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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 (마태복음 16:13-20)
예수님께서 세우시기를 원했던 교회, 주님의 마음속에 있던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요? 그 교회는 상여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스산한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 교회는 쓸쓸하고 무력해 보이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깊은 산골 산속으로 피난 나와 숨어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시는 교회는 의미있고 아름답고 늘 힘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나고 변화를 체험하고 모두들 행복에 넘치는 그런 교회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정복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그리시고 계획하셨던 그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1. 죄악의 도시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그리셨던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그것이 세상 속에 세워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찬 바람부는 저 세상 한복판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6장 13절은 얼른 보면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단순히 지리적 위치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 바로 여기에 교회의 배경과 현주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십시다. 3년에 걸친 공생애를 매듭지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고난의 걸음을 내디디며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한 대 장정을 시작하시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는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바로 변화산으로 알려진 헬몬산을 가시기 위함입니다. 헬몬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장 17장에 보면 주님의 얼굴이 눈부신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그곳에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누가복음 9:30-31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바로 그 대화의 내용은 인간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공생애를 매듭지으시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대 장정을 눈 앞에 두신 주님께 있어서 헬몬산을 향하신 이 순간은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헬몬산을 향하시는 도중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헬몬산을 향하시면서 주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을 통과하시게 됩니다. 이 마을은 해발 3300m에 이르는 헬몬산 자락 345m 지점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설악산이 1700m쯤 되니까 가히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만년설이 뒤덮여 있는 헬몬산 정상이 언제나 올려다 보이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골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이 바로 이 마을에 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도시 이름을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과 자기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명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 붙여 있는 도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도시에나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조건이 선행되어야만 했습니다.
우선, 일정 규모이상의 도시이어야만 했습니다. 형편없는 마을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단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인구 그리고 도시의 규모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시 한 가운데 혹은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황제의 신상을 반드시 세워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한 도시 이름에 로마 황제 가이샤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도시가 조그마한 도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도시 한 가운데에는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도시를 배경삼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사람들이 나를 가르쳐 누구라고 하느냐?" 이것은 결코 빈들 광야 위에서 던져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도시, 황제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를 배경으로 던져진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분명히 바로 여기 우상과 죄악의 도시 한복판에 세워졌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그곳은 수리아의 바알 숭배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곳에 14개나 되는 바알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에 대한 예배는 자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들이 음란한 행위들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근처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 깊은 동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연의 신 판(Pan)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수리아의 바알 숭배와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죄악들이 창궐했던 곳이었습니다.
거기다 웅대한 황제의 신상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빌립보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상황입니까?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화려한 세상 종교들 속에서, 그들의 모든 역사와 세력의 한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모든 부도덕한 범죄들의 한 가운데서, 이제 겨우 12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집도 없고 돈도 없던 나사렛 예수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파라독스 - 역설입니까? 우리는 현대 교회가 부흥하고 번성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시대의 모든 문화는 교회에 대하여 너무 비호의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교회가 처음 세워질 당시의 상황은 우리의 이런 핑계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까?
세계를 정복했던 로마의 땅에서, 우상의 동굴 밑에 둘러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황제의 신상을 바라보며, 그곳 가이사랴 빌립보 땅을 함께 밟고 서서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언 듯 주님에 대한 칭송의 대답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를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결코 이것이 칭송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머릿속에 지금 웅장한 로마의 가이사랴 빌립보를 그려보십시다. 그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12제자의 몰골을 비교해 보십시다. 그들의 모습, 깡마른 몰골, 초라한 옷, 거지 일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갈릴리 빈민 출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색이야말로 로마 황제 신전의 문지기보다 더 못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잔뜩 기가 죽어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몰골을 지니고 있는 분을 로마 황제처럼 살아있는 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껏해야 똑같은 몰골로 이 땅에서 일했었던 유대 선지자중 한 명 정도로 생각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일행을 바라보며 그 옛날 울며 울며 외치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생각했을까요? 음란한 아내를 찾아 맨발로 뛰어 다니던 호세아를 생각했을까요?
주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 가이사랴 빌립보 황제의 신상 앞에서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에게 나는 누구냐?" 베드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벌판 위에서 행해진 인간의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향해서 드려진 고백입니다.
바로 이 베드로의 고백 내용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는 베드로가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저 웅장한 로마 제국의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 비록 초라한 몰골일망정 당신이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당신을 보고 맨발의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외관상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저 황제의 신전에서 인간의 추앙을 받고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그 신전의 문지기보다 못한 옷을 입고 있을망정 당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목가적 시냇가에서 드려진 고백이 아닙니다. 황제의 도시 한 가운데서, 황제의 신전 앞에서 옹색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려졌던 인간의 고백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신앙고백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의 가치관을 따르지 아니하고 당신의 가치관을 따르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업적 주의, 성공 주의,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는 세속주의로 대등되는 황제의 가치관과 로마 제국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결단이요 각오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성취 논리에서 벗어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바로 이와같은 고백이 허허벌판이 아니라 황제의 신전이 있는, 황제의 도시 한복판에서 드려졌음을 기억한다면 이 고백이야말로 주님을 향해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임이 분명합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그 눈에 보이는 웅장한 황제의 도시, 황제의 신전 앞에서 눈에 보이는 황제가 아닌 거지같은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따르기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하고서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는 바로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리라 천명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화려함과 거대한 저 뒤편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는 커다란 손길을 보지 않고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가치관에 노예됨이 없이 그 가치관을 뛰어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논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세상의 성공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는 각오와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2. 연약한 사람들을 통해
황제의 땅에서 황제의 가치관이나 황제가 주는 행복과 권력을 따라 가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 가겠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습니까?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 또 '반석'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자, 이제 내가 너의 인생을 바꾸겠다. 내가 너를 변화시키겠다. 너는 이제 베드로이다. 너는 지금까지 시몬이었고, 시몬은 문제 투성이, 크고 작은 결점들 그리고 충동적인 실수들과 실패들로 가득찬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너는 교회의 밑바닥 - 그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이 교회의 반석이다. 바로 네가 교회의 반석이다. 그 반석 위에 나는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 시간 우리는 베드로 위에 세워지는 교회의 비밀과 신비를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보게 된 사람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그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약점 많고 허물 많은 베드로를 통해서 말입니다.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베드로, 그러나 우리가 잘 알 듯이 베드로는 금방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해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시겠다는 예수님을 가로 막고 나섰습니다.
마16:22 우리말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took him aside) 그를 야단치기(rebuke) 시작했다."
뒤이어 나오는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도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별세할 것을 말씀하시지요.(눅9:31)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베드로가 뭘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너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권세로 교회를 세우겠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내 능력을 반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를 세우겠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연약함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인간의 연약함은 가려집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교회는 바로 당신 위에 세워집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바로 당신을 통해 셀목장이 세워지고 성장되고 번식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비밀입니다. 이것은 곧 당신의 축복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의 셀목장을 세울 수 있다면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당신의 집에서 셀목장이 모였다면 당신의 집은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3.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은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18절) 한 신학자는 이 말씀에서 소유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지적하기를 "예수님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소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고, 둘째는 주님께서 나의 교회라고 불렀던 그분의 몸이다"고 했습니다. 바로 나의 아버지, 나의 교회입니다.
옳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커다란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나의 교회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즉 내가 계속하여 내 교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창설자요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만들어 가십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사도 요한을 통해서 보내는 편지가 있습니다. 거기 모든 교회를 붙들고 보호하시는 한 주인이 나옵니다.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이 가라사대"(2:1)
여기 세상의 모든 교회를 붙들고 계신 -
이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를 향해 명하시고 충고하시고 감독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명한 찬송 작사자인 「존 뉴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 위에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냐.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그렇습니다. 나라도 변합니다. 사상도 사라집니다. 사랑도 갑니다. 제왕도 영웅도 지나갑니다. 제도도 변혁됩니다. 종교도 변할 수가 있고 철학도 변질됩니다. 그런데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주님이 그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교회를 보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든든함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당신의 집에서 셀교회로 모이십시요. 거기 주님이 계십니다.
4.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교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권세」라는 말은 "대문"이란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음부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리라" 지옥의 대문이 결코 교회를 흔들어 댈 수 없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그림을 그리십니까?
교회와 음부라는 두 커다란 성이 있습니다. 음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교회라는 성을 공격합니다. 엄청난 공격을 합니다. 교회라는 성이 그 공격 앞에 흔들거립니다. 위험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석에 세워진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공격이 거세지고 오래 지속돼도 교회는 신기하게도 잘 버팁니다. 예수님이 꼭 쥐고 계시니까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2000년 동안 버티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시나요? 이것이 전통적인 교회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그린 교회의 그림이 아닙니다. 여러분 뭔가 잘못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그림은 이처럼 소극적이고 수비적이고 무력해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라는 성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파성추'라는 무기를 들고 지옥 문들을 두드려 깨부숩니다.
여러분 파성추라는 것을 아시지요. 유난히 전쟁이 많은 왕건이라는 연속극을 보니까 적진의 성문을 깨뜨리기 위해 바로 파성추를 사용하더군요. 길다란 통나무 한쪽 끝을 연필처럼 뾰쪽하게 깎아서 거기에 철판을 입힙니다. 그것을 바퀴달린 수레에 싣거나 수십명의 군사들이 옆구리에 끼고 달려가서 성문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가 복음의 파성추를 들고 세상을 공격해 나가면 세상이 그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그림이 완전히 반대지요? 교회가 세상의 공격 앞에 수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하고 음부가 수비에 나서지만 교회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셀교회가 그리는 교회의 그림입니다.
성경의 해석이 바뀌면 신학이 바뀝니다. 신학이 잘못되면 우리 삶이 잘못됩니다. 우리는 이제껏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맨날 세상 앞에서 쩔쩔매는 수비적인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교회를 보아야 합니다. 이제 그대로 자신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격에 나서면 세상의 어떤 견고한 진도 깨지고 맙니다. 셀목장에서 마귀에 붙들린 사람들을 구원해 낼 때, 세상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건져낼 때, 그것은 세상을 공격하고 정복해 가는 영적전쟁입니다.
우리가 수비적 그림을 마음에 그렸을 때는 전도가 겁이 나지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격에 나서면 음부의 견고한 성문이 깨지도록 되어 있다구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믿고 이제 세상 속으로 복음의 파성추를 들고 음부의 성문들을 깨러 나서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의 공동체입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포로된 천국가족을 구원해 내는 구조대입니다.
이제 공격에 나서면 주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견고한 진은 겉보기에는 굉장해 보이지요. 그러나 막상 교회가 공격에 나서기만 하면 속으로는 벌벌 떨게 되어있습니다. 예수 이름, 성령의능력, 예수의 보혈이라는 이 무기들은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핵폭탄입니다. 일순간에 마귀의 성이 무너집니다.
교회가 어딥니까? 셀이 교회 아닙니까? 그 셀교회가 세상의 견고한 진을 향해 나가기만 하면 주께서 도와주십니다. 이 고성능 무기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 이름으로 복음 무기 들고 나가기만 하면 음부의 문들은 열릴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앞에 지옥의 문들이 부수어집니다. 보혈의 능력 앞에 견고한 진들이 보기 좋게 무너질 것입니다.
교회는 지옥의 대문을 깨뜨리는 주님의 군대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부수는 이 땅의 정복자들입니다.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