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   (본문 눅2:25-35)


제주도에 가면 아름다운 서귀포 지역의 경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전 세계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귀포 근방 해안에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바위는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제주도 방언인 '할망'이라 부르거나 아니면 '하루방'이라 소리를 질러보기도 합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으니 그 기다림이 얼마나 오래였고 힘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연구하던 데니스 레인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기다리고 신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받고 그것을 주위의 환경이나 개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25년, 즉 4반세기를 기다려 마침내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기다림은 복을 받게 합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여 하나님께서도 죄인된 인간들이 바르게 되어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심과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이 있기에 그토록 힘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인내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다 바뀐다고 하여도 그 기다림만은 바꾸지 않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고 소망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장 25-35절에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여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시므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기다리던 중에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시므온이란 사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늘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에서 깨닫는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살아가다 힘들거나 약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힘을 입어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다윗의 자손 중에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약속을 수도 없이 여러 번 하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언약을 믿고 희망하면서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시므온이 살던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모든 주권이 철저히 로마에 빼앗겼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속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원자 메시야가 오시기를 대망 하였습니다. 바로 시므온도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있듯이 전혀 희망도 없고 벗어날 힘도 없는 당시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온의 신앙과 경건함,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을 인정하셔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하여 보낼 메이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성령을 통하여 시므온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늘 믿음으로 사는 시므온이 영의 지시하심을 받아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의 지시하심을 받아 성전에 가고 싶었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 성전에 가야 할 날과 시간을 잊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삶은 집과 성전 두 곳에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성전에 갈 날도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성전에 가고 싶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전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예수의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기 위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내아이를 낳으면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모님들이 예수를 할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러 그 예식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할례를 행하기 위하여 오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들을 낳기만 하면 팔 일째 되는 날 성전에 찾아와 할례를 행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모만 그곳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성전에서 할례 예식을 위하여 바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이 그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여 고백하기를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시므온이 하나님께 드린 찬송의 내용을 보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굴레나 속박에 억매이지 않고 참된 자유와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음을 찬양하였습니다. 시므온은 계속하여 영원히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눈으로 목도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찬양하였습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 구세주를 품에 안았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요 감사한 일이었겠습니까!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제 온 세상 만민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셔서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구원의 길이 드디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인간을 영원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십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도 이 믿음에 바로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의 빛도 되심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스라엘만이 구원이 약속된 선민이란 생각으로 폐쇄적인 신앙에 매어있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자 예수를 품에 안게 되자 시므온은 이 메시야 구세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자요 참 생명의 빛이 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예수를 통하여 참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모든 인류가 바로 예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그 예수가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유대인에게는 커다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 감격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양하며 고백하였습니다.

시므온이 이렇게 기다리고 소망하던 중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품에 안는 기쁨과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메시야 구세주를 우리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소망으로, 기다리는 인내로 대강절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강절에 들어갑니다. 대강절은 주님이 오심을 기다린다는 절기입니다.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둘을 함께 지키는 절기로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초림과 세상 종말에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는 재림을 포함하여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은 '도착한다'(ankunft, arrive)는 의미로 마치 기차역이나 공항에서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식구들이나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같은 의미로 우리들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제물되시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회상하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바로 그 예수를 내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모시어 들여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메시야는 2000년전 베들레헴에 오신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곁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바라는 보는 것 이것도 바로 대강절의 또 하나의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스바냐에 3장 17절말씀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는 말씀과 같이 바로 메시야 그 분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요 메시야 그 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33장 6절에서도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라고 하여 메시야가 성까지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성이란 나라와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는 나라와 민족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메시야가 오셔서 해결해 주십니다. 바로 이런 메시야를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또 하나 대강절의 의미는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대강절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하늘 나라에 가서 너희 있을 곳을 다 예비한 다음에 너희에게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구주를 믿고 소망하며 인내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사 가운데 하나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진 "마라나타"였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약속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자세를 나타내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 상황은 교회가 대단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아주 심한 박해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떠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들이 기다렸던 재림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 신앙을 통해서 그들은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강절에 가져야 할 신앙인의 자세요 소망이요 믿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이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다 간 미즈노 겐죠라는 시인이 노래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한 시가 있습니다. 그 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사는 자들이여
시험의 폭풍이 지나가기를
거룩한 뜻이 행해지기를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사는 자들이여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도움 속에 사는 자들이여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리기를
영광의 주가 오시기를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뉴스위크」(Newsweek)에 중국 문화혁명 때 반혁명 세력으로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한 중국인을 소개한 것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감방생활이 고통스러워 자살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 날 오후 감옥의 창 밖으로 연이 날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연의 무늬는 자기가 만들어 아들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하루에 두 번씩 연이 창 밖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사람은 내 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되니 꼭 살아서 아들을 만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처럼 그는 아들이 띄워 준 연을 통한 메시지로 힘을 얻었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진정한 기다림의 의미를 몰라 주시는 은혜를 잃고 기쁨도 빼앗기지 말고 기다림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더 기다리고 인내하여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기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이용남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