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의 승리자  (딤후4:6-8)

마지막金 태권도 문대성 선수의 신앙 승리…“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십자가 군병들의 ‘여호와 닛시’는 대회 마지막날까지도 계속됐다.‘다윗 청년’ 문 대성(28·시화안디옥교회) 선수는 폐막 직전 열린 태권도 80㎏ 이상급 결승전서 통쾌한 KO승을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대회 초반에 유도의 이 원희 선수가 첫 금메달을 따내면서 그는 한판승은 온 힘, 온 마음, 온 기술, 이외의 온 몸과 마음의 전부를 쏟아야만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한판 승으로 첫 금메달을 딴 후‘감사기도 세리머니’는 문 선수에 의해 화려하게 피날레를 장식했다.

문 선수의 이날 쾌거는 기도의 응답이었다. 그는 경기에 앞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하나님, 제 몸이 성치 않습니다. 장기전으로 가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방에 끝나게 힘을 모아 주세요.” 문 선수는 왼쪽 다리와 손목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만약 상대 선수가 그것을 눈치채고 장기전을 펼칠 경우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1회전 중반 상대의 오른발 앞차기가 들어오는 순간 문 선수는 몸을 띄워 180도 회전하면서 왼발을 쭉 뻗어 뒤 후리기를 시도했다. 그것으로 상황 끝. 골리앗처럼 거대한 상대선수는 고목처럼 함몰했다. 통쾌한 KO승. 문 선수는 승리의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놀라운 기도 응답에 놀란 것이다. 일단 무릎을 꿇고 두손 모아 기도를 드렸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돈 후 두 팔을 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의 인터뷰는 온통 신앙간증이었다. “결승전에 앞서 평소보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 동안 기도해준 부모님과 성도 님들, 그리고 모든 국민께 감사한다.”그는 올림픽  기간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성경 말씀을 늘 묵상했다. 결승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했을 때는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를 묵상하며 힘을 충전했다. 기독 선수들 사이에서는 ‘듬직한 기도꾼’으로 통한다. 항상 겸손하고 공손한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헬라어에는 "때(시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입니다. 과거(past), 현재(present), 미래(future)가 있는 보통 시간을 말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 밤 24시간의 하루, 365일의 일년…의 흐름을 말합니다. 이 크로노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으로 오고, 같은 시간으로 갑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특별한 시간이고 하나님이 간섭하는 시간입니다. 의미 있고, 감격과 슬픔이 있고 가능성이 담겨 있고, 긴장미가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평범하게 지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특별한 사건의 시간입니다. 출생한 시간, 세례 받은 시간, 은혜 받은 시간, 능력 받은 시간, 감격한 시간, 졸업, 결혼… 등 어떤 일을 완성하고 성취한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날(kairos)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세계에서 태어나 시간 속에서 숨쉬고, 시간 안에서 날마다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짧은 세월의 70인생, 강건하면 80인 인생(시90:10)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생각해 보시며 사시는지요? 오늘, 어떤 날로 보내시렵니까? 평범하게 의미 없이 지내시렵니까? 바울은

1.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습니다(7).

사도 바울은 일평생을 살면서 예수 님을 만난 후에 평범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냥 선한 싸움을 싸운 것도 아니고 "잘 싸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은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며, 어느 때나 전쟁 없는 시대가 없습니다. 욥은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욥7:1)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전쟁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싸우며 사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543장 4절에 보면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해서 우리 신앙의 싸움이란 끊임없이 주님이 우리 위해서 예비한 천국을 향해서 우리가 투쟁해 나가는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순간부터 육적, 영적 싸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영적 전쟁을 치르지 않는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냐 마귀와 세상 유혹을 따를 것이냐 이와 같은 마음에 갈등,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들어오므로 선과 악의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거리낌없이 죄와 육신의 정욕과 세상과 마귀를 따라갔으나 이제는 예수 님이 들어와 계시므로 이제는 끊임없는 육신의 정욕과 세상과 마귀와 싸우고 넘어지면 또 자빠지면서 상처를 비비고 일어나서 예수 님을 따라가는 이러한 투쟁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다시 세상과 마귀의 권세로 끌어가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도전하고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끝없는 투쟁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평생토록 싸웠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 싸움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 왕과 싸워서 바로 왕에서 해방을 쟁취하고 나와야 되었습니다. 그리고 홍해수가에 왔을 때는 홍해 바다가 앞을 가로막고 바로가 대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또 사로잡으러 오매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과 몸부림의 싸움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를 건너와서는 광야에 자연과 싸워야 되었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바람 붑니다, 해는 뜨겁습니다, 쉴 곳은 없습니다, 양식은 부족합니다. 그들은 자연과 싸워야 했습니다. 아말렉 전투가 있었습니다. 또 가나안 땅에 들어 올 때도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미리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일곱 족속과 싸움을 해서 한발자국한발자국 점령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신명기 7장 1절로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원수들이 많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되고 세상 유혹과 싸워야 되고 세상 살면서 느끼는 신앙생활의 갈등, 식어져 가는 신앙심과 싸워야 되고 핍박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야 살아 남습니다. 예수 님을 믿고 천국 가는 목표는 고상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어떠한 목표보다도 가장 고상한 것이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목표가 고상할 수록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험하고 원수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도 목표가 낮으면 싸움도 없지요. 고상한 목표를 두고 나아가려면 경쟁도 많고 싸움도 많고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 되지 않습니까? 천국 가는 길 어떻게 험난한 싸움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려고 할 때 끊임없는 육체와 마귀와 세상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생활이라는 것은 끝없는 싸움입니다. 믿기 전에는 마귀와 세상과 육체가 도전은 안 했지만 예수 님이 들어오자 마귀와 세상과 육체가 끊임없이 도전을 하니까 늘 씨름을 해야 됩니다. 싸우고 있다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안 싸우면 죽었다는 증거지요. 그러므로 매일 싸우십시오. 매일 싸우고 매일 회개하고 매일 울고 그것이 살아있는 증거고 그로 말미암아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매일매일 신앙이 정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내가 선한 싸움을 평생토록 싸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편에 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는지"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내걸고 싸우는 것 같지만 인간적인 힘으로 싸우다가 지쳐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범사에 예수 님 편에 서서 "말에나 일에나 다"(골3:17) 예수 님 이름으로 하다가 얼마 못 가서 예수 님 이름은 잊어버리고 자기욕심의 싸움만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과 교회를 피하고, 선한 싸움에 눈을 감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보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기지 못하면 패합니다. 질병의 싸움에서 패하면 육이 죽고, 경제적인 싸움에서 패하면 가난이 옵니다. 영적 싸움에서 패하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반드시 싸워 승리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16절"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 보혜사는 여러분 예수 믿을 때 시작한 성령께서 지금도 같이 계시고 천당 갈 때까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늘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라고 되어있으니 연약하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도우심만 구하면 연약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기도 못 한다구요.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말씀 못 읽는 다구요.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전도 못 한다구요.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도우미가 있으니까 도움을 청하십시오.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면 우리 신앙이 식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열심히 기도도 해야 되고, 그리고 열심히 일도 해야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육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롬7:24-8:6)

믿음의 선한 싸움은 싸움 중 가장 긴 싸움입니다. 다른 싸움은 챔피언이 될 때까지, 챔피언의 자리를 지킬 동안만 싸우면 됩니다.(유명우 권투선수, 17차 방어, 시합 때마다 18kg 감량) 그러나 믿음의 선한 싸움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날까지, 더 쉽게 말해서 죽을 때까지 평생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달려갈 길을 마치고(7)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함은 '그의 맡은 일을 다하였다'는 뜻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름 받아 사도가 된 바울은 그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고, 계속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아테네 마라톤에서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1위로 달리던 브라질 선수를 잡았습니다. 그는 동상을 받았지만 그는 훌륭한 선수이었습니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입니다. 왜? 인생 길의 경주이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천천히 걸어갈 수 없고 달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남보다 좀더 일찍 일어나고 더 열심히 일하고 늦게 까지 뛰고 이래야 남보다 좀더 잘살 수 있지요. 내가 다 놀고 내 할일 다하고 게으름 피우다가 나가서 경쟁에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개인도 달려야 하고 국민도 국가도 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경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출발하여 뛰어서 홍해로 나오고 홍해에서 또 광야로 뛰어가고 광야에서 그들은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과 싸우면서 가데스 바네아까지 와서 그 다음 가나안까지 달려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 많은 낙오자들이 생겼습니다. 불순종과 불 신앙과 거역함이 낙오자를 만들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1981년 사택에서 시작해서 그때부터 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쥔 것 없이 맨발벗고 뛰기 시작한 것이 1982년 현재 식당으로 사용하는 곳으로 왔고 1986년 본 교회 교육관으로 왔고 1989년도 본당으로 왔고 그리고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러시아 일본 미국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 필리핀으로 전 세계로 숨가쁘게 달려왔고 지금도 우리가 달리고 있습니다.

달리는 것을 그치면 그때로부터 후퇴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로 14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신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쫓아가는 것입니다. 쫓아가는 것을 쉬면 안됩니다. 푯대를 향하여 우리가 출발했으면 끊임없이 달음박질해야지요. 개인 신앙생활도 영적인 달음박질입니다. 신앙이 매일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야지 주저앉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 우리는 결코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달음질하고 성경 읽기로 달음질하고 전도로 달음질하고 봉사와 헌신으로 달음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뛰기를 그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뛰어서 경쟁에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뛰어야지 뒤를 돌아보고 낙오하고 주저앉으면 버림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택해서 하늘나라를 주실려고 부르셨으니 우리는 부르신 부르심을 향해서 힘들어도 가야되고 울면서 가야되고 고통 당하면서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골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은 잊어버리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버려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으뜸이 되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잊었습니다. 버렸습니다. 복음을 위하여서는 가는 곳마다 멸시천대를 받았고,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를 세우며 수많은 병자를 고친, 수많은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멸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자랑거리나 공적들(수고하고 애쓴 시간들)을 잊지 않고는 달려갈 길을 다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고백하며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저 높은 곳을 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려야 하지만 잊기 어려운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과거에 지은 죄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회개했다면 용서받은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으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과거의 공로라고 합니다. "나 옛날에 대단했어. 나도 다 해봤어"라는 공적을 잊기 어렵다고 합니다. 셋째는 과거의 신분을 못 잊는다고 합니다. "나 왕년에 이랬던 사람이야. 나 이런 사람이었어"라는 것을 잊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한 선행도 귀하게 여기시지만 지금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바울은 맡은 일을 다하는 달음질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다하는 삶이 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주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교회에서 맡은 바 사명에 얼마나 충성하십니까? 얼마나 달려갈 길을 잘 달렸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사로서, 구역 장으로서, 안내위원, 예배위원으로서, 장로나 집사로서… 잘했다고 자부할 수 있으십니까? 혹시 도중에 중단하지는 않으셨습니까?

3. 믿음을 지켰으니(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끝까지 간수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그 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밟고 난 다음에 그만 그 땅을 못 지키고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세상과 마귀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도달했으면 우리가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세상과 마귀와 타협하지 말고 나아가야지 세상과 마귀와 타협해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세상이 꽉 들어오게 되면 그로써 우리는 버림을 당코 말게 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한 기독교 세계를 보십시오. 구라파는 기독교 문화만 남고 신앙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를 구라파는 기독교 국가라고 했는데 과거에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모든 것에 기독교의 형식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 면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님을 믿느냐. 믿지 않습니다. 영국국민60%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안는 다고 답했습니다. 미국이 급속히 세속화하고 있어서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미국 엘라바마주 법원 청사에 십계명 돌판이 있었습니다. 예수 님을 잘 믿을 때 그들은 십계명 돌 판을 해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치열한 논란 끝에 철거했습니다. 연방 대법원은 1980년 공립학교 교실 벽에 십계명을 달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국가로 출발한 미국이 얼마나 타락하고 세속화되었든지 이제는 연방법원 안에 세운 십계명 돌 판도 철거하라. 학교에 십계명을 걸어 놓은 것도 철거하라.

캐네디 대통령 재직 때인 1963년에 대법원이 국립학교에서 성경교육할 수 없다고 판결한 이후 30년간 국가적으로 얼마나 표류했든지 폭력 범죄가 560% 상승했고, 사생아가 400% 증가하고, 결손가정 아동이 3배가 늘고, 10대 자살은 200% 늘고, 대학입학시험 성적은 80%가 하락했다고 미국 전 교육부 장관 윌리엄 베넷이 책에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인생은 자기를 버리고 사회를 버리고 국가를 버리고 내리막길 인생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도 점점 형식화되고 식어져 가고 있어서 큰 걱정입니다. 우리 한국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치를 잘했습니까? 경제를 잘 운영했습니까? 국민이 잘 단결해서 살아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혼란과 혼돈 속에 살았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나라에 복을 주셔서 우리 국민의 25% 이상이 예수를 믿고 주님 안에 들어와서 1,200만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주님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나라에 오늘날처럼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한 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이제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하게 되고 그렇게 열심 있던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나 모임이나 이런 것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이상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승리한 후에 이제 평화를 지키는 것에 더 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라크하고 전쟁할 때 죽은 사람보다 전쟁에 이기고 난 다음 이라크를 평정하기 위해서 지키는데 오늘날 미국 병사가 더 많이 죽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도 이기고 난 다음에 평정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믿고 난 다음에 믿음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든 것입니다. 뜨겁게 시작했다가 나중에 물거품 같이 꺼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1절로 12절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뜨겁게 지키기 위해서는 성령 님 하늘의 도움을 멀리하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도 도움을 바라면 도우미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파트 당첨을 해도 아파트 도우미들이 도와주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의 도우미가 계십니다. 성령인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 내가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구해야 우리의 마음이 식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보배는 얻기가 어렵고, 얻은 후에는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6~7)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졌다면 잘 간직하며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유혹해 와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궁핍이 와도 믿음을 지켰고, 성공과 실패와 훼방과 투옥이 와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질병과 죽음 속에서도 그는 믿음을 지키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되면 믿음을 지키고, 안되면 믿음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잘 안되면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잘 되면 믿음을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일터도 지켜야 합니다. 건강도 지켜야 하고 재산과 명예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헛된 지킴이 됩니다. 믿음을 지키면 다 지켜주심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지, 내가 지킨다고 됩니까. 여러분이 자물통을 여러 개 채워 놓아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어떤 시련과 풍파가 닥쳐도 여러분의 믿음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 지키려고 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1.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2.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3. 너 쓸 것 미리 아시고 주 너를 지키리 구하는 것을 주시며 주 너를 지키리 4. 어려운 시험 당해도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후렴)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너를). 아멘. 여러분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범사를 맡기며 사시기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8).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 우리의 종말에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이긴 자에게 주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서 우리가 끊임없이 살아가면 종국에는 면류관을 받습니다. 고린도 전서 9장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황영조 선수가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42.195km를 달릴 때 32km 지점에서 너무 힘이 들어 그냥 포기하려고 작정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너무나 힘들어서 아주 달려오는 택시에 뛰어 들어가서 자살을 해보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뛴 이유는 금메달을 따서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어서 그는 이를 깨물고 달린 결과에 금메달을 땄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포기하고 싶지만 고대하고 있는 어머니를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그래서 끝까지 뛰어서 면류관을 땄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끝까지 충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강림을 항상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다고 말한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 우리가 다 의의 면류관을 써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로 4절에 "맡기 운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 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또 생명의 면류관도 있어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요한계시록 4장 4절에는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여러분 우리는 의의 면류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 금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하나님께 면류관을 받고 하늘의 해와 같이 별과 같이 빛난 우리의 삶을 살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다 바울 사도처럼 영적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시작한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써 달리며 낙오하지 말고 주님이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힘써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는 그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착하고 충성된 종아~”. 일평생을 아프리카에서 고난을 당하며 선교한 선교사 부부가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하는데 뉴욕항구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이고 큰 악기들이 팡파레를 울리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노부부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 배를 같이 타고온 린도 버거라는 비행사를 위해서 그렇게 야단들이었습니다. 린도 버거는 처음으로 단발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불란서에 도착한 사람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뉴욕시민이 다 출동을 하고 나팔을 불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내려보니까 자기를 맞으러 온 아무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3등 여관에 들어가서 짐을 풀어놓고 일생에 선교 사역을 하다가 지친 그 몸을 가지고서 침대에 걸터 엎드려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하나님! 린도 버거라는 젊은 사람은 비행기 운전해서 대서양 건너갔다고 저렇게 팡파레를 울리고 환영을 하는데 우리는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선교하고 고향 땅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마중하는 사람이 없고 이렇게 쓸쓸할 수가 있습니까?’하면서 우니까 성령이 말씀했습니다. '린도 버거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너희들은 아직 고향에 안 돌아오지 않았느냐? 너희는 아직 객지에 있지 않느냐? 이 땅에 고향이 어디 있느냐? 너희 영원한 고향은 천국 아니냐? 너희도 고향에 돌아오는 그 날에는 천군, 천사들이 와서 나팔을 불고 팡파레를 울리고 하나님의 환영의 퍼레이드가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참고 견뎌라!’우리도 고향에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서 이미 환영 아치를 세워 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십시오. 의의 면류관이 여러분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버릴 것을 버렸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늘"을 그냥 지나가는 한 날(크로노스)로 보내시렵니까? 아니면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날(카이로스)로 사도 바울처럼 "나는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웠으며, 달려 갈 길을 다 갔고, 믿음을 끝까지 지켰노라"고 고백하며 살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예수 님이 피 흘리셨고, 누구든지 그 예수 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복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받은 복, 우리가 가진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바울도 상 받는 것을 위하여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 믿음을 잘 지키다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의 상을 받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 상 받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원영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