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상 받는 교회   (본문 요2:1-11)


노벨상을 창시한 사람은 스웨덴의 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입니다. 노벨은 화학 공업가이자 발명가였습니다. 그는 폭팔성이 강한 니트로글리세린의 안전한 이용방법을 연구하던 어느 날, 산책도중 화약 운반 포장을 하는데 사용했던 규조토를 생각해내었습니다. 글리세린을 규조토와 혼합하면 잘 폭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다아이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연화약도 발명하였습니다.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있어나 프러시아군이 그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를 무기로 사용하여 막대한 인명손상을 내게 되자 평화주의자인 노벨은 크게 충격을 받고 평생 결혼도하지 않은 채 일생을 마치면서 자신의 재산을 국제 평화를 위하여 의미있게 사용되기를 원한다고 유언과 함께 많은 유산을 스웨덴 왕립과학 아카데미에 기부하였습니다. 노벨재단은 이런 노벨의 뜻을 따라서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노벨상에는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뛰어나게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평화상, 문학부분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문학상, 물리학부분에 이바지한 학자에게 주는 물리학상, 화학부분에 공헌한 학자에게 주는 화학상, 인류의 건강을 위하여 탁월한 연구를 한 사람에게 주는 생리의학상, 마지막으로 국제경제를 위하여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경제학상등이 있습니다. 그 상을 받을 만큼 국제사회와 인류를 위하여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상이 주어져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되어 국가마다 노벨상을 탄 학자와 문인, 그리고 지도자가 있는 것을 크게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국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 상을 탄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학작품을 알리기 위하여 번역작업을 장려하기도 하였고 국제적인 각 분야의 우리 학자들의 연구와 세계적인 기여도를 크게 홍보하여 노벨상을 타도록 국가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어 민족적인 경사요 이제는 우리나라도 노벨상을 탄 국가의 대열에 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정말 자랑스럽고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대통령이 너무 노벨상을 타고 싶어서 북한에다 너무 많은 경제원조를 보내 국내 경제가 바닥을 헤메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비난의 소리도 있지만 분명 노벨상은 국가적인 경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노벨상을 타게 된 김대중 대통령의 삶은 정말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 6년 간의 투옥, 10년 간의 연금 및 망명이 김대중 정치역정이라는 어느 신문 사설처럼 파란 만장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민주화와 남북의 평화적 통일에 혼신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런 그의 수고와 업적이 마침내 세계에 빛을 발하게 되었고 인정을 받아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상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상이 주어지는 것이고 또 상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질 때 그 상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장석교회서 자라는 많은 젊은이들이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크게 이바지 함을 노벨상을 차지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주어진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상을 주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도 10절 하반 절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상급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46주년 맞이하는 장석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는 날 귀한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 25), 의의 면류관 (딤후 4: 8),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영광의 면류관(벧전 5:4)등을 말씀하시면서 영생의 세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영광과 상급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이지만 상급은 늘 행함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고하고 헌신하여 최선을 다한 교회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8절 이하는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용기와 격려를 주시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비록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 구실을 잘 감당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생명을 걸고 잘 감당한다면 노벨상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귀한 상급인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이 핍박을 받아 많은 성도들이 피를 흘렸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지하에 굴을 파고 그 속에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견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 십일이라고 하신 것은 앞으로 상당한 기간동안 어려움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위기에서도 신앙만을 제대로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속해 있는 삶의 현상에서도 같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계시록이 기록될 때 소아시아처럼 신앙적인 박해가 노골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의 현장은 언제나 우리를 신앙 밖으로 끌어내거나 주님을 멀리하도록 시험하고 유혹하고 있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넘어가기 쉬운 세상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환난 때보다 평화시에 신앙을 지키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죽을 힘을 다하여 충성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충성이나 헌신은 최선을 다하는 어떤 헌신보다 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 이하를 보면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아무리 포악하고 악이 만연한 세상이지만 세상도 감히 이들을 어쩔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각오한 헌신과 충성, 그리고 신앙은 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굴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역에 가 보면 엄청난 지하도시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당시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쳐 온 신자들이 땅 속에다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고 하는 지역입니다. 지하 12-13층 정도의 깊이까지 파 내려간 곳에는 중앙에 예배를 드렸던 곳을 중심하여 말씀을 배웠던 장소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였는지 우리도 배우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찬송 383장 1절에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라는 고백이나 2절에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얻었데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라는 찬송에서 초기 성도들의 헌신과 충성을 생각하며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의 뜻은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충성은 하는 듯 하다가 환경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주님을 믿고 그 신앙을 지키며 그 신앙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만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도록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얼마동안 잘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변함없는 헌신으로 충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국 죠지아주 아트란타에 있는 교민들을 위한 어느 신문사에서 장석교회를 소개하는 글을 실어보겠다고 하면서 자료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목사에게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목회신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성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대로 "처음을 마지막처럼, 마지막을 처음처럼"이란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일을 처음 맡았을 때 이 일이 내 생애에 있어서 최후의 것이라는 각오와 헌신으로 감당할 뿐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제는 다 끝났으니 적당히 하자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이제 처음으로 그 일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목회를 감당해 보자는 제 자신의 결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런 자세로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그것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장석교회가, 그리고 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주님의 심판대를 의식하며 이렇게 충성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진정한 충성은 생명을 헌신하는 죽음까지 각오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로 헌신하고, 가지고 있는 훈련된 재능으로 헌신하고, 시간을 드려 헌신한다 하더라도 생명을 헌신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드려 헌신하지 않는 한 예수님에게 걸맛는 헌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고 헌신하는, 즉 생명을 드리는 헌신만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 선교비사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아주 쉽게 복음을 받아드렸습니다. 특히 그 부족의 추장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아 더욱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그 부족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선교사는 서재에서 다음 날 전할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늦은 저녁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추장이 거기 서 있었습니다. 웬일이냐고 묻자 추장은 자신의 손에 들오 있는 칼을 내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선교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죽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가보인 이 칼을 나를 위하여 생명을 주신 주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칼이 필요없으십니다. 가지고 돌아가십시요'라고 답하였습니다. 추장이 돌아갔고 선교사는 또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 다시 추장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냥 잘 수가 없습니다. 생명까지 주신 주님께 꼭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족의 명예인 이 추장 모자를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추장의 얼굴을 드려다 보며 '추장님 뜻은 고맙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모자는 필요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실망한 추장은 주저하다 그냥 돌아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그에게 '추장님 정말 드리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진심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었습니다. 선교사는 추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추장님,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에게는 생명을 드려야 진정한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장님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드리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생애를 헌신할 때 바로 그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요, 생명을 주신 주님께 걸맞는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장석교회, 그리고 장석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출처/이용남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