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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달아보시는 하나님! (단5:17-28)
단1-4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단5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런 그도 B.C 532년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바벨론 역사는 539년 메데와 바사에 의해 멸망당하고 끝장이 났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에윌 모르닥'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력한 지도자가 죽으면 정치적 혼란기가 뒤따르게 됩니다. '에윌 모르닥'은 2년간 통치 후 느부갓네살의 사위인 '네르갈 사레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도 왕권을 잡고 4년간 통치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를 이어 정신박약아인 그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이 왕이 되었으나, 그는 두 달만에 느부갓네살 왕의 또 다른 아들인 '나보니더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나보니더스'는 느부갓네살 치하에서 누렸던 바벨론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재위 17년 중 거이 바벨론에 살지 않고 정복전쟁을 위해 원정을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아들 벨사살을 섭정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또 본문에서 느부갓네살 왕을 그의 부친이라고 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영광과 권세를 대표하며 또한 벨사살의 선조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바벨론은 아직도 강력하게 보였습니다. 벨사살 왕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하여 20년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수도는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둘러 쌓인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도시 주위에는 높이 10.6m, 폭 2.6m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이 벽 안쪽으로 800m떨어져 똑같은 높이의 성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 벽 사이에는 78Km의 기름진 땅이 있어서 적이 도시를 포위할 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외벽 바깥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9m깊이의 수로가 벽 주위를 따라 파여져 있었습니다.
수도의 물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항상 풍부했습니다. 또 바벨론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어 체제로 인해 바벨론 제국은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습니다. 그 어떤 막강한 적도 감히 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올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항상 적은 내부에 있는 법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영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 뿌리로부터 썩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보니더스' 왕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먼 나라로 원정을 간 사이에 바벨론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을 격파하고 성를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적군이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넘어올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방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바벨론 역사상 가장 거창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 천명을 초대하였습니다. 잔치에 왕후들과 빈궁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잔치 분위기가 얼마나 음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심과 방탕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벨사살 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본성과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탈무드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술이 언제부터 나옵니까? 노아 때 나오지요? 노아가 홍수 뒤에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하루는 노아가 낮잠을 자는데 악한 마귀가 와서 노아가 가꾼 포도원에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먼저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 사자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 돼지 피를 뿌리고, 제일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들의 피를 거름으로 해서 포도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양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사람이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면 양순해지고 차분해집니다. 그러다가 세 잔 네 잔 들어가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십니다. 사자처럼 무서운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성전에서 쓰는 금 은 그릇을 가져다가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돼지 피를 뿌렸기 때문에 더 마시면 돼지처럼 미련해집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원숭이가 별별 해괴한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술이 꼭지까지 취하면 전봇대를 붙들고 씨름을 하지 않나, 아무데나 싸지 않나, 별별 희한한 짓을 다 합니다.
잠20:1절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성경을 보면 술 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의 막내아들을 저주하는 죄를 졌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절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때에'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 째 치리자로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지만 그 해석을 왕에게 알게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은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10절에 보면, 바로 이때 태후가 들어와서 왕에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가 다니엘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니엘을 영적인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세 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17절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을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엄청난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해석을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예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명보다 상급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상급에 따라 사명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 한 분을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의 존재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다 글자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18-21절에서 벨사살 왕의 선친 느부갓네살 왕의 사건을 상기시키므로 역사적인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를 근거로 그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벨사살 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출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정없이 낮추어 정신병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나 그 영광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도 쫓겨나서 짐승과 같이 매여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겸손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고 우러러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철저히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고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더 큰 악을 행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교만을 책망한 후 글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5절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들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①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세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메네'라는 말은 '세다, 혹은 계수 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메네 메네' 즉, 하나님은 '세고 또 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눅12:7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시56:8절에서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을 세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는 바벨론의 죄악상들을 세셨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들을 세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9:3절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했고, 욥14:16절에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고 세신다는 사실입니다.
시90:12절에서 모세는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고,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쁘지 않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바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 순위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한사람 한사람의 시간 사용을 계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메네 메네' 세고 또 세시는 주님이십니다.
②주님은 우리의 신앙의 인격을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데겔'이라는 뜻은 '무게를 잰다, 저울에 단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달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미달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벨사살 왕의 일생이 하나님의 저울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 결과 '함량미달'로 판결이 나왔습니다. 즉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시고 믿음의 분량을 재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함량미달'이 아닌 '차고 넘치는' 믿음의 분량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믿/
③'우 바르신' 즉 '나누었다'라는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 바르신'이라는 말에서 '우'는 AND(그리고)의 뜻이고, '바르신'은 '베레스'라는 말의 복수형인데 '나누다, 가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너의 일생을 세고 세어서 달아보니 기준에 미달이 되어 왕의 날수가 다하였고 나라도 빼앗겨 나뉘어 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벨사살 왕의 죄악상을 낱낱이 세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가장 겸손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교만을 택했습니다.
오히려 금, 은, 동, 목석으로 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대치하면서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목이 베어지고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나뉘어 져서 메데 파사 사람에게로 넘어가 찬란했던 바벨론은 그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경고하신 말씀처럼, 성경은 지금도 오늘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9: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계21: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뿐만 아니라, 벧후3: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처럼 시대나 환경이나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개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어보십니다.
사람들의 평가에서 A학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가 F학점이 나오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의 저울에서는 무게가 나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무엇입니까?
①인생의 삶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평가합니다.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②인생들의 믿음을 보고 평가합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롬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은 들음으로 생기고 그 들음은 예배를 통해서 듣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들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능력이 되고 확신이 옵니다.
③인생의 열매로 평가하십니다.
마7:18-20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5: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은 벨사살 왕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셨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가 존경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공정하신 저울 앞에는 그는 왕으로로서 부족한 행동이 드러났습니다.
렘17:10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삼상2:3절에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은 후에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창22: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22:16-18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그를 달아보신 후(시험 후)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은 그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1. 인간의 죄악을 달아보십니다.
죄악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의 기준도 인간의 '강포함'입니다. 창6: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특별히 벨사살 왕의 죄는?
①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죄입니다.
그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고 완악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미쳐서 들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비와 이슬을 맞으며, 머리와 손톱, 발톱이 독수리같이 되었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벨사살 왕은 여전히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잠29: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말씀으로 경고하고 물질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사람을 통해서 징계와 채찍으로 경고하되 돌이키지 않으면 아주 생명을 거둬 버리십니다. (대하36:13-16)
②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찬양한 죄입니다.
23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금, 은 기명에다가 술을 퍼 마시면서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 했습니다.
③교만의 죄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며" 잠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항상 교만을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이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위기이며, 욕을 먹을 때보다 칭찬을 들을 때가 더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④거룩하고 신성한 성물을 욕되게 사용한 죄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두려운 줄을 모르고 자기 부왕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거룩한 금, 은, 기명을 가져다가 술을 퍼 마시고서는,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므로 2중, 3중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몸은 거룩한 성전(고전6:19)이라고 했는데, 그 몸을 음란하게 하거나, 술을 마셔서 술독을 만들거나, 담배를 피워 굴뚝을 만드는 것도 거룩함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심판과 징계를 받습니다. 일주일의 하루!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구별해 바쳐야 복을 받습니다.
내가 번 돈이라도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구별해 바치지 않으면 그 이상의 고통과 손해를 봅니다. 십일조는 여러분! 물질의 축복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기름 부은 종을 함부로 괴롭히면 거룩한 것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⑤쾌락을 즐기다가 망했습니다.
금식을 해도 시원치 않는데, 술 퍼마시며 부정한 쾌락을 즐겼습니다. 술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음란에 취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부정한 짓을 즐기는 쾌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2. 인간의 선행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달아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도 달아보아서 어느 분량이 차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죄 짓는다고 금방 심판이 내리지 않는 것처럼 선행도 금방 축복과 상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어느 분량이 차야 응답과 상급이 내립니다. 기도도 분량이 차야하고, 십일조나 헌금 생활도 정성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삼상2:3절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이 말씀은 한나가 오랫동안 애타게 기도하다가 응답 받고 아들 사무엘을 얻은 뒤에 고백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기도와 구제도 분량이 차야 합니다. 행10장에 고넬료가 항상 기도하고 구제했더니, 천사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눅6:38절에“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며 주께 드리는 행위, 주의 이름으로 남을 돕는 일을 모두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더욱이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는 가장 큰 상급과 축복을 받는 행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3. 인간의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또 "천국 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과 질을 달아보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과부가 엽전 두 냥 바친 것을 제일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여자의 정성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정성은 어떻게 표현될까요?
①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16:7절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식과 가식과 형식과 체면치레는 정성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 중에 하나가 외식과 위선입니다. 그래서 바리세안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②사랑으로 하면 정성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믿음이 있을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열매, 첫 것에 대하여 귀하게 보십니다. 왜? 첫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최선을 다할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찬송도, 기도도, 헌금도, 감사도 정성을 다하여 최선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4.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마16: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시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에 살고 있던 '유다'라는 사람이 선동을 해서 로마를 상대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혁명이 실패함에 따라서 '마리우스'라는 로마의 장군이 군대를 몰고 와서 당시 조그만 갈릴리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 2천 명을 붙잡아 길거리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누구도 로마를 향해서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질 수 있습니까? 그런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진 우리들의 신앙의 무게는 아주 보잘것없을 것입니다.
5. 인생의 진실(성실)성도 달아보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는 책임 있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신의가 있고, 진실성이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가서 한국 교포들에게 강조한 말은 "우리가 미국 땅에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고 취직을 하여 잘살려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의 신의를 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①한국인의 말은 믿을 수가 있다. ②한국인의 가게에 가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③한국 기술자에게는 마음놓고 일을 맡길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인정받아야 타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신의가 따라야 하고, 진실성이 따라야 합니다. 그 진실성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속의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예수를 믿지를 않아서 속이 상했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어 남편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부흥회에 참석을 시켰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결신 시간에 '믿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옆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손을 들라고 성화를 해댔지만 남편은 고집을 부리고 끝내 손을 들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남편에게 화를 내면서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고집이 세냐고 핀잔을 합니다.
아무 소리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오, 그런데도 당신과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소? 내가 화투할 때 당신도 했고, 내가 술에 취할 때 당신도 취했고,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당신도 피웠고, 내가 적당히 속이며 세상을 살아갈 때 당신도 그랬고.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서 굳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싫소" 이 말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은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서 믿음이 나타나고, 진실성이 나타나고, 무게가 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어렵게 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러러 보게 됩니다.
▶철학자 칸트는 아버지의 고향인 폴란드 슐레지엔으로 가던 중 말을 타고 깊은 산길을 가다가 강도 떼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았겼습니다.
"이제 더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하고는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가다가 정신이 나서 보니까 몸 속에 금 덩어리 하나를 숨긴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되돌아가서 강도들에게 "아까는 당신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몸 속에 금 덩어리가 들어 있던 것을 모르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가다가 몸 속에 금 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소. 미처 나도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하고 이제 받으시오." 그러면서 금 덩어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아까 빼앗았던 것 모두 내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강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신실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악해도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고, 거룩은 여전히 거룩이고,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벨사살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시니 진실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을 달아보십니다.
6. 우리의 거룩성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경외하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악해지고 무서워집니다.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경외심도 없고 거룩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를 보세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지 심판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늘을 향한 경외심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염려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두려운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부모도, 스승도, 어른도 이제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늘조차도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죽여도 누구를 죽입니까?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입니다. 죽여도 그냥 죽입니까?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도 한두번 찌르지 않습니다. 죽인 후에는 또 그냥 놔둡니까? 토막을 내서 갖다 버리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 겁이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벨사살도 보세요! 이 사람도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사용되었던 그릇에 감히 술을 부어서 마셨습니다. 그게 보통 그릇입니까?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서 그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그 그릇을 사용할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루었는데 이 사람은 겁도 없이 거기다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그리고 귀인들에게도 돌려 술을 따라 마시게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거룩을 지니지 않고 살게 되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같은 거룩한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저울이 들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방종하지 않고 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우리 모두 함량미달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송수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단1-4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고, 단5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왕입니다. 그런 그도 B.C 532년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바벨론 역사는 539년 메데와 바사에 의해 멸망당하고 끝장이 났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에윌 모르닥'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강력한 지도자가 죽으면 정치적 혼란기가 뒤따르게 됩니다. '에윌 모르닥'은 2년간 통치 후 느부갓네살의 사위인 '네르갈 사레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도 왕권을 잡고 4년간 통치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를 이어 정신박약아인 그의 아들 '라바쉬 마르둑'이 왕이 되었으나, 그는 두 달만에 느부갓네살 왕의 또 다른 아들인 '나보니더스'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나보니더스'는 느부갓네살 치하에서 누렸던 바벨론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재위 17년 중 거이 바벨론에 살지 않고 정복전쟁을 위해 원정을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아들 벨사살을 섭정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또 본문에서 느부갓네살 왕을 그의 부친이라고 한 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영광과 권세를 대표하며 또한 벨사살의 선조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볼 때 바벨론은 아직도 강력하게 보였습니다. 벨사살 왕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요새마다 많은 곡물을 저장하여 20년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수도는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둘러 쌓인 천연적인 요새였습니다. 도시 주위에는 높이 10.6m, 폭 2.6m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고, 이 벽 안쪽으로 800m떨어져 똑같은 높이의 성벽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두 벽 사이에는 78Km의 기름진 땅이 있어서 적이 도시를 포위할 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외벽 바깥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9m깊이의 수로가 벽 주위를 따라 파여져 있었습니다.
수도의 물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항상 풍부했습니다. 또 바벨론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어 체제로 인해 바벨론 제국은 난공불락의 성같이 보였습니다. 그 어떤 막강한 적도 감히 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올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항상 적은 내부에 있는 법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영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 뿌리로부터 썩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메대와 바사가 연합하여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보니더스' 왕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먼 나라로 원정을 간 사이에 바벨론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은 바사의 장군인 고레스의 지휘아래 바벨론에 진격하여 바벨론을 격파하고 성를 포위했습니다. 이제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울 임전태세를 갖추고 깨어 경계를 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벨사살 왕은 큰 잔치를 배설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는 적군이 철통같은 방어망을 뚫고 넘어올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방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바벨론 역사상 가장 거창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중에서 중요한 인물 일 천명을 초대하였습니다. 잔치에 왕후들과 빈궁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 잔치 분위기가 얼마나 음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방심과 방탕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벨사살 왕이 거나하게 취하여 술기운이 오르자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곧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술은 이성의 조절기능을 마비시켜 본성과 본능대로 행하게 만듭니다.
●탈무드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술이 언제부터 나옵니까? 노아 때 나오지요? 노아가 홍수 뒤에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하루는 노아가 낮잠을 자는데 악한 마귀가 와서 노아가 가꾼 포도원에 짐승의 피를 뿌렸습니다. 먼저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 사자의 피를 뿌리고, 그 다음 돼지 피를 뿌리고, 제일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짐승들의 피를 거름으로 해서 포도가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양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사람이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면 양순해지고 차분해집니다. 그러다가 세 잔 네 잔 들어가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십니다. 사자처럼 무서운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벨사살 왕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성전에서 쓰는 금 은 그릇을 가져다가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돼지 피를 뿌렸기 때문에 더 마시면 돼지처럼 미련해집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원숭이 피를 뿌렸습니다. 원숭이가 별별 해괴한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술이 꼭지까지 취하면 전봇대를 붙들고 씨름을 하지 않나, 아무데나 싸지 않나, 별별 희한한 짓을 다 합니다.
잠20:1절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성경을 보면 술 취함으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연회를 배설하였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요사스럽게 춤을 추었습니다. 만취한 헤롯은 그 춤에 매료되어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주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세례요한에게 원한이 사무쳐 있던 그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의인의 무죄한 피를 흘리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도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의인이요 그 시대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던 노아도 포도주에 취해 그의 막내아들을 저주하는 죄를 졌습니다. 술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술 취한 벨사살 왕은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고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위대한 왕도 감히 거룩한 성전 기명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벨사살은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우상숭배는 또 다른 신성 모독죄입니다.
벨사살 왕과 그 귀인들이 잔치를 벌이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때, 이들 앞에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절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그때에'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 째 치리자로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지만 그 해석을 왕에게 알게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은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10절에 보면, 바로 이때 태후가 들어와서 왕에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가 다니엘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니엘을 영적인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세 째 치리자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17절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을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엄청난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해석을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예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명보다 상급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상급에 따라 사명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 한 분을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의 존재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먼저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다 글자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18-21절에서 벨사살 왕의 선친 느부갓네살 왕의 사건을 상기시키므로 역사적인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를 근거로 그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벨사살 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출 수 있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정없이 낮추어 정신병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나 그 영광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도 쫓겨나서 짐승과 같이 매여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하나님의 겸손훈련을 통하여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고 우러러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철저히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고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데 그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더 큰 악을 행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교만을 책망한 후 글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5절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들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①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세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메네'라는 말은 '세다, 혹은 계수 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메네 메네' 즉, 하나님은 '세고 또 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눅12:7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시56:8절에서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을 세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는 바벨론의 죄악상들을 세셨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들을 세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9:3절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했고, 욥14:16절에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고 세신다는 사실입니다.
시90:12절에서 모세는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고,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서로 싸우고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쁘지 않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바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 순위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한사람 한사람의 시간 사용을 계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메네 메네' 세고 또 세시는 주님이십니다.
②주님은 우리의 신앙의 인격을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데겔'이라는 뜻은 '무게를 잰다, 저울에 단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달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미달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벨사살 왕의 일생이 하나님의 저울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 결과 '함량미달'로 판결이 나왔습니다. 즉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하나님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시고 믿음의 분량을 재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함량미달'이 아닌 '차고 넘치는' 믿음의 분량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믿/
③'우 바르신' 즉 '나누었다'라는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 바르신'이라는 말에서 '우'는 AND(그리고)의 뜻이고, '바르신'은 '베레스'라는 말의 복수형인데 '나누다, 가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너의 일생을 세고 세어서 달아보니 기준에 미달이 되어 왕의 날수가 다하였고 나라도 빼앗겨 나뉘어 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벨사살 왕의 죄악상을 낱낱이 세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가장 겸손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교만을 택했습니다.
오히려 금, 은, 동, 목석으로 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대치하면서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목이 베어지고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나뉘어 져서 메데 파사 사람에게로 넘어가 찬란했던 바벨론은 그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경고하신 말씀처럼, 성경은 지금도 오늘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9: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계21: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뿐만 아니라, 벧후3: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처럼 시대나 환경이나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개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어보십니다.
사람들의 평가에서 A학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가 F학점이 나오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의 저울에서는 무게가 나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무엇입니까?
①인생의 삶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평가합니다.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②인생들의 믿음을 보고 평가합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롬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은 들음으로 생기고 그 들음은 예배를 통해서 듣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들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능력이 되고 확신이 옵니다.
③인생의 열매로 평가하십니다.
마7:18-20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5: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은 벨사살 왕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셨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는 그가 존경을 받을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공정하신 저울 앞에는 그는 왕으로로서 부족한 행동이 드러났습니다.
렘17:10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삼상2:3절에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은 후에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창22: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22:16-18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그를 달아보신 후(시험 후)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은 그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1. 인간의 죄악을 달아보십니다.
죄악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의 기준도 인간의 '강포함'입니다. 창6: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특별히 벨사살 왕의 죄는?
①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죄입니다.
그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고 완악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미쳐서 들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비와 이슬을 맞으며, 머리와 손톱, 발톱이 독수리같이 되었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벨사살 왕은 여전히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잠29: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말씀으로 경고하고 물질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사람을 통해서 징계와 채찍으로 경고하되 돌이키지 않으면 아주 생명을 거둬 버리십니다. (대하36:13-16)
②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찬양한 죄입니다.
23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금, 은 기명에다가 술을 퍼 마시면서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 했습니다.
③교만의 죄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며" 잠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항상 교만을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이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위기이며, 욕을 먹을 때보다 칭찬을 들을 때가 더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④거룩하고 신성한 성물을 욕되게 사용한 죄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두려운 줄을 모르고 자기 부왕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거룩한 금, 은, 기명을 가져다가 술을 퍼 마시고서는,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므로 2중, 3중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몸은 거룩한 성전(고전6:19)이라고 했는데, 그 몸을 음란하게 하거나, 술을 마셔서 술독을 만들거나, 담배를 피워 굴뚝을 만드는 것도 거룩함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심판과 징계를 받습니다. 일주일의 하루!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구별해 바쳐야 복을 받습니다.
내가 번 돈이라도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구별해 바치지 않으면 그 이상의 고통과 손해를 봅니다. 십일조는 여러분! 물질의 축복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기름 부은 종을 함부로 괴롭히면 거룩한 것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⑤쾌락을 즐기다가 망했습니다.
금식을 해도 시원치 않는데, 술 퍼마시며 부정한 쾌락을 즐겼습니다. 술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음란에 취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부정한 짓을 즐기는 쾌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2. 인간의 선행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달아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도 달아보아서 어느 분량이 차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죄 짓는다고 금방 심판이 내리지 않는 것처럼 선행도 금방 축복과 상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어느 분량이 차야 응답과 상급이 내립니다. 기도도 분량이 차야하고, 십일조나 헌금 생활도 정성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삼상2:3절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이 말씀은 한나가 오랫동안 애타게 기도하다가 응답 받고 아들 사무엘을 얻은 뒤에 고백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기도와 구제도 분량이 차야 합니다. 행10장에 고넬료가 항상 기도하고 구제했더니, 천사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눅6:38절에“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며 주께 드리는 행위, 주의 이름으로 남을 돕는 일을 모두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더욱이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는 가장 큰 상급과 축복을 받는 행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3. 인간의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또 "천국 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과 질을 달아보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과부가 엽전 두 냥 바친 것을 제일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여자의 정성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정성은 어떻게 표현될까요?
①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16:7절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식과 가식과 형식과 체면치레는 정성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 중에 하나가 외식과 위선입니다. 그래서 바리세안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②사랑으로 하면 정성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믿음이 있을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열매, 첫 것에 대하여 귀하게 보십니다. 왜? 첫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최선을 다할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찬송도, 기도도, 헌금도, 감사도 정성을 다하여 최선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4.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마16: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시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에 살고 있던 '유다'라는 사람이 선동을 해서 로마를 상대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혁명이 실패함에 따라서 '마리우스'라는 로마의 장군이 군대를 몰고 와서 당시 조그만 갈릴리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 2천 명을 붙잡아 길거리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누구도 로마를 향해서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질 수 있습니까? 그런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진 우리들의 신앙의 무게는 아주 보잘것없을 것입니다.
5. 인생의 진실(성실)성도 달아보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는 책임 있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신의가 있고, 진실성이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가서 한국 교포들에게 강조한 말은 "우리가 미국 땅에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고 취직을 하여 잘살려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의 신의를 쌓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①한국인의 말은 믿을 수가 있다. ②한국인의 가게에 가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③한국 기술자에게는 마음놓고 일을 맡길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인정받아야 타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신의가 따라야 하고, 진실성이 따라야 합니다. 그 진실성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속의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예수를 믿지를 않아서 속이 상했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어 남편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서 부흥회에 참석을 시켰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결신 시간에 '믿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옆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손을 들라고 성화를 해댔지만 남편은 고집을 부리고 끝내 손을 들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남편에게 화를 내면서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고집이 세냐고 핀잔을 합니다.
아무 소리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오, 그런데도 당신과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소? 내가 화투할 때 당신도 했고, 내가 술에 취할 때 당신도 취했고,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당신도 피웠고, 내가 적당히 속이며 세상을 살아갈 때 당신도 그랬고.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서 굳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싫소" 이 말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은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서 믿음이 나타나고, 진실성이 나타나고, 무게가 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어렵게 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러러 보게 됩니다.
▶철학자 칸트는 아버지의 고향인 폴란드 슐레지엔으로 가던 중 말을 타고 깊은 산길을 가다가 강도 떼를 만나 가진 것 다 빼았겼습니다.
"이제 더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하고는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가다가 정신이 나서 보니까 몸 속에 금 덩어리 하나를 숨긴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되돌아가서 강도들에게 "아까는 당신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몸 속에 금 덩어리가 들어 있던 것을 모르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가다가 몸 속에 금 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소. 미처 나도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하고 이제 받으시오." 그러면서 금 덩어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아까 빼앗았던 것 모두 내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강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신실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악해도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고, 거룩은 여전히 거룩이고,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벨사살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시니 진실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을 달아보십니다.
6. 우리의 거룩성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경외하는 것이 '거룩성'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악해지고 무서워집니다.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경외심도 없고 거룩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를 보세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지 심판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늘을 향한 경외심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염려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두려운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부모도, 스승도, 어른도 이제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늘조차도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죽여도 누구를 죽입니까?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입니다. 죽여도 그냥 죽입니까?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도 한두번 찌르지 않습니다. 죽인 후에는 또 그냥 놔둡니까? 토막을 내서 갖다 버리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무서운 세상에, 겁이 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벨사살도 보세요! 이 사람도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사용되었던 그릇에 감히 술을 부어서 마셨습니다. 그게 보통 그릇입니까?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서 그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그 그릇을 사용할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루었는데 이 사람은 겁도 없이 거기다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그리고 귀인들에게도 돌려 술을 따라 마시게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거룩을 지니지 않고 살게 되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같은 거룩한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저울이 들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방종하지 않고 바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우리 모두 함량미달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송수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