나 작전이 실패하거나 방해가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한발 앞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우리는 해방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미리 해방이 되는 바람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해방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국제적 정세나 열강의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으로 인해 예상치 않게, 그리고 비밀스럽게, 급작스럽게 그렇게 그 해방은 다가왔고,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민족에게 그렇게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힘도 없을때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의 감격이야 말로 이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며 우리야말로 그 전적인 은혜의 역사의 증인들이 아닙니까? 이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보고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기념하고 있습니까? 경축 광복 60주년이라는 대형 장식물이 도심 곳곳을 장식하고 있던데 과연 무엇을 축하하며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각종 행사로 참 많이 분주하던데 대체 무엇을 기념하는 겁니까? 그리고 무엇을 감사합니까?
정치논리나, 이념주창이나, 문화 행사하는 것도 다 좋아요. 그러나 오직 이끄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뿐이요,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에벤에셀에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지금까지 허락하신 은혜에 필요한 응답이요, 앞으로의 삶을 결정케하는 이유가 됩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는 지나온 삶을 어떻게 감사하며 앞으로 어떤 생각과 작정과 노력으로 살것인지를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자유자의 삶을 살기도 하고 노예 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에밀 부르너는 그의 책 "Justice and Freedom in Society"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하나님께 얽매일 때 비로소 자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의 역설입니다. 내 생각이, 기억이, 소원이,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생명을 얻는 자유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 굳게 붙들려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기념하며 기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행동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안에 거함으로 진리를 누리십시오. 그제서야 참으로 자유로와지는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함을 이제라도 깊이 깨달아 더 이상 허탄한 것으로 우리의 평안을 꾀하거나 번영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함으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안에 거함으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윤광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