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아! 네가 무엇이냐   (렘 18:1-6)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무슨 뜻입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양사람도 서양사람도 모두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신사도 숙녀도 다 하나님의 손안에만 있습니다. 저절로 신사, 저절로 숙녀가 아닙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인생을 새삼스럽게 배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이 불신앙입니까?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지 아니함,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무엇이 불행이고, 무엇이 사망입니까? 하나님의 손을 벗어난 것, 그것이 인생의 불행이요, 인생의 사망입니다.
배 한 척이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배의 구명보트가 있었고 판자조각이 있었기에 모두가 다 한 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인도입니다. 그들은 섬에서 어떻게 살아나갈꼬 궁리를 했으나 뚫고 나갈 길이 막혔습니다. 결국에는 섬에서 탈출할 것을 포기하고 그 섬에서 한가족들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간의 식량이 있고 곡물씨앗이 있어서 몇 달 동안은 연명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씨앗을 땅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땅을 파다가 엄청난 금광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 금덩어리 때문에 정신을 몽땅 잃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금, 금, 금에다가 소망을 걸고 금파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파낸 금덩어리가 엄청나게 되었고 햇빛이 비추니까 파낸 금덩어리가 번쩍 번쩍 찬란히 빛났습니다. 그런데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파낸 금덩어리는 오늘도 번쩍 번쩍 빛나고 있건만 주린 창자가 생명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한 사람, 한사람 죽어가더니 마침내 다 죽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때에 질문이 하나 있다면 어떤 질문입니까? 하나님이 있어야 사느냐, 금덩어리가 있어야 사느냐? 사도행전 17장 28절이 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힘을 입어 살지 못한지라 멸망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인생아! 네가 무엇이냐”,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인생아! 네가 무엇이냐, 이는 각각 자기 인생을 향하여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이십니다. 본문 내용을 통해서 답을 찾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아래 인생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3절). 여기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여기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사실 이사야 64장 8절에 보면 주는 토기장이시요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 했습니까? 왜 예배드리는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토기장이 집으로 가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인생 모두에게 실물로 교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의 집, 현장으로 가서 인생을 배우란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토기장이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손으로 흙을 주물럭주물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듬기도 합니다. 조금 후에 진흙이 변해서 그릇모양이 됐고 또 보니까 조금 후에 그것을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니까 아름다운 그릇이 되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예레미야를 향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토기장의 손 놀림 따라 진흙이 화병이 되기도 하고, 도자기가 되기도 하듯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성공, 실패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모두가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축복도 하나님의 장중에 있고, 승리하기를 다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승리도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그렇고 생명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지, 내 손에 있지를 않다는 말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한 덩어리 진흙과도 같습니다.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욥 10:9),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욥 33:6),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사 45:9)라 했고,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랑하는 성도여!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오지 한 길이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마찬가지 행복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지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진흙이 진흙 따로 있어봐요, 여전히 진흙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짐승에게 밟힐 뿐이요, 진흙은 가치 없는 것, 귀중히 여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을 보십시오. 일단 보잘것없는 진흙 한 덩어리 토기장이 손에 들려졌으면 그 진흙은 이름이 바꿔집니다. 진흙이 아니고 그릇입니다. 진흙이 아니고 화병입니다. 진흙이 아니고 고려자기입니다. 청자기입니다. 또 위치가 달라집니다. 시냇가에 버려졌던 것이 이제는 안방에 앉게 되고요, 산골자기 위에 버려졌던 진흙이 이제는 궁실에 놓이게 됐습니다. 또 그 용도가 달라집니다. 무가치한 것, 쓸모 없는 것이 매우 소중하게 됐습니다. 진흙 한 트럭을 팔아도 값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자기 하나 팔면은 정말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들려져야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모든 인생들은 진흙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다윗처럼 쓰임 받고 솔로몬처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빚어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목적 아래 인생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4절). 여기 진흙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하포아리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러 의미가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쓰레기, 잿더미, 흙더미, 그런 뜻을 지닙니다. 어쩌면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흙은 연약한 것, 쓸모 없는 것, 무가치한 것, 더러운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토기장이는 그 흙으로 접시 되게 하고, 밥그릇 되게 하고, 국그릇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목적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각각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생을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이 복안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어부가 되게, 어떤 사람은 농부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남자된 것은 남자되고 싶어서 된 것 아닙니다. 여자가 되고 싶어서 여자 되신 분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 백인종 되게 하시고 누구는 황인종 되게 하셨습니다. 출생지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누구는 유럽에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이는 한국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내 인생을 위한 계획이 있다는 말입니다.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항거할 것 없습니다. 불평한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그리 되게 하셨습니다. 다만 그 뜻을 살피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복받는 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왜 야곱은 택하고 에서는 버리셨는가? 왜 나에게 이러한 슬픔, 이러한 아픔을 주셨는가? 왜 저 사람은 항아리 인생 되게 하고 나로 하여금 접시 인생 되게 하셨는가? 그러나 우리 모두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해서도 안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그 예수님, 참 감사합니다. 그 예수님 믿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 됐습니다. 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했습니까? 답은 가지고 있어야 돼지 안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한 말씀대로 빛노릇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한 말씀대로 소금노릇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세상의 빛노릇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세상의 소금노릇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게 신사답게 살고 있고, 숙녀답게 살고 있습니까?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토기장이 의 손과 같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이 모양, 저 모양의 그릇이 되듯이 인생은 저마다 하나님의 손에서 다릅니다. 신분이 다릅니다. 직장이 다릅니다. 하는 일의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내가 시인이 된 배후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을 외면하는 인생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달란트가 다릅니다. 더러는 다섯, 더러는 둘, 더러는 하나란 말입니다. 두 달란트 인생이 다섯 달란트 인생 못된 것 비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달란트 인생이 두 달란트 인생 못된 것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토기장이 손에서 항아리가 되었을 때에 뽐내는 항아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접시로 만들어졌을 때에 비관하는 접시를 본 일이 있습니까? 소고는 소고대로 의미가 있고 장구는 장구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왜 토기장이가 어떤 것은 항아리로 만들었습니까? 김치를 담고 간장을 담고 된장을 담아서 장간에 곱게 가지런히 진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토기장이가 어떤 것은 하찮은 접시로 만들었습니까? 반찬을 담아 상위에 놓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대학교 교수가 되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경찰관이 되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버스 기사 되게 하셨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목사로 세우셨습니까? 장로로 세우고, 권사로 세우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버스기사 노릇 잘 하기 위해서 버스기사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경찰관 노릇 잘하기 위해서 경찰관으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어떤 진흙이 항아리가 된 것은 토기장이의 뜻입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 하나님의 비밀하신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 사람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유하다고 교만할 필요 없습니다. 환난을 만났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리 된 것이 어떤 연고일까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마 10:30)다 했고, 국가의 흥망성쇠도 하나님이 홀로 주장하신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국가도 “통의 한 방울 물”(사 40:15)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사랑하는 성도여, 마음에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하게 사십시다. 낮아지십시다. 그리하면 때가 이를 때에 높여주리라 하셨는데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축복아래 인생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진흙으로 일하는 토기장이를 다시 보십시오. 그릇이 상했을 때에 어찌합니까?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시 손으로 주물럭거리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곤 좋은 그릇으로 새롭게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생활 성실히 하시면서 축복 받은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빌리 그레함 집회 때의 된 일입니다. 두 사람이 저 뒤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계속 수군수군하고, 그리곤 내용을 보면 설교하는 빌리 그레함목사를 손가락질하면서 비판하고 투덜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더니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곤 집회의 절정에 이르러서 빌리 그레함목사가 외쳤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제 예수를 믿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회개할 맘이 있는 분들은 다 앞으로 나오십시오.” 결신하는 시간인데 생각밖에 침통한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이 “우리 나가세” 하면서 뚜벅뚜벅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곤 호주머니에서 돈지갑 하나를 꺼내서 “목사님, 여기 있습니다.” 바로 빌리 그래함 목사가 지녔던 지갑입니다. 그 돈지갑을 훔치고 그 분이 집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 뒷자리에 앉았다고 훔친 것 돌려주고 회개를 했다고 하는 미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내게 잘못이 있나 없나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잘못했어요” 이렇게 참회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축복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왜 그 삶 속에 그토록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할까? 성경에서 답을 찾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허물이 많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것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회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은 선반 위에 놓여져 있는 관상용 그릇은 될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퍼줄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우린 모두다 그릇입니다. 어떠한 그릇이어야 합니까? 중히 쓰시는 그릇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그릇입니다. 누가 요나의 계획과 가는 길을 풍랑으로 파상시켰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요나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새 길 걷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어찌 했습니까? 그는 홰방자요, 핍박자요,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그 길을 차단시키시고 사울을 바울되게 하셔서 ‘바울을 싣고 가는 배는 구라파를 싣고 가는 배다’고 할 만큼 사울 인생을 변하여 바울 인생 되게 하셨습니다. 세계의 인구는 60억에 육박합니다. 얼마나 많은 얼굴들입니까? 그런데 얼굴마다 다 다릅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졌습니다. 얼마 있으면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습니다.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도 같은 모양이 없게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우리 인생이랴, 직업이 달라요, 성품이 달라요, 달란트가 달라요, 그러면서 모두가 하나님의 장중에만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려는 꿈을 지녔습니다. 그리고는 교직과 과정을 다 밟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핸들을 돌리시고 그리고는 아니다, 너는 목사가 되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진로를 정해 주셔서 오늘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4절).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그래서 깨진 인생을 새롭게 빚습니다. 고장난 인생을 고치시고 병든 인생을 강건케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빈손 들고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무엇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또 말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있게 될 때에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진흙은 보잘 것 없는데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지면 도자기가 되는 것과 꼭 같습니다. 옛사람은 지나갑니다. 모든 죄는 씻음 받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됩니다. 구원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모르드개의 경우를 보십시오. 하마터면 하만의 괘계대로 장대에 달려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만의 계획을 꺾으신 것 아닙니까?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는 그 장대에 도리어 하만이 달리도 말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물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어떠한 방법으로 내 인생을 살았는가? 지금까지 어떠한 모양으로 믿음생활을 해왔는가?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교회를 봉사했는가?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혹시는 내게도 고쳐야 될 것이 있지는 않는가? 내가 새롭게 살아야 될 것은 있지는 않는가? 내게 새로운 믿음생활이 시작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답해보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내손에 있느니라, 이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는 삶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하여 성실하게 사는 것 좋습니다. 내 영혼을 키우고 내가 성공하고 그리고 보다 더 신실한 삶 사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더 큰 믿음으로 나만을 위하지 아니하고 너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가슴을 지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면은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일곱 귀신들린 자 아닙니까? 죄 많은 여자가 아닙니까? 쓸모 없는 상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빚음 받았을 때에 새 사람됐습니다. 현모양처 됐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를 흠모하게 됐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상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그도 예수님을 만나 다음에 변화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리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베드로가 어찌 했습니까? 강하게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래서 병자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믿는 성도들은 강해야 합니다. 담대합니다. 독수리와 같은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강철같은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인생을 승리해야 합니다. 심령이 상한 인생이 있습니까?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심령이 파상되었을 때에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창조하소서, 이 말뜻은 온전히 새로 지어 주시옵소서 하는 뜻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이 새로 지음 받기를 원하고 때묻은 내 생활을 색감이 달라지기를 원합니까? 사람의 힘으로 안됩니다. 사람의 손안에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실 때에 질그릇 같은 인생이 달라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나는 고칠 것 없어, 난 깨끗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하나님 앞에 설자 몇 사람이나 됩니까? 겉으로는 교양이 있는 신사입니다. 그러나 속은 신사복을 입은 야만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숙한 숙녀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추한 것들이 얼마든지 가득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릇일지라도 깨어진 그릇은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진 그릇으로 귀한 손님 접대합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진 그릇으로는 보배 그릇되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가 깨진 그릇입니까? 의심하는 성도 깨진 그릇이요, 불평하는 성도 깨진 그릇이요,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자를 믿지 아니하는 성도가 깨진 그릇입니다. 그러나 깨진 그릇도 새것 될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새 그릇을 만들 수 있음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면은 내 인생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걱정할 것 없습니다. 두려울 것 없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부도날 형편인 내게 ‘돈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말게’하면서 손을 꼭 붙잡아 줬다면은 걱정할 것 없지 않습니까? 그것 믿지 아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꼭 마찬가지입니다. 넘치도록 부유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은 바닷물이 흉용하고 물이 요동할지라도 나는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 두려울 것 없겠네 ♬ 이것이 우리의 찬송입니다. 시편에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로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입니다. 그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 예비하시는 여호와이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전쟁이 있을 수 있고, 흉년이 있을 수 있고, 재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나님은 진흙 같은 우리 인생을 붙들어 주시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신실한 힘을 힘입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진흙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 바 되면은 도자기 인생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변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