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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포로·사랑의 포로 (왕상21:17~26)
“인간은 왜 불행해지는 것일까?”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소유가 부족해서 그런가요? 조건이 나빠서 그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친 욕망을 추구해서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거위가 한 마리 생겼습니다. 거위가 매일 알을 하나씩 낳는데, 신기하게도 황금으로 된 알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농부가 횡재를 한 겁니다. 매일 황금 알을 챙기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이젠 고된 농사일 하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히 거위 뱃속에 황금이 가득할 것이니 배를 가르면 크게 횡재할 게 틀림없어!” 그래서 배를 갈랐는데 황금은 보이지 않고 거위만 죽고 말았습니다. 농부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우화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지나친 욕망을 추구하다가 결국 망하고 마는 게 인간의 비극입니다. 전1:7~8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 ... )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 하도다” 강물이 아무리 흘러들어가도 바다가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욕심으로 만족이 없다는 겁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도 바로 욕망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도록 허락하셨지만, 한 가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창2:16~17 참조) 인간은 자유를 가졌으되, 무한 자유를 가질 수 없음을 보여준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한 자유를 가진 존재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참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선악과)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러나 아담과 여자는 참 만족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욕망의 포로가 된 겁니다. 욕망을 컨트럴하지 못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범죄함으로 멸망의 종착역을 향해 끌려가게 됩니다. 실로 인간은 욕망의 포로가 되어 멸망의 종착역을 향해 끌려가는 군상(群像)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욕망의 포로가 되어 멸망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죠? 아합 왕입니다. 그의 비참한 인생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반면교사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불행한 인생의 전형 아합 : 욕망의 포로
아합은 모든 불행한 인생의 전형입니다. 그는 소유가 부족해서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라 욕망의 포로가 되어 불행해진 인간입니다.
① 아합의 조건 :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 조건만 갖고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왕 중에서도 꽤나 잘 나가는 왕이었습니다. 아람 나라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로 인해 왕권이 탄탄해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가둬들여 왕실의 수입도 많았습니다. 그의 궁궐은 상아궁(왕상22:39)으로 얼마나 호화로웠는지 모릅니다. 왕상21:1을 보면, 그에게 별궁(왕의 별장)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상21: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당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거기 왕궁이 있었고, 이스르엘이란 도시에 왕의 별장이 있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별궁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아합에게 뭐가 부족했겠습니까?
② 아합의 욕망 :
그런데 별궁 근처에 있던 나봇의 포도원이 탐났던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욕망이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 개를 채우려고 하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강요합니다. 왕상21: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포도원은 생계용입니다. 이스라엘 율법으로 포도원 첫 농사가 잘 안 되면 군대조차 면제해 줄 정도입니다.(신20:6 참조) 요즘으로 말하면 ‘의가사 제대’입니다. 그런데 채소밭은 별궁의 채마전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취미 삼아 가꾸는 주말 농장 같은 겁니다. 없어도 되는 것이죠. 그런데 생계용 포도원을 탐냈던 것입니다.
나봇은 왕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토지제도는 특이합니다. 하나님이 각 지파와 가문에 땅을 분배해 준 것으로 남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 빚으로 넘어갔어도 결국은 되찾아 와야 합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남의 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봇이 왕의 요구지만 거절한 겁니다. 그때 거절당한 아합이 어떻게 됩니까? 왕상21: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 하니 ... ” 마치 떼쓰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밥을 안 먹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입니다. 작은 땅에 대한 욕망 때문에 왕인 그가 스스로 불행해진 겁니다. 정말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입니다.
③ 아합의 범죄 :
아합이 밥도 먹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보다 못한 왕비 이세벨이 나섭니다. 그녀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무슨 왕이 그 모양이냐고 핀잔을 줍니다. 자기가 빼앗아 줄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흉계를 꾸밉니다. 왕상21:5~15 보면 이세벨이 어떻게 나봇을 살해하는지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 증인을 세워 불법 인민재판을 열게 합니다. 두 명의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 왕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씌워 살해합니다. 당시 율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모독하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법을 가장해서 살인한 겁니다.
그러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해 버립니다. 왕상21: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사악합니까?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남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빼앗아버릴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④ 아합의 멸망 :
이렇게 사악한 죄를 저지른 아합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시켜 저주를 선언합니다. 본문 17절~24절의 내용입니다. 거기 보면 아합과 아합의 말로가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 그 후손들이 다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열왕기 상 22장, 열왕기하 9장, 10장) 전사한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고, 이세벨의 시체가 땅에 내팽개쳐지고 개가 그 시체를 뜯어 먹습니다. 모든 후손들이 멸절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그 죄악이 얼마나 어리석고 사악한 것인지 지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의 멸망 원인이 욕망의 포로가 된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20절.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기서 ‘팔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히트마케르카’인데, ‘노예로 만들다’ ‘예속시키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합이 자기 영혼을 팔아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 욕망 하나 컨트럴하지 못합니다. 이게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증거합니까. 약1:14~15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dragged away)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망을 컨트럴하지 못하면 반드시 범죄하고 마지막에는 멸망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철칙입니다. 그렇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거니와 인간이 망하는 것은 끝없는 욕망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절대로 행복해지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고 권세가 대단해도 매한가지입니다. 많은 소유가 있어도 욕망이 더 크면 가난뱅이로 사는 겁니다. 큰 권세가 있어도 욕망이 더 크면 졸장부로 살아가는 겁니다. 아합 왕이 그랬습니다.
[2] 인생이 행복해지는 비결 : 사랑의 포로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욕망을 이기고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중립적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무언가 의지하고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따라가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멀어진 후 욕망에 끌려 다니고 죄악의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욕망과 죄의 사슬에 매여 끌려가는 포로가 된 겁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욕망의 사슬,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속박하는 죄의 사슬에서 구원하시고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로부터 욕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으면 욕망의 포로가 아니라 이제 사랑의 포로가 됩니다. 욕망과 죄에 강제로 끌려다니는 비참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복되어 스스로 자발적으로 따라가고 순종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원리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NIV-Christ's love compels us, NASV-the love of Christ controls us)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포로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진정한 만족과 기쁨, 그리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절대로 인간 조건으로 만족해지는 게 아닙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속입니다. 욕망을 따라가면 행복하다고 ... 그러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커지는 욕망에 포로가 되어 멸망의 종착역으로 끌려가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대한 폭포에 연결된 강에 얼음덩어리가 둥둥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음덩어리에 양 한 마리가 얼어붙어 있는 겁니다. 하늘을 나르던 독수리가 보고 쾌재를 부릅니다. 쏜살같이 날아가 날카로운 발톱을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폭포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옵니다. 폭포에 도달하기 전에 빨리 하늘로 다시 올라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폭포에 휩쓸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양 고기를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독수리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시간을 끕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얼음덩어리가 폭포에 다다랐습니다. 할 수 없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 순간 독수리는 당황합니다. 꾸물거리며 시간을 끄는 동안 발톱이 얼음어리에 박힌 채 얼어붙은 것입니다. 결국 양의 시체와 함께 꼼짝없이 폭포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욕망의 사슬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위해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의 포로로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참 만족을 누리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포로가 된 우리는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① 비움 - 세상의 욕망 비우기 :
우리가 구원받아도 육체를 갖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욕망이 끓어오릅니다.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가지면 더 갖고 싶어집니다. 하면 더 하고 싶어집니다. 보면 더 보고 싶어집니다. 되면 더 되고 싶어집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속 세상의 욕망을 자극하며 우리를 유혹해 옵니다.
그럴 때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또다시 욕망의 포로가 됩니다. 별 수 없습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대로 오직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욕망을 물리치고 우리 영혼을 비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본 욕구까지 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 욕구와 세상의 지나친 욕망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 안에 있느냐 넘어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배가 부른데도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 해가 됩니다. 더 나아가 남의 것까지 강탈하며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게 곧 욕망의 포로, 죄의 포로가 되는 겁니다. 아합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욕망을 절제하고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행복해 집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2003년 22년 장기집권 후 스스로 퇴임했습니다. 근대화의 아버지로 국가의 영웅적 존재로 추앙받던 그가 물러가려고 하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주변에서 극구 만류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답변하고 물러났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밥숟가락은 미리 놓는 게 좋다고.” 세상 사람도 이러는데 천국의 소망이 있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면 곤란합니다. 육체의 다이어트를 하면 몸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영혼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욕망을 물리치고 영혼을 비워야 합니다. 그러면 진짜 행복해집니다.
② 채움 - 하나님의 사랑 채우기 :
욕망을 비우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비인 영혼 가운데 넘치는 평안과 기쁨을 부어주십니다. 그것을 체험하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계시니 아쉬울 게 없다는 겁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과연 무엇입니까? 이런 진솔한 고백이 없는 게 문제 아닙니까? 우리의 문제는 결코 소유나 권세가 부족하고, 세상의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유명한 고백이 이를 증거합니다. 그는 세상의 온갖 욕망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학문, 종교, 쾌락 ... 방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 얻은 평안이 얼마나 큰지 그는『고백론』(Confessions)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참 평안이 없나이다.” 이렇게 해서 그 기나긴 영혼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은 겁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③ 나눔 - 하나님의 사랑 나누기 :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충만히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눕니다. 그 사랑에 이끌려 그렇게 됩니다. 갈5:1,13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 )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정말 체험한 사람은 사랑의 종이 됩니다. 사랑의 포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복음을 위해 세계를 누비며 고난을 자청했습니다. 사랑의 포로였기에 그런 겁니다. 그는 3차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곳에 가면 잡혀 죽을지도 모릅니다. 모두 만류합니다. 그러나 밀레도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행20:22 (바울의 밀레도 고별 설교)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compelled by the Spirit - NIV)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에 매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령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게 참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이게 사랑의 포로 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수고하며 복음을 전하고 섬겨주었습니다. 그들 중에 여기서 잠든 분들의 묘지가 합정동 양화진에 있죠. 거기 가 보면 선교사니들의 묘비명이 하나 같이 감동적입니다. 그중에 독신으로 와서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켄드릭 선교사(Rubye R. Kendrick, 1883~1908)의 묘비명이 특히 감동적입니다. “내게 1000번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모두 코리아를 위해 바치리라.” 이게 사랑의 포로의 모습입니다! 크든 작든 우리의 처한 형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움 받고, 그 사랑을 나눌 때 진정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욕망의 포로, 사랑의 포로!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주간 신문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30대의 젊은 두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교수까지 된 신 모 씨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아프간에서 인질로 잡혀 있는데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 이지영 자매입니다. 신 모씨는 억대 빚을 진 신용불량자이면서도 외제 차를 몰고 온통 명품으로 치장하며 살다가 결국 비참한 모습으로 도피 중입니다. 전형적인 욕망의 포로입니다. 이지영 자매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척박한 아프간에 가서 수년간 봉사했고, 이번에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에게 양보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사랑의 포로입니다.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자만이 이해가 되는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입니까? 혹시 예수 믿고 천국을 소망한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욕망의 포로가 아닙니까? 아니면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에 이끌려 사는 사랑의 포로입니까? 다시 한번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결단함으로 사랑의 포로가 되어 남은 생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