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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요 11 : 17~37)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의 문제요 둘째는 죽음의 문제요 셋째는 의미의 문제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죽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잠깐 머물다 가는 여관이고, 우리는 여행객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사람은 없습니다. 프랑스의 격언에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사실 죽음을 향한 우리의 행진은 아주 정확합니다. 1년에 약 1억 명이 죽고 있습니다. 매초 3명씩 죽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한 시간 동안에도 1만 8천명이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원간에 나도 그 숫자에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은 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견해는 무엇이며, 믿음을 가질 때 죽음은 어떻게 변하는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죽음이란 무엇인가?
(1)한국의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죽음에 대해서 흔히 하는 말은 [멀리 가셨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얼마를 지난 다음에는 왜 할아버지 안 오셔? 하고 기다리곤 합니다. 문제는 죽음을 심각한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하찮은 일로 취급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일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2)다음은 불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주장합니다. 즉 [인간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날 거야]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사고방식은 선행을 하게 하는 동기부여는 되고, 또 제2의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은 좋으나 비과학적이고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입니다.
(3)세 번째는 유물론적인 사고입니다.
[인간은 무덤에서 끝난다]라는 공산주의적 가르침입니다. 이런 유물론적인 진화론적인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기는 하지만 다른 것은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약 인간이 무덤에서 끝난다면 인간에게는 윤리도 도덕도 필요 없고, 그저 쾌락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입니다.
(4)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로 온 사고(accident)이지만 그러나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현관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죽음이 슬픈 것은 죽음은 육적으로 이 땅에서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잠자는 것, 즉 죽은 후에 의식이 소멸되지 않고, 또 다시 잠에서 깨어나듯이 다시 일어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2.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죽음에 관한 4가지의 견해를 살펴보겠습니다.
(1)19절과 37절에 보면 [많은 유대인들]의 견해가 나옵니다.
37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들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소경의 눈을 뜨게는 하지만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는 못한다는 견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애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슬픔을 함께 나누는 자세입니다.
(2)다음은 마르다의 견해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훨씬 더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27절에 보면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21절에 보면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없지만 이 문장은 [만일]이란 가정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기는 하였지만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가정법을 사용한 비난조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터인데 안 계셔서 죽었어요, 라는 비난조의 말이었습니다.
물론 22절에 “무엇이든지”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러나 그 말도 깊이 따지고 보면 부활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말이고, 장소를 제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때까지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부활에 관한 일반적인 것은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러나 개인적인 신앙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부활은 마지막 날에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도 믿고, 부활도 믿으면서 그 [때와 장소]는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아닙니까? 우리는 믿으면서도 때와 장소를 제한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인 말은 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적인 믿음으로까지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믿음이 되고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 못되고 있습니다.
(3)세 번째는 마리아의 견해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주님의 마음에 더 합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사로가 죽은 뒤의 심정은 마르다와 같이 32절에 보니까 원망 섞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다는 것과 다음에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의 [발아래 엎드리는] 자세였습니다.
이것은 행하는 믿음, 메시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도 발아래 엎드렸고, 주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영접하였을 때에도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헌신과 복종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4)끝으로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원망 섞인 말을 할 때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33절에 보면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의 형편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하여 통분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해서 통분히 여기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 때문에 왔고, 이 모든 것은 악한 영의 세력 때문에 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악의 세력을 박멸하고, 죽음에 처한 우리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죽음에 대한 전면 도전을 하기 위해서 무덤을 향하여 서셨습니다.
35절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100%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새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3. 이것을 네가 믿느냐?
25절과 26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특별히 26절에 보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주님은 확인을 하셨습니다.
(1)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앞뒤의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가) 전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둘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뒷부분의 구절은 공중휴거로 해석해야 합니다.
(나)반대로 둘 다 영적으로만 해석하면 나를 믿는 자들이 비록 죽기는 하지만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다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다)셋째의 해석은 앞부분은 문자적으로 뒷부분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해석을 따릅니다. 즉 이미 죽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은 육적으로는 죽지만 영적으로는 영원히 죽지 않고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는다 해도 죽은 뒤에도 주님과의 관계가 계속되고 마침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다시 부활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 번째의 해석을 취하면서도 이 말씀이 마르다에게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이란 점에서 네 번째의 해석을 취합니다. 즉 본문이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뜻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뜻이란 점입니다.
개인적인 뜻이란 마르다가 예수님을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로 믿는다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인 진리로서 해석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날에 다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계속해서 “내가 아나이다.” 라고 했는데 그 뜻은 지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활력소가 없고, 생기가 없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믿어야 합니다.
남이 무엇이라 하던 내가 믿으면 역사가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믿음이란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이 부활의 주님이요 생명의 주님인 것을 믿습니까?
맺는 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마르다처럼 주님을 때와 장소에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발 앞에 엎드리는 무조건적인 헌신과 복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 라는 개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막연한 일반적 신앙이 아니라 “내가 믿습니다.” 라는 [내가 믿는 신앙]이 되어져서 우리의 믿음이 보다 생기 있고, 능력 있고, 활성화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