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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의 치유 (마태복음 6:25-31)
어느 날, 큰 동네에 죽음의 사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정확히 30일 후에 그 동네의 사람들 가운데 2000명을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어요. 큰 근심에 빠진 동네 사람들... 상의를 한 끝에, 대표되는 추장이 가서 죽음의 사자와 담판을 짓습니다. "2000명을 데려가면 우리 동네는 아무래도 큰 타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줄이고 줄여서 1000명만 데려가기로 협상을 했습니다. 추장이 돌아와 그 보고를 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어요. 왜냐 하면 2000명에도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이 1000명에도 포함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능력 있는 추장이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한 달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들이닥쳤는데, 놀랍게도 그 동네에는 1000명이 아니라, 7000명이 죽어 자빠졌습니다. 너무너무 화가 난 추장이 죽음의 사자를 만나 따졌습니다.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냐고, 1000명만 데려가기로 약속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어떻게 해서 7000명을 데려갈 수가 있냐고 했더니 죽음의 사자가 얘기했습니다. "나는 1000명밖에 데려간 일이 없습니다" "무슨 얘기냐? 오늘 아침에 우리 동네에서 7000명이 죽었는데!" 그랬더니,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오. 나는 1000명만 데려 갔소. 나머지 6000명은 내가 데려간 게 아니고, 내가 간다는 소리를 듣고 염려해서 그 걱정 때문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만들어 냈을 것 같습니까? 염려가 얼마나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 소설가들은 가끔 이런 얘기를 만들곤 합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때로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염려할 때 우리는 마음으로만 염려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장육부(五臟六腑) 전체로 염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다.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들! '제2의 마음'이라고 하는 위(胃)가, 염려할 때 가장 많이 상하죠? 소화가 되지 않죠? 그래서 위궤양에 걸립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심하게 염려할 때 수많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져서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염려를 줄이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주로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술을 마신다고 염려가 줄어들던가요? 잠시 잊어버릴 뿐입니다. 술 마시는 사람들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걱정을 덜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러나 그 술을 마신 것 때문에 걱정거리는 더욱 쌓여만 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면제를 먹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미국 타임지의 통계를 보면 하루에 미국 사람들이 수면제를 얼마 정도 먹는가? 미국 시민들이 하루 동안에 먹어 치우는 수면제의 양이 7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7000Kg의 수면제를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제약회사가 먹고 사는 이유인 것 같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경안정제를 찾고 수면제를 찾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염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염려는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예수님의 이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역시 오늘의 우리들만큼이나 많은 염려에 쌓여 살았던 것 같아요. 여러분이 잘못 생각하면 1세기에 살았던 사람들, 삶이 그렇게 단순했는데 무슨 염려가 많았겠는가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그 당시 환경을 연구해보면, 이들의 염려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어요. 오늘 이들의 삶을 비유한다면 음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 저 아프리카 사람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여러분, 5년 전 뉴욕 타임지에 실려 큰 히트를 친 사진 작품이 있었어요. 바짝 마른 어린 아이가 음식이 없어서 들에서 죽어가는데, 거기에 큰 독수리가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것을 어떤 신문기자가 찍었어요. 비록 그 작품은 히트를 쳤지만, 그 아이를 살릴 생각은 안하고 사진을 찍었다는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그 기자는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본인도 아닌, 자식이 음식이 없어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느껴보셨습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입장이 그러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었어요. 내일 아이들이 먹을 양식을 위해 걱정해야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던 이 사람들은 자기의 그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자기 수입의 40%를 로마 정부에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너무나도 걱정스러워 하던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여러분,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내일 먹을 양식이 없는데, 주님은 말씀하시는 거예요. 염려하지 말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 말씀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금하신 것이 무엇이고, 왜 그러한 명령을 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생각을 금(禁)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계획과 설계를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은 내일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말라, 두 자리 IQ를 가지고 살아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KING JAMES (킹 제임스)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에요. 훌륭한 번역 성경이지만 그래도 실수를 했어요. 거기에 보면 '생각을 하지 말라'고 번역했기 때문이에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오려고 하니까 돌아서셔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얘들아! 너희가 내 제자로 입문하려고 하느냐? 그러면 내가 비유를 한가지 얘기하마. 내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너희는 생각을 해야 돼!"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10층 건물을 지으려고 하면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내가 가진 돈이 얼마이고, 그 다음 은행에 어느 정도 융자를 내야 되겠구나!' 다 계산을 하고 난 다음에, 내가 그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될 때 건물을 짓지 않겠느냐?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혀 생각 없이 10층 공사를 시작해 놓고, 은행에 융자를 과도하게 해서 건물이 완공되던 그 날, 완공 예배를 드리자마자 은행에서 건물을 가져가더라. 그랬다면 사람들이 다 웃지 않겠느냐! 그렇게 할 자가 있겠느냐! 너희가 내 제자가 될 때는 생각을 하고, 따져 보고 내 제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여러분, 성경은 생각하는 것, 설계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 말씀은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입만 벌리고 있으면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질 것이니, 너희들은 전혀 먹을 것 걱정하지 말고 오늘 놀아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벌어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성경은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그래서 저는 게으른 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일하기 싫으십니까? 자유를 드립니다. 노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실컷 놀거라! 그러나 입에 지퍼를 잠가라! 먹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오늘 예수님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내일을 설계해야 합니다. 내일을 위해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금하신 것은, 내일에 대한 염려스러운 생각을 오늘 중지하라는 겁니다. 내일의 염려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여기에 "메림나테(염려하지 말라)"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세 번 쓰였는데 그 중에 어디에서 쓰였는가? 우리가 잘 아는 사건 가운데 하나 쓰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마르다의 집에 찾아오신 후, 마리아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무릎 앞에 같이 안방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니 마르다는 어떻게 합니까? 장정 열세 명이 들이닥쳤으니 얼마나 바쁘겠어요.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된장 찌개를 끓이고, 부침개를 하고, 마늘을 다듬느라 정신없이 바쁜데, 옆에서 도와줘야 될 한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어디 갔나?" 하고 안방을 들여다보니까 앉아있더란 말이에요. "음~ 곧 나오겠지" 마늘을 다듬는 사이에 부침개가 탔습니다. 잽싸게 뒤집었는데 늦었어요. 아! 또 가보니까 마리아는 거기에 앉아 있는 거예요. 얼마나 신경질이 뻗칩니까? 탄 부침개를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면서 몇 번이나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릅니다. 파를 다듬고, 양파를 다듬느라 눈물이 나고, 밥은 끓습니다. 그 당시에 압력밥솥이 있습니까? 전기가 있습니까? 마이크로 오븐이 있습니까? 그런데 열세 명이 먹어야 할 음식을 준비해야 돼요. 그렇게 음식을 준비하다가 마르다는 어떻게 합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드디어 마르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어 갑니다. 주님이 저와 같이 설교하고 있는 그 장소에 뛰어 들어서, 마르다는 뭐라고 소리칩니까? "예수님! 내 동생이 나를 도와주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시나요? 지금 당장 명령해서 내 동생을 부엌에서 일하라고 보내십시오!" 여러분, 마르다가 그냥 뛰어 갔겠어요? 제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한쪽에는 주걱을 한쪽에는 국자를 들고 가서 예수님께, 열두 장정 앞에서 쇼를 한 것입니다. 한참 퍼붓고 나서 부엌에 돌아온 후,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르다의 집을 방문한 것이 어디 보통 일입니까? 평생 가도 한번 모시기 힘든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자기 집에 왔어요. 너무너무 귀한 손님이 와서 만찬을 차려 드리려고 준비하다가, 동기야 어찌 되었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예수님 앞에 가서 밥주걱을 들고 난리 소리를 치고, 하이 소프라노로 "예수님!" 하며, 악을 써 놨으니... 마르다는 다시 예수님 보기가 미안했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그 성경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그게 뭔 줄 아세요?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음식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지라' 이 '분주하다'는 단어가 바로 염려예요. 주걱을 들고 막 악을 쓰는 마르다(성경에 이런 얘기는 없음)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왜 두 번 불렀겠어요? 사랑의 마음으로 마르다를 좀 진정 시키려고, 아마 바리톤으로 불렀을 것 같아요. "마르다야!" 악을 쓰니까,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또 나옵니다. 많은 일로 뭐 했다고 말씀하십니까? '염려하나'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는 옳은 일을 했고, 마르다는 잘못된 일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아요. 설교를 듣는 일도 중요하지만 음식을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실수는 뭐였습니까? 그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분주한 마음으로, 염려에 가득 차서 했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혼란하게 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어요? 열세 명의 장정 앞에 주걱 들고 원맨쇼를 한 것입니다. 문제가 뭐였어요? 그녀의 염려 때문이였어요.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부탁이 아닙니다. 강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될 명령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일을 설계해야 합니다.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지 말아야 할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염려를 하지 말아야 된다고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이 명령을 마음으로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명령이에요.
여러분, 저는 제가 완벽해서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이 본문을 준비하며 제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얼마나 많은 염려가 있었는지요. 내년의 목회 계획과 수많은 계획들을 세우며, 단순한 계획이 아닌 염려가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으며 설교를 준비하는데 예수님의 명령이 제게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어요. 염려하지 말라!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만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지, 염려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십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염려를 치유할 수 있는, 마음에 생기는 이 염려를 치료할 수 있는 예수님이 주신 방법은 25절에 등장합니다. 25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 다 중하지 아니하냐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조가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구조를 잘 살펴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으며 이 복잡하고 근심 많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1. 창조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깊이 묵상하라! 오늘 하나님은 이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두 가지를 대조해 주셨습니다. 목숨과 음식, 몸과 의복입니다. 여러분, 이 생명과 이 몸은 누가 창조했죠? 하나님이 창조하셨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은 다 말씀으로 만드시고, 인간 '아담'만은 하나님이 흙을 반죽해 가지고, 멋있게 보디빌딩한 사람처럼 남성 근육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잘못된 해석이에요. 히브리 원어에 보면, 하나님이 분명히 흙으로 창조하셨는데, (흙이 티끌 가운데 하나예요) 티끌 가운데 하나로 그냥 "짠!"하고 아담의 몸을 만드셨어요.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보면 마술사가 호박에 손을 대니까, 호박이 마차가 된 것같이 그런 것이지, 하나님이 손으로 빚어 만드신 게 아니에요.
또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반죽을 해서 인간의 몸을 만드시고 숨을, '생기를 불어넣으시니라'는 말씀을 보며, 인공호흡법을 연상합니다. 그래서 최초의 키스가 거기에서 나왔다고 동성연애자들은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최초에 키스를 하니까 인간이 되었다. 봐라!"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입이 있으십니까? 인공호흡 하시게. 하나님의 인격의 일부, 하나님의 영성의 일부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셔서 사람이 되었어요. 중요한 건 우리의 생명과 목숨과 몸을 누가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논리가 무엇인줄 압니까? 무엇이 중요한가? 몸이 중요하냐, 옷이 중요하냐? 아무리 옷이 날개라 해도 둘 중에 어떤 걸 택할래? 완벽한 양복을 택할래? 아니면 다리 한쪽 없는 몸을 택할래? 누가 양복을 택하겠어요? 당연한 결과 아닙니까? 음식이 중요하냐, 목숨이 중요하냐? 목숨이 중요하죠. 오늘 예수님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몸과 목숨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덜 중요한 것을 너희를 위해 공급해 주지 않겠느냐? "
여러분이 보석상에 갔습니다. 남루한 평상복 차림으로 갔어요. 보석상이 다른 사람들 다 맞으면서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진열대 앞에서 다이아몬드 1캐럿 짜리를 탁 찍으면서 "여보시오. 저 1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꺼내 보시오" 말하니까, 갑자기 이 사람이 놀라서 뛰어 오더니, "하실 겁니까?" 흥정도 하기 전에 "얼마요?" 하더니, 지갑을 꺼내어 수표로 계산을 해 버렸어요. 1500만원! 이 보석상이 "사장님!" 이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합니까?
1캐럿 짜리 다이아몬드를 여러분이 사고 1500만원을 지불하면, 신문지를 찍 찢더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다이아몬드를 싸주는 보석상 봤어요? 아니죠. 여러분이 1캐럿 다이아몬드를 샀으면 당연히 무엇이 따라올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다이아몬드를 담을 보석상자를 당연히 기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보석상자 값이 얼마요?" 하고 묻는 사람 있습디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목숨과 몸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그 목숨을 위한 음식과 몸을 위한 의복을,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보석상자와 같이 공급하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왜 염려하느냐! 오늘 나의 창조의 섭리를 묵상해 보아라. 얘들아!"
여러분,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때로 교회 안에 이신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신론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어요.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것은 믿지만, 오늘도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그 만드신 창조물을 유지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게 이신론이에요. 오늘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참새가 떨어져 죽으면 우연히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다 이신론자들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서 골로새서 2장을 썼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그것만 전파한 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뭡니까? 이 세상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명을 유지하고 계신 분이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우주가 돌아가는, 하나하나를 관장하고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묵상할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두 가지 대조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26절의 비유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여기 '보라' 하는 단어는 '관찰하며 세심히 보라'는 거예요. 그저 멍~하니 보라는 게 아닙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 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지금 또 대조를 하고 있는데, 새와 인간을 대조합니다. 차이점은 뭐예요? 새는 먹을 것을 심을 수도 없고, 거둘 수도 없고, 저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새는 염려하지 않고 먹고 살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심을 수 있고, 거둘 수 있고, 은행에 저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 줄 아세요? "심는 능력과 거두는 능력과 모으는 능력이 없는 참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즐거이 노래하며 살건만, 그러한 능력을 받은 너희들이 어찌하여, 먹을 것을 위해, 이 땅에 살 것을 위해, 집을 위해, 염려한단 말이냐!" 여러분, 이 메시지를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염려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아니라, 염려만은 그리스도인은 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보라는 겁니다. "나는 창조주일뿐 아니라 이 만물을 다스리는 자이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와 생명과, 여러분의 자녀와 건강과, 여러분의 재산 등, 모든 것을 통치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의 염려를 끊으십시다. 아멘! 염려를 끊읍시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깊이 기도 가운데 묵상할 때 우리 마음의 염려는 없어질 줄 믿습니다.
2.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지를 묵상하라
두 번째 우리의 마음에 염려를 없애는 방법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지를 묵상하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묵상할 뿐 아니라,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지를 묵상하라. 27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주 짧은 말씀이지마는 귀한 말씀이에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여러분, 제대로 된 성경책을 가졌으면 '키를' 할 때 '키'옆에 숫자가 있죠? 몇 번이 있어요? (1)번 또는 (2)번이 있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예, 좋습니다. 숫자가 없는 분은 다 가짜 성경을 들고 있는 겁니다. (2)번 밑에 보면 뭐라고 적혀 있어요? 예! 목숨 또는 생명. (2)번은 적혀 있는데 목숨과 생명이 없는 것은 완전히 사기 성경입니다. 왜 그렇게 적어 놓았겠어요? 어떤 사본이나 중요한 사본에 보면 이 헬라어 단어가 논란이 있어요. '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어떤 사본에 따르면 '목숨'이라고 넣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둘 다 같은 말이에요. "너희가 걱정한다고 너희 키가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 말씀도 되고요,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 목숨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여기 한 과장님과 같이 의사 되신 분은 "내가 의사인데 하루 정도야 연장 못하겠는가?"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못합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못하는 거예요. 생명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서 너희 목숨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겠니?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가 무익함을 묵상해야 돼요. 오늘 이 예를 들기 위해서 예수님은 또 두 가지 대조를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말씀하시고 대조하시고, 진리를 말씀하시고 대조해 주시고, 오늘 무엇과 무엇을 대조하죠? 백합화와 솔로몬!
오늘 여기 백합화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들꽃이에요. 그 다음절에 보면 들꽃이라 고 하는데, 우리 나라 꽃으로 말하면 들에 있는 양귀비꽃이나 아니면, 학명으로 말하면 아네모네 꽃입니다. 거기에 가까운 꽃이에요. 왜냐면 그 당시에 우리 나라에 아네모네 꽃이 없으니까, 성경번역자들이 적당한 말을 찾아서 그냥 백합화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어찌 됐던 들에 있는 백합화, 한국말에 번역이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하십시다. 백합화와 솔로몬의 차이가 뭡니까? 백합화는(식물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렇죠? 예를 들어 개(犬)는 무엇을 할 수 있어요? 얼굴에 흙이나 검정이 묻으면 앞다리로 비빕니다. 개도 흙을 털어 내요. 개도 화장하는 거 아십니까? 고양이도 화장합니다. 털을 예쁘게 하기 위해서 볼을 비벼요. 등의 털은 어떻게 멋을 내지요? 서로 핥아 줘요. 그러나, 식물인 백합화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하실 당시에, 그 때까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은 사람 가운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투자할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투자했던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솔로몬이었어요. 그는 부인만 해도 1000명이나 되었어요. 매일 부인이 바뀌는데 얼마나 머리를 잘 빗고 갔겠습니까! 얼마나 멋있는 양복을 입었겠습니까!
제가 달라스에 있을 때 한 부자 집에 갔는데, 그렇게 큰 부자도 아닌데 그 사람의 와이셔츠만 몇 벌인가? 와이셔츠만 해도 봄여름가을겨울 각 40벌씩 모두 120벌이이에요. 그리고 그 집에는 세탁소가 있었어요. 그 집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출근해서 무슨 일을 하는가? 그 집 가족의 양복, 와이셔츠, 내의만 하루종일 빨다가 퇴근합니다. 역시 미국에는 부자가 많아요.
여러분, 그 사람에게 비기겠습니까? 솔로몬입니다. 온갖 금과 그 당시의 온갖 좋다는 향수, 온갖 좋은 화장품은 다 써서 치장을 했을법한 이 솔로몬!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 완벽하게 치장을 할 수 있었던 솔로몬의 영광과 아름다움보다,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저 들녘의 아네모네, 양귀비, 백합화 중 누가 더 아름답니? 백합화가 더 아름답다 말씀합니다.
여러분! 염려하여서 이룰 수 없는 들꽃의 아름다움이, 염려할 수 있는 솔로몬의 아름다움보다 더 나았다면 너희가 왜 염려해야 하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논조입니다. 들꽃이 염려해서 아름답더냐! 너희가 왜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살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가끔 저는 교인들을 상담합니다. 교인들 가운데 아주 힘든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처음에 상담을 하면 힘을 내서 얼굴을 밝게 하고 상담을 해 줍니다. 그러면 걱정거리를 얘기합니다. 때로 30분, 40분 시간을 투자해서 드디어 그 염려거리가, 염려거리가 아님을 제가 증명을 합니다. 다 해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아멘!" 하고 돌아가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가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끝났는데 "그렇지만 목사님!" 하면서 또 다른 걱정거리를 늘어 놓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하루가 피곤합니다. 일주일이 피곤해요.
염려거리에 끝이 있던가요, 여러분? 염려거리를 찾고 싶으십니까? 뉴스를 들여다보십시오. '다대포 아파트가 기우뚱하더라'는 소식을 들으면 염려를 좋아하는 사람은 당장 나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살핍니다. 금이 갔는가? 무너지지 않을까? 밤에 잘 때도 침대 밑에서 자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아파트가 무너질까봐 쇠로 된 장롱을 설치해 놓는데요. 무너질 때 바치라고. 은행에 예금할 돈이 없을 때는 돈이 없어서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돈이 많이 생겨서 은행에 넣어 놓으면 우리는 무엇을 염려합니까? 은행이 부도나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지 아니하면, 염려거리는 끊이지 않고 다가옵니다. 정상회담만 바라봐도 염려거리가 생깁니다. 여당과 야당이 하는 말만 들어도 염려거리가 생기고, 기름 값이 올라가도 염려가 되고, 수없는 염려거리가 우리 마음 안에 찾아올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거리가 많은 것 내가 안다. 그러나 얘들아! 네가 염려함으로, 네가 염려하는 것 중에 눈곱만큼이라도 개선될 것이 있더냐! 염려가 얼마나 무익함을 묵상하거라!"
제가 언젠가 염려에 대해서 설교할 때, 한 예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했어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기억 못해도 예화는 귀신같이 기억합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가르치는 법칙이 하나님의 말씀은 재탕을 해도 예화는 재탕을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다 기억하니까요.
한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있었어요. 얼마나 염려가 많겠어요. 저는 사업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사업하는 사람이 위장병이 걸리고 머리가 많이 빠지는 것을 이제는 이해합니다. IMF가 온 후 얼마나 고민, 염려거리가 많겠어요? 그래서 도저히 신앙생활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사람이 너무나 힘이 들어서 하루는, 어떻게 할까 걱정하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한 아이디어가 생겼어요. '수요 염려 상자' 라는 상자를 만들어 놓고, 염려거리가 생기면 종이에다 쓰는 거예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어음 2000만원 막아야 됨' 이라고 써서 상자에 딱 넣어 놓고, 그 날까지는 염려를 안 하는 거예요. 잊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 염려하는가? 수요일만 되면 염려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 날은 팔을 걷고 "음, 오늘 한번 염려해보자!" 하고는 상자를 열고 염려를 푸지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염려를 하다가, 아주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요. 지난 금요일날 너무 염려가 되어서 염려상자에 넣어 놓았던 것 중 어떤 것들이, 자기가 그것을 위해 전혀 노력하지도 않고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는데, 5일이 지난 후에 보니까, 해결되어 있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썼는지 아세요? '수요 염려 상자'라는 재미있는 책을 썼어요. 그 책의 결론은 "여러분, 제가 해 보니까 염려는 아무 효험이 없습디다. 무익합디다"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에요. "너희가 염려함으로 너희 목숨을 한 달이나 더 연장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염려함으로 너희의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묵상해 보고 나서 염려하거라. 얘들아!" 오늘 이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아멘! 염려는 무익합니다. 염려는 무익하다! 염려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며, 제 마음에 있는 염려를 쌍둥이 칼로 다 잘라내었습니다. 아, 얼마나 기쁘던지요. 나도 모르게 염려의 이끼가 꽉 끼었더라구요. 미래를 위한 설계를 해야죠. 계획을 해야죠. 그런데 나도 모르게 염려가, 그 계획을 포장한 사탄의 염려가 내 마음에 꽉 끼어서 내 영(靈)을 누르고 있더라구요. 그것을 말씀의 칼로 수술한 순간, 오늘 제 얼굴이 환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기쁘게 이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염려를 치유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묵상해야 합니다.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3. 우리의 신분을 묵상하라
마지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방법은 당신의 신분을, 우리의 신분을 묵상하라는 겁니다. 31절,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 보니까 염려의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뭐죠? 염려의 삼위일체! 31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의 삼위일체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2절)
누구께서? 천부께서.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설명하시고 또 대조를 해 주십니다. 누구와 누구를 대조하죠? 이방인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이방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없는 자예요. 우리는 누구예요?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이 특권!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니엘, 에스겔과 그 어떤 선지자도,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는 단어를 쓴 자들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제 2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 다 이루시고 나서, 그 날 이후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떤 변화인지 아십니까?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으로 모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옛날의 하나님은 능력의 "엘로힘"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달라진 거예요.
여러분,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 보셨나요? 캐나다 사람들은 나이아가라 폭포 하나 때문에 먹고 살아요.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것보다 더 한 사람들입니다. 그 폭포에 들어가는데 입장료 받고, 배 태워주고 돈 받고.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지 몰라요.
하루는 어떤 사람이 너무 떳떳하게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설명을 쫘악 해 줍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물었어요. "당신 누굽니까?" 그랬더니, "나요? 이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입니다" "어~" 이 사람들이 너무 감동 받았어요. 그래서 밥도 사주고 별 걸 다 해주었어요.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물었더니, "우리 아버님은 하씨죠" "뒤에 성함요" "아, 나님입니다" 바가지 쓴 걸 알았지만 이 분도 교회 다니는 분이라 큰 것을 깨닫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 번 살아보세요. 지리산에 등산 가시다가도 "당신 누구요?" 라고 물으면 "이 지리산 주인의 아들 되는 사람이올시다" 여러분, 이렇게 한 번 살아보세요. 광안리에 가셔서 "바다가 너무 좋다" 고 누군가가 말하면 "제가 이 광안리 바다 주인의 아들이올시다"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 '아무개'예요. 하나님의 딸 '아무개'예요. 오늘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왜 염려가 있는가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신분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러한 뉘앙스의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몰라요. 6장 6절을 보세요.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7절,8절 보세요.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결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거예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얘들아! 너희는 이 땅에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야! 교회 밖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염려거리로 삼을지 모르지마는, 너희는 그것이 너의 걱정거리가 되어서는 안 돼! 왜? 그 걱정은,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너희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 너희는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는지 아니?"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음식과 의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음식과 의복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에요. 음식과 의복이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법으로 음식과 의복을 공급받아야 하는가? 염려함으로 거기에 착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함으로, 내가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구하면 음식과 의복은, 하나님이 자동으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공급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인 줄 압니까? 오늘 예수님은 이 염려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이 단어로 시작하셨어요. 25절을 보세요. 어떤 단어가 나오죠? '그러므로'. '그러나' '그러므로'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은 결론 접속사예요. 중요한 단어예요.
한 번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분이 맞선을 보러 나갔는데 자매가 마음에 들었어요. "아, 저 자매가 결혼을 승낙해 주면 너무 좋겠다"해서 조심스럽게 자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 자매가 드디어 연설을 시작합니다. "형제님, 형제님은 참 믿음도 좋으시네요. 학력도 제가 바라는 것 이상이고요. 키도 크시고요. 목소리도 참 좋아요. 그러나~" 그러면 뒤는 들어볼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러면 뭐예요? 들어볼 필요도 없어요. "할렐루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중요한 단어인데 연애할 때는 '그러나' '그러므로'를 신경을 쓰면서, 성경을 읽을 때는 '그러므로'가 나와도 앞을 읽을 생각도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영원을 지향하는 자의 재물관' 에 대해서 세 가지를 들었어요. "이 땅에는, 땅에 저축하는 사람과 하늘에 저축하는 사람, 하늘을 바라보는 자와 땅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재물(돈)을 섬기는 자가 있다. 너희는 하늘에 저축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느니라" 사람들이 왜 염려합니까? 땅에 저축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겁니다. 왜 염려합니까? 눈이 어두워 땅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염려하는 거예요. 이 땅에 살 90년, 100년만 생각하니까 염려하는 거예요.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의 몸이 밝아질 줄 믿습니다. 왜 염려합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속으로 돈을 섬기기 때문에 염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저의 문제이고 당신의 문제입니다. 염려는 어제도 찾아 왔고, 오늘도 우리를 괴롭히고, 내일도, 이 설교를 들은 다음날도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와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올바른 재물관을 가집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묵상하시고, 염려가 얼마나 무익한가를 묵상하시고, 우리의 신분을 묵상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있는 염려를 치유하는 놀라운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멘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