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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시103:8-18 마 9:9-1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구약, 시편 103:8-18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신약, 마태복음 9:9-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산상 수훈5)
오늘은 팔복 설교 중 5번째 설교입니다. 긍휼의 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신화의 한 내용입니다. ‘에코’라고 하는 요정이 미소년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나르키소스가 냉정하게 사랑을 받아 주지 않자 에코의 마음이 매우 간절하게 되었습니다. 에코는 날이 갈수록 여위어 가다가 결국에는 목소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인과응보의 신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그 벌의 내용은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에게 과도한 애착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나르키소스는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샘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넋이 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자기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물가의 수선화로 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학술용어 나르시즘이 바로 이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기도취나 자기색정을 말하는 이 단어는 심리학적으로는 심리적 에너지(Libido)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있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은 가히 ‘나르시즘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인류는 자주 집단적인 나르시즘에 빠지곤 합니다. 냉전 시대가 끝나자 마자 골프 전쟁이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지금 또 다시 이라크에서 뜨거운 전쟁이 진행 중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공동체 정신은 파괴되고 각각의 개인적인 인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르시즘은 거의 모든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대의 명분을 위하여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타인과 다른 민족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는 논리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면서 정당화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관심사와 에너지가 자신의 안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런 인간과는 다르게 모든 에너지가 바깥을 향해서 나오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 만물과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긍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긍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엘레에몬’이라는 형용사인데 긍휼의 명사형은 ‘엘레오스’라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기다’는 말은 대단히 의미가 풍부한 말입니다. ‘귀여워하다, 사랑하다, 측은히 여기다, 자비를 입다, 자비를 베풀다, 자선을 행하다, 연민의 정을 느끼다, 불쌍히 여기다, 인정 많다, 부드러운 사랑을 가지다, 동정하다, 용서하다’ 등의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행위는 용서해 주며, 위로해 주며, 고통을 경감시켜 주며, 치유해 주며, 회복시켜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기분이 아닙니다. 기분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함’은 은혜와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기분이 아니라 ‘약속에 기초한 책임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당신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
하나님은 당신의 넘치는 긍휼 속에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 이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50) 라고 노래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간을 향해 하시는 모든 행위의 동기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통로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짐을 지고서 고난 당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신 것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과 똑같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에서 아들을 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그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이름 속에 넘치는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치유해 줄 수 있었던 것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빈 손으로 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육체는 먼지로 돌아갈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삶은 흙에서 와서 먼지가 되기 전의 가운데 입니다. 우리가 먼지와 먼지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삶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정말로 인생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은혜’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내 것이라고 주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육체와 내 영혼이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내 재산과 내 지위와 내 지식과 내 명예와 내 경력과 내 가족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선물들을 가지고 잠시 혜택을 누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면서도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죄악을 범했으며, 그 죄악의 용서와 긍휼을 덧입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라”(시 103:12-17).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참된 용서의 체험입니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노동자가 일년을 일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만 살 수 있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돈의 낭비에 대해서 제자들은 많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자들은 “나는 용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용서에 감사하는 여인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죄가 사해지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천 만원이든 이억이든 이십억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죄 사함을 평가하는데 낭비라든가 사치라는 단어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단어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생명의 문제 입니다. 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죄가 없다. 내 죄가 더 가볍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 같이 ‘네가 바로 죄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긍휼’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이 아니라, 사람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만 필요하고, 사람의 용서는 필요 없다.” 이런 착각이 용서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 서적에서 용서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면 한결같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영적인 죄만 범했고 이 세상 삶에서는 완벽한 삶을 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사람들에게 전혀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 없다는 것이 불신자들의 교만이라면, ‘사람들의 용서’가 필요 없다는 것은 신자들의 교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삶을 반성 없이 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번도 실수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방심해서 실수하고, 기분이 나쁘면 우울해서 실수합니다. 일이 잘되면 기고만장하여 실수하고 일이 안되면 비굴하고 의기소침해져서 실수합니다. 더구나 마음 속으로 하는 잘못을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약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우리는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열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마음 속은 알 수 없다” 는 속담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실수한 것을 타인이 잊어 버리지 않고 용서해 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심각한 실수를 기억하고 있다고 합시다. ‘제발 이 실수를 다른 사람이 모르고 지나가 주었으면… 만약 알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으면… 빨리 잊어버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솔직한 소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사람들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만 필요하다’는 것은 교만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의 용서가 없이는 나는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내 체면, 내 명예, 내 지위 등등 나의 모든 것이 사람들의 용서의 산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절대적으로 타인의 관용이 필요하고 타인의 망각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 속에 이런 생각이 있다면 죄지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자말에 동병상련(同病相憐)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나도 역시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깨닫는 것이 바로 용서가 필요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인 것입니다.
저는 이웃의 아이들이 떠들어도 생활에 방해를 받을 때가 있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서 나는 소음도 작은 소음을 아닐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자비로운 것은 내가 받을 자비를 저축해 놓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어차피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용서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미래를 열리게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긍휼을 받은 사람이며 내가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자비와 관용과 용서의 원리가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긍휼이 우리의 철학이 되어야 하고 습관과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긍휼이 신앙생활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삶에서 꼭 필요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아멘.
긍휼을 베풀며 살자.
누가복음 12장에는 한 부자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자신의 영혼에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생각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자를 꾸짖으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너는 오늘 밤 죽을 것이다. 그러면 너의 재산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는 오늘날로 말하면 능력 있고 성공적인 사업가입니다. 능력 있는 사업가가 왜 어리석다는 말입니까? 성공적인 사업가가 왜 악하다는 말입니까? 사업을 위하여 확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째서 악한 것입니까? 노후를 대비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이 부자는 나르시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아예 몰랐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영혼의 평안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건만 물질로부터 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했습니다.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써야 했건만, 이 부자는 자기 중심적으로 물질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대로’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반대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심판을 이깁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2-13).
긍휼의 조건
우리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는 긍휼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도 긍휼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긍휼은 조건 없이 대가 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긍휼을 조건 없이 입은 사람들입니다. 긍휼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의 긍휼로 자라고, 선생님들과 어른들의 긍휼로 자라났습니다. 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의 긍휼과 교회 교우들의 긍휼의 중보기도로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목숨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업적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성공도 자기 능력과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람이 선물로 살았으면서도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서 보상을 받으려 하고, 그 업적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한다면, 하나님의 주인 되는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긍휼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입니다. 내가 베푸는 것은 내가 받은 것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한 긍휼은 하나님께서 내게 행한 긍휼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말씀을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내 교회만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됩니다. 내가 대가 없이 구원을 받았으니 대가 없이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대가 없이 용서 받았으니 대가 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탄생하였습니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가장 발달한 고등종교가 기독교인데, 개신교는 기독교의 최신판입니다. 종교사의 꽃이 개신교입니다. 우리가 개신교의 내용을 잘 믿으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의 깊은 차원을 오늘날의 현대 사회 속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얻는자는 진리를 재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너무나 일치되는 진리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재발견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적인 종교이므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개신교는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주관화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개신교인들은 교회의 보편성과 단일성도 모르고 세속적으로 경쟁하며 자신의 업적을 사유화하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가지고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자질에 비해서 몇 백배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업적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넉넉한 보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써서 나누어 주고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은혜의 선물을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의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긍휼을 나눔으로써 더 큰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를 주의 이릅으로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구약, 시편 103:8-18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신약, 마태복음 9:9-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산상 수훈5)
오늘은 팔복 설교 중 5번째 설교입니다. 긍휼의 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신화의 한 내용입니다. ‘에코’라고 하는 요정이 미소년 나르키소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나르키소스가 냉정하게 사랑을 받아 주지 않자 에코의 마음이 매우 간절하게 되었습니다. 에코는 날이 갈수록 여위어 가다가 결국에는 목소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인과응보의 신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그 벌의 내용은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에게 과도한 애착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나르키소스는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샘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넋이 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자기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물가의 수선화로 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학술용어 나르시즘이 바로 이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기도취나 자기색정을 말하는 이 단어는 심리학적으로는 심리적 에너지(Libido)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있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은 가히 ‘나르시즘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인류는 자주 집단적인 나르시즘에 빠지곤 합니다. 냉전 시대가 끝나자 마자 골프 전쟁이 있었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어 지금 또 다시 이라크에서 뜨거운 전쟁이 진행 중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공동체 정신은 파괴되고 각각의 개인적인 인간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르시즘은 거의 모든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대의 명분을 위하여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타인과 다른 민족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는 논리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면서 정당화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관심사와 에너지가 자신의 안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런 인간과는 다르게 모든 에너지가 바깥을 향해서 나오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 만물과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긍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긍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엘레에몬’이라는 형용사인데 긍휼의 명사형은 ‘엘레오스’라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기다’는 말은 대단히 의미가 풍부한 말입니다. ‘귀여워하다, 사랑하다, 측은히 여기다, 자비를 입다, 자비를 베풀다, 자선을 행하다, 연민의 정을 느끼다, 불쌍히 여기다, 인정 많다, 부드러운 사랑을 가지다, 동정하다, 용서하다’ 등의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행위는 용서해 주며, 위로해 주며, 고통을 경감시켜 주며, 치유해 주며, 회복시켜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기분이 아닙니다. 기분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함’은 은혜와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기분이 아니라 ‘약속에 기초한 책임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당신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십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
하나님은 당신의 넘치는 긍휼 속에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 이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50) 라고 노래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인간을 향해 하시는 모든 행위의 동기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통로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짐을 지고서 고난 당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신 것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과 똑같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에서 아들을 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그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이름 속에 넘치는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치유해 줄 수 있었던 것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빈 손으로 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육체는 먼지로 돌아갈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삶은 흙에서 와서 먼지가 되기 전의 가운데 입니다. 우리가 먼지와 먼지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삶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정말로 인생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은혜’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내 것이라고 주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육체와 내 영혼이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내 재산과 내 지위와 내 지식과 내 명예와 내 경력과 내 가족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고 지금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선물들을 가지고 잠시 혜택을 누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면서도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죄악을 범했으며, 그 죄악의 용서와 긍휼을 덧입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라”(시 103:12-17).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참된 용서의 체험입니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노동자가 일년을 일해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만 살 수 있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돈의 낭비에 대해서 제자들은 많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자들은 “나는 용서가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용서에 감사하는 여인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죄가 사해지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천 만원이든 이억이든 이십억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죄 사함을 평가하는데 낭비라든가 사치라는 단어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단어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생명의 문제 입니다. 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죄가 없다. 내 죄가 더 가볍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 같이 ‘네가 바로 죄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긍휼’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이 아니라, 사람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만 필요하고, 사람의 용서는 필요 없다.” 이런 착각이 용서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 서적에서 용서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면 한결같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영적인 죄만 범했고 이 세상 삶에서는 완벽한 삶을 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사람들에게 전혀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 없다는 것이 불신자들의 교만이라면, ‘사람들의 용서’가 필요 없다는 것은 신자들의 교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삶을 반성 없이 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번도 실수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방심해서 실수하고, 기분이 나쁘면 우울해서 실수합니다. 일이 잘되면 기고만장하여 실수하고 일이 안되면 비굴하고 의기소침해져서 실수합니다. 더구나 마음 속으로 하는 잘못을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만약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우리는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열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마음 속은 알 수 없다” 는 속담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실수한 것을 타인이 잊어 버리지 않고 용서해 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심각한 실수를 기억하고 있다고 합시다. ‘제발 이 실수를 다른 사람이 모르고 지나가 주었으면… 만약 알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으면… 빨리 잊어버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솔직한 소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사람들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만 필요하다’는 것은 교만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의 용서가 없이는 나는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내 체면, 내 명예, 내 지위 등등 나의 모든 것이 사람들의 용서의 산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절대적으로 타인의 관용이 필요하고 타인의 망각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 속에 이런 생각이 있다면 죄지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자말에 동병상련(同病相憐)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나도 역시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깨닫는 것이 바로 용서가 필요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인 것입니다.
저는 이웃의 아이들이 떠들어도 생활에 방해를 받을 때가 있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집에서 나는 소음도 작은 소음을 아닐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자비로운 것은 내가 받을 자비를 저축해 놓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어차피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용서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미래를 열리게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긍휼을 받은 사람이며 내가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자비와 관용과 용서의 원리가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긍휼이 우리의 철학이 되어야 하고 습관과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긍휼이 신앙생활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삶에서 꼭 필요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아멘.
긍휼을 베풀며 살자.
누가복음 12장에는 한 부자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자신의 영혼에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생각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자를 꾸짖으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너는 오늘 밤 죽을 것이다. 그러면 너의 재산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는 오늘날로 말하면 능력 있고 성공적인 사업가입니다. 능력 있는 사업가가 왜 어리석다는 말입니까? 성공적인 사업가가 왜 악하다는 말입니까? 사업을 위하여 확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째서 악한 것입니까? 노후를 대비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이 부자는 나르시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아예 몰랐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영혼의 평안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건만 물질로부터 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했습니다.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써야 했건만, 이 부자는 자기 중심적으로 물질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대로’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반대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심판을 이깁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2-13).
긍휼의 조건
우리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는 긍휼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도 긍휼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긍휼은 조건 없이 대가 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긍휼을 조건 없이 입은 사람들입니다. 긍휼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의 긍휼로 자라고, 선생님들과 어른들의 긍휼로 자라났습니다. 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의 긍휼과 교회 교우들의 긍휼의 중보기도로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목숨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신의 업적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성공도 자기 능력과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람이 선물로 살았으면서도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서 보상을 받으려 하고, 그 업적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한다면, 하나님의 주인 되는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긍휼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입니다. 내가 베푸는 것은 내가 받은 것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한 긍휼은 하나님께서 내게 행한 긍휼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말씀을 나 자신과 내 가족과 내 교회만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됩니다. 내가 대가 없이 구원을 받았으니 대가 없이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대가 없이 용서 받았으니 대가 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신교가 탄생하였습니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가장 발달한 고등종교가 기독교인데, 개신교는 기독교의 최신판입니다. 종교사의 꽃이 개신교입니다. 우리가 개신교의 내용을 잘 믿으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신앙의 깊은 차원을 오늘날의 현대 사회 속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얻는자는 진리를 재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너무나 일치되는 진리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재발견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적인 종교이므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개신교는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주관화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개신교인들은 교회의 보편성과 단일성도 모르고 세속적으로 경쟁하며 자신의 업적을 사유화하게 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가지고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자질에 비해서 몇 백배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업적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넉넉한 보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써서 나누어 주고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은혜의 선물을 사유물처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의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미 받은 하나님의 긍휼을 나눔으로써 더 큰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를 주의 이릅으로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