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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시 80:8~12, 요 15:1~5)
영성가 토마스 머튼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그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가지가 되었다는 정체성이야말로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 정체성이 참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되지 않는다는 약속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가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가지가 되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가지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지인 우리를 통하여 나무인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책은 브레넌 매닝의 ‘그대 주님을 따르려거든’( The Signature of Jesus)이란 책입니다. 신학과 신앙을 오가며 삶을 정리한 좋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오늘 아주 특별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나는 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자조적인 고백을 합니다. 이해가 되는 대목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대목입니다. 무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나누는 일은 잘 하지만 합치는 일에는 서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도 간격이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빈부간의 격차도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보혁간의 갈등도 그 골이 점점 깊어집니다. 각 집단의 편가르기도 지도자의 주도 아래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이라 씀은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포도는 성지에서 보리, 올리브와 더불어 가장 친숙한 농작물입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원의 노래라고 이름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포도밭에 심고, 포도주를 짤 틀을 만들고, 좋은 열매를 기다렸는데 이 포도나무가 들 포도를 맺었다고 책망하고 한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죄악을 뜻합니다.
시편 80:8에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여 가나안에 옮겨놓으신 역사적 사실을 말합니다. 그 가지가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바다까지 뻗었다고 합니다. 강성한 가지는 나무 때문입니다. 가지가 튼튼하려면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가장 친밀한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친밀한 이미지를 보여주시는 완벽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이다”라고 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의 마지막 일곱 번째는 “나는 포도나무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참 의미를 알고 포도나무의 비밀을 캐고 열매 맺는 가지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입니다.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신비로운 관계와 놀라운 연합을 포도나무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서로 필요한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연합은 상대를 살피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 연합은 상대가 바뀌기를 요구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진정한 연합은 나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내가 가지인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 편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내 편의 문제로 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또 예수님은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십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나무와 가지는 서로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관계입니다. 그 안에는 거룩한 교제가 있습니다. 둘은 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없다면 크리스천은 무력하다. 크리스천이 없다면 예수는 무력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4절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단단히 붙드는 것은 동시에 단단히 붙들린데 대한 강한 감동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붙들려 있음으로써 만족합니다. 그 안에 붙들려 있음으로써 자유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아름다움 삶인지 모릅니다.
로마서 11:17-24에는 감람나무 접목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접목으로 해석합니다. 원감람나무인 유대인에게 접붙인 돌감람나무인 믿게 된 이방인을 말합니다. 여기에 꺾인 가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타락한 유대인을 말합니다. 접붙임은 원래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가 중요합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비로소 가지가 되고 그 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꺾이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시들어 말라버리고 맙니다.
나무의 뿌리는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고 나무를 지탱합니다. 얼마 전 바닷가에 가서 야자수가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이 없을텐데 야자수들이 잘 자라 있습니다. 한 야자수는 완전히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기울어진데다 망으로 만든 그네를 매달아 놓았습니다. 저와 아내 두 사람이 같이 그네를 타고 흔들어도 나무가 끄떡도 없어요. 얼마나 뿌리가 깊고 든든하면 그렇겠습니까? 잎은 엽록소를 가지고 영양분을 만들고 공급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가지가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 나무의 잎도, 열매도 가집니다. 나무는 각자의 교류와 작용을 통하여 살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 때문에 살고, 나무 때문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지는 열매를 맺는다는 기능보다 우선 나무에 붙어 있다는 본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이루었느냐 보다 어디에 붙어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태풍이 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해에도 여러 번의 강하고 약한 태풍이 옵니다. 올해는 경제도 어려운데 태풍이 비켜갔으면 좋겠습니다. 태풍에 보면 아주 큰 나무의 가지도 꺾이고, 심지어는 큰 나무가 뿌리 채 뽑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넘어진 나무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 큰 나무가 뿌리가 빈약한 것입니다. 약한 가지는 꺾이지만 센 가지는 더욱 견고히 나무에 붙어있습니다. 가지는 꺾이면 버리는 것 외에 도리가 없습니다.
1971년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빌딩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만 퇴계로에 있는 대연각에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큰 불이 났습니다. 저는 그 때 수도경비사령부의 헌병 졸병이었습니다. 밤새 헌병들이 야간 근무를 마치고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비상이 걸렸습니다. 화재 현장으로 출동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잠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온 종일 현장에서 거리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텔의 투숙객들이 옥상으로 피신하고 헬리콥터가 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다가 공중에서 그만 밧줄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의 몸이 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고 매달려 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의 소리였습니다. 그 줄은 생명줄입니다.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다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것 이상으로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9에는 너무 서글픈 이야기가 나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가지가 스스로 나무를 떠나서 갔습니다. 가지가 스스로 나무를 버리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그 가지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재미있어도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절대로 주님의 손을 놓지 말고 꼭 잡고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가지, 열매 맺는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가운데 참 은혜로운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께 우리의 손을 꼭 잡아 달라고 부탁하세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잡았던 그 손을 절대로 놓지 말고 단단히 잡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포도나무의 목적은 과실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2절에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여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느니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는 것이 존재 목적이며 가치입니다. 포도나무는 목재용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관상용이 아닙니다. 포도를 맺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열매 없는 가지는 가지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한 것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쓸모없습니다. 완전히 용도폐기처분된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포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7:18에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19절을 보세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0절에는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들을 말합니다. 야고보도 야고보서 3:12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라고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하여 버린다고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케 합니다. 가지의 운명을 두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으면 깨끗하게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예 잘라서 불에 태워버립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를 깨끗케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전지하고, 다듬어 주는 것입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쓸데없는 것을 없이하고 다듬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지치기를 잊지 마세요.
‘야베스의 기도’를 쓴 브루스 윌킨슨은 그의 책 ‘포도나무의 비밀’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의 길이와 그 정도와 깊이는 다양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지를 쳐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찍어 불에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난 부분들을 치고 깎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일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희망이 없으면 아예 찍어 불에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가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열매를 통하여 우리의 됨됨이를 압니다. 열매를 통하여 우리의 일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열거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 열매는 하나하나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의 열매는 여럿이 알알이 맺힙니다. 전체는 한 송이이지만 하나하나의 포도알이 귀한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가 알알이 영글고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맺히는 열매가 많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열매가 풍성하면 나무가 기뻐합니다. 우리의 열매가 풍성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우리의 제일 되는 삶의 목적이 성취됩니다.
사막의 수도사 카를로 카레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와 노를 주시지만 대신 ‘노를 젓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직접 열매를 맺지 않으십니다. 나무는 가지를 제쳐두고 직접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모든 공급은 내가 할게, 열매는 네가 맺어라”.
셋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과실을 맺습니다.
5절에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까닭은 열매 맺기 위한 절대 조건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땅에 내리지 않고, 수분을 공급해주지 않고, 영양분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나무의 수고가 없으면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것도 나의 공이 아닙니다. 내가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열매도 없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불교를 믿는 사람만도 못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자선을 잘 합니다. 죽을 때 엄청난 재산도 헌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이런 것 때문에 기가 죽지 마세요. 부러워하지 마세요. 불교에서는 다 자신의 다음 생을 위하여 미리 바쳐놓은 것입니다. 환생할 때를 위한 투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선은 열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리 큰 자선도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묵상’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의 모든 자선행위는 들 감람나무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일이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육신의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행할 수 없습니다. 영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육신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의 열매는 육신으로 맺지 못하고 영으로만 맺는 것입니다. 주님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보장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비로소 영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내가 열매를 맺어갑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일체가 되는 것이 열매를 맺는 삶의 조건입니다. 이런 하나됨의 신비가 곧 열매입니다. 여기서 전도, 봉사, 묵상, 기도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오래 전,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구원받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가 없음을 꼬집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열매 없음을 그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우연하게 천안 명물 호두과자를 만드신 심복순권사님과 함께 식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제는 천안의 명물이 아니라 한국의 명물 가운데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권사님은 올해 연세가 90세입니다. 그분이 1987년 작고하신 그의 부군인 조귀금선생님과 함께 호두과자를 만들기 시작한 때가 1934년이었습니다. 올해로 호두과자가 70년이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맛있고 영양가 있는 과자를 만들기 위하여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돈을 벌게 되셨는데 30년 전부터 권사님은 교회 개척의 꿈을 가지고 개척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얼마 전 권사님은 12번째 교회를 개척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그 분의 사업과 선교 열정을 기리기 위하여 호서대학교에서는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최근에 개척한 교회가 ‘열매 맺는 교회’입니다. 호두과자와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지금 권사님은 열매 맺는 교회에 출석하십니다. 권사님의 평생의 길은 오직 외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이고, 호두과자의 길입니다. 권사님을 통하여 도움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권사님은 평생 두 가지밖에 모르십니다. 예수님과 호두과자입니다. 호두과자 속에 있는 광고 전단지도 펴보면 광고지가 아니라 전도지입니다. 지금도 매일 호두과자를 수천 개, 수만 개를 만드시고, 지금도 매일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우리교회 고등부가 목천의 사랑의 집짓기 현장에 가서 봉사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건축자들 중에 ‘해비타트’라는 단체를 창설한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해비타트를 창설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모든 사람이 인격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땅에 남기는 모든 것이 열매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열매로 이 땅에 남게 됩니다.
결론
병적일 정도로 깔끔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원만 해도 10에이커나 되는 큰 저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에이커면 약 12,000평정도 되는 넓은 땅입니다. 그는 길고 구불구불한 차도와 집 입구에 있는 흉측하게 죽은 나무 가지를 자르고 싶었습니다. 용역회사에 알아봤더니 5,000달러의 견적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놀라서 전기톱을 빌려와 몇 주 동안 주말마다 가지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역회사에 전화하였습니다. “이제 얼마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습니다. 10,000달러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그 낮은 가지들을 활용해 더 높은 가지를 자를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값비싼 특수차량을 가져가 작업을 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가지를 자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실 일입니다. 내가 하는 것 아니라 그분께 맡기면 그분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내가 나무의 일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열매를 일기로 적어봅시다. 우리에게 좋은 가지가 무엇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잘라버려야 할 나쁜 가지는 무엇 무엇입니까? 이것을 적는 동안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나쁜 가지들을 제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들은 무엇 무엇입니까?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은 무엇 무엇입니까?
좋은 가지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우리의 농부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영성가 토마스 머튼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그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스스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가지가 되었다는 정체성이야말로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 정체성이 참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되지 않는다는 약속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가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가지가 되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가지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지인 우리를 통하여 나무인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책은 브레넌 매닝의 ‘그대 주님을 따르려거든’( The Signature of Jesus)이란 책입니다. 신학과 신앙을 오가며 삶을 정리한 좋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오늘 아주 특별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나는 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자조적인 고백을 합니다. 이해가 되는 대목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대목입니다. 무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나누는 일은 잘 하지만 합치는 일에는 서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도 간격이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빈부간의 격차도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보혁간의 갈등도 그 골이 점점 깊어집니다. 각 집단의 편가르기도 지도자의 주도 아래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이라 씀은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포도는 성지에서 보리, 올리브와 더불어 가장 친숙한 농작물입니다. 이사야 5장에는 포도원의 노래라고 이름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포도밭에 심고, 포도주를 짤 틀을 만들고, 좋은 열매를 기다렸는데 이 포도나무가 들 포도를 맺었다고 책망하고 한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죄악을 뜻합니다.
시편 80:8에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여 가나안에 옮겨놓으신 역사적 사실을 말합니다. 그 가지가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바다까지 뻗었다고 합니다. 강성한 가지는 나무 때문입니다. 가지가 튼튼하려면 나무가 좋아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가장 친밀한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친밀한 이미지를 보여주시는 완벽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이다”라고 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의 마지막 일곱 번째는 “나는 포도나무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참 의미를 알고 포도나무의 비밀을 캐고 열매 맺는 가지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입니다.
5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신비로운 관계와 놀라운 연합을 포도나무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서로 필요한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연합은 상대를 살피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 연합은 상대가 바뀌기를 요구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진정한 연합은 나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내가 가지인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 편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내 편의 문제로 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또 예수님은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십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나무와 가지는 서로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거룩한 관계입니다. 그 안에는 거룩한 교제가 있습니다. 둘은 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없다면 크리스천은 무력하다. 크리스천이 없다면 예수는 무력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4절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단단히 붙드는 것은 동시에 단단히 붙들린데 대한 강한 감동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붙들려 있음으로써 만족합니다. 그 안에 붙들려 있음으로써 자유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안전하고 아름다움 삶인지 모릅니다.
로마서 11:17-24에는 감람나무 접목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접목으로 해석합니다. 원감람나무인 유대인에게 접붙인 돌감람나무인 믿게 된 이방인을 말합니다. 여기에 꺾인 가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타락한 유대인을 말합니다. 접붙임은 원래 나무가 무슨 나무인가가 중요합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비로소 가지가 되고 그 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가지가 꺾이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시들어 말라버리고 맙니다.
나무의 뿌리는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고 나무를 지탱합니다. 얼마 전 바닷가에 가서 야자수가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이 없을텐데 야자수들이 잘 자라 있습니다. 한 야자수는 완전히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기울어진데다 망으로 만든 그네를 매달아 놓았습니다. 저와 아내 두 사람이 같이 그네를 타고 흔들어도 나무가 끄떡도 없어요. 얼마나 뿌리가 깊고 든든하면 그렇겠습니까? 잎은 엽록소를 가지고 영양분을 만들고 공급합니다. 그리고 나무는 가지가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 나무의 잎도, 열매도 가집니다. 나무는 각자의 교류와 작용을 통하여 살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지는 나무 때문에 살고, 나무 때문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지는 열매를 맺는다는 기능보다 우선 나무에 붙어 있다는 본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이루었느냐 보다 어디에 붙어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태풍이 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해에도 여러 번의 강하고 약한 태풍이 옵니다. 올해는 경제도 어려운데 태풍이 비켜갔으면 좋겠습니다. 태풍에 보면 아주 큰 나무의 가지도 꺾이고, 심지어는 큰 나무가 뿌리 채 뽑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넘어진 나무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 큰 나무가 뿌리가 빈약한 것입니다. 약한 가지는 꺾이지만 센 가지는 더욱 견고히 나무에 붙어있습니다. 가지는 꺾이면 버리는 것 외에 도리가 없습니다.
1971년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빌딩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만 퇴계로에 있는 대연각에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큰 불이 났습니다. 저는 그 때 수도경비사령부의 헌병 졸병이었습니다. 밤새 헌병들이 야간 근무를 마치고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비상이 걸렸습니다. 화재 현장으로 출동하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잠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온 종일 현장에서 거리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텔의 투숙객들이 옥상으로 피신하고 헬리콥터가 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다가 공중에서 그만 밧줄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의 몸이 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고 매달려 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의 소리였습니다. 그 줄은 생명줄입니다.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다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것 이상으로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9에는 너무 서글픈 이야기가 나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가지가 스스로 나무를 떠나서 갔습니다. 가지가 스스로 나무를 버리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그 가지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재미있어도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절대로 주님의 손을 놓지 말고 꼭 잡고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가지, 열매 맺는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가운데 참 은혜로운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주님께 우리의 손을 꼭 잡아 달라고 부탁하세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잡았던 그 손을 절대로 놓지 말고 단단히 잡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포도나무의 목적은 과실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2절에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여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느니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는 것이 존재 목적이며 가치입니다. 포도나무는 목재용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관상용이 아닙니다. 포도를 맺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열매 없는 가지는 가지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한 것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쓸모없습니다. 완전히 용도폐기처분된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포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7:18에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19절을 보세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0절에는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들을 말합니다. 야고보도 야고보서 3:12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라고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하여 버린다고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깨끗케 합니다. 가지의 운명을 두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으면 깨끗하게 되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예 잘라서 불에 태워버립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를 깨끗케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전지하고, 다듬어 주는 것입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쓸데없는 것을 없이하고 다듬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지치기를 잊지 마세요.
‘야베스의 기도’를 쓴 브루스 윌킨슨은 그의 책 ‘포도나무의 비밀’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의 길이와 그 정도와 깊이는 다양하지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가지를 쳐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찍어 불에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난 부분들을 치고 깎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일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희망이 없으면 아예 찍어 불에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가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열매를 통하여 우리의 됨됨이를 압니다. 열매를 통하여 우리의 일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열거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 열매는 하나하나가 귀한 열매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의 열매는 여럿이 알알이 맺힙니다. 전체는 한 송이이지만 하나하나의 포도알이 귀한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가 알알이 영글고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맺히는 열매가 많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열매가 풍성하면 나무가 기뻐합니다. 우리의 열매가 풍성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우리의 제일 되는 삶의 목적이 성취됩니다.
사막의 수도사 카를로 카레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와 노를 주시지만 대신 ‘노를 젓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직접 열매를 맺지 않으십니다. 나무는 가지를 제쳐두고 직접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요한 모든 공급은 내가 할게, 열매는 네가 맺어라”.
셋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과실을 맺습니다.
5절에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까닭은 열매 맺기 위한 절대 조건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땅에 내리지 않고, 수분을 공급해주지 않고, 영양분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나무의 수고가 없으면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것도 나의 공이 아닙니다. 내가 열매를 맺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열매도 없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불교를 믿는 사람만도 못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들은 자선을 잘 합니다. 죽을 때 엄청난 재산도 헌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이런 것 때문에 기가 죽지 마세요. 부러워하지 마세요. 불교에서는 다 자신의 다음 생을 위하여 미리 바쳐놓은 것입니다. 환생할 때를 위한 투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선은 열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리 큰 자선도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묵상’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의 모든 자선행위는 들 감람나무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일이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육신의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행할 수 없습니다. 영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육신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의 열매는 육신으로 맺지 못하고 영으로만 맺는 것입니다. 주님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보장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비로소 영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내가 열매를 맺어갑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일체가 되는 것이 열매를 맺는 삶의 조건입니다. 이런 하나됨의 신비가 곧 열매입니다. 여기서 전도, 봉사, 묵상, 기도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오래 전,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구원받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가 없음을 꼬집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열매 없음을 그는 “신은 죽었다”고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우연하게 천안 명물 호두과자를 만드신 심복순권사님과 함께 식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제는 천안의 명물이 아니라 한국의 명물 가운데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권사님은 올해 연세가 90세입니다. 그분이 1987년 작고하신 그의 부군인 조귀금선생님과 함께 호두과자를 만들기 시작한 때가 1934년이었습니다. 올해로 호두과자가 70년이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맛있고 영양가 있는 과자를 만들기 위하여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돈을 벌게 되셨는데 30년 전부터 권사님은 교회 개척의 꿈을 가지고 개척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얼마 전 권사님은 12번째 교회를 개척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그 분의 사업과 선교 열정을 기리기 위하여 호서대학교에서는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최근에 개척한 교회가 ‘열매 맺는 교회’입니다. 호두과자와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지금 권사님은 열매 맺는 교회에 출석하십니다. 권사님의 평생의 길은 오직 외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이고, 호두과자의 길입니다. 권사님을 통하여 도움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권사님은 평생 두 가지밖에 모르십니다. 예수님과 호두과자입니다. 호두과자 속에 있는 광고 전단지도 펴보면 광고지가 아니라 전도지입니다. 지금도 매일 호두과자를 수천 개, 수만 개를 만드시고, 지금도 매일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우리교회 고등부가 목천의 사랑의 집짓기 현장에 가서 봉사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건축자들 중에 ‘해비타트’라는 단체를 창설한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해비타트를 창설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모든 사람이 인격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개척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땅에 남기는 모든 것이 열매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열매로 이 땅에 남게 됩니다.
결론
병적일 정도로 깔끔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원만 해도 10에이커나 되는 큰 저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에이커면 약 12,000평정도 되는 넓은 땅입니다. 그는 길고 구불구불한 차도와 집 입구에 있는 흉측하게 죽은 나무 가지를 자르고 싶었습니다. 용역회사에 알아봤더니 5,000달러의 견적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놀라서 전기톱을 빌려와 몇 주 동안 주말마다 가지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역회사에 전화하였습니다. “이제 얼마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었습니다. 10,000달러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그 낮은 가지들을 활용해 더 높은 가지를 자를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값비싼 특수차량을 가져가 작업을 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가지를 자르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실 일입니다. 내가 하는 것 아니라 그분께 맡기면 그분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내가 할 일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내가 나무의 일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열매를 일기로 적어봅시다. 우리에게 좋은 가지가 무엇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잘라버려야 할 나쁜 가지는 무엇 무엇입니까? 이것을 적는 동안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나쁜 가지들을 제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들은 무엇 무엇입니까?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은 무엇 무엇입니까?
좋은 가지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우리의 농부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