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동참하는 교회  (시146:6-10누10:25-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 사람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옷까지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해놓고는 가버렸습니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해서 딴 길로 지나갔습니다. 레위 사람 하나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는 못 본 체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에 그 길로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급히 다가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다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잘 간호해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고 부탁한 후에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을 보는데, 첫 번째는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여 지나가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이들은 교회에는 충실한 사람들인데 실천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나 종교가 그 사회의 양심을 대변하는데 종교가 이처럼 가난한 자들, 고난 당하는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그 사회 전체가 그러함을 말해 줍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치료해 준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당시 율법종교와는 상관이 없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단시하며 멸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뚜렷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신분에 있어서만 아니라, 무감각하고 각박한 저들과 달리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기 것을 아낌없이 주는 풍성한 마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대조가 됩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나 실제로는 그 율법이 지시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율법종교에 속하지 않고 사마리아인과 같이 행동하는 새로운 질서에 속하였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질서는 곧 하느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인과 자기를 동일시하므로 새로운 질서는 멸시를 당한 자들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멸시를 당한 자들, 가난한 자들 속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자들을 찾아 치료하며 구원하는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뜻합니다. 소외된 민중의 상처를 같이 아파하며 싸매 주는 데서부터 예수님의 구원역사는 시작되었고, 이것은 동시에 가난을 외면해 가는 기성 종교에 대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고난 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며, 치료하므로 고통을 무시해 버린 이 사회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소외된 민중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도전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화 <밀양> 이야기

최근에 상영된 영화 <밀양>을 저도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그 주연 배우인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졌지만, 이 영화만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는 드문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계가 많은 관심을 두게 한 영화로, <기독교사상> 잡지는 7월호에서 <밀양>을 특집으로 다루었을 정도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주인공 신애가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 하나를 데리고 남편이 생전에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돈 많은 부자인 척 땅을 살 것처럼 허세를 부립니다. 돈 많은 부자 행세를 하는 신애의 돈을 빼앗고자 그녀의 아들을, 그 아들이 다니던 학원원장이 유괴하여 결국 살해합니다.

죽음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며 오열을 하던 신애는 우연히 교회를 찾아 나가 통곡을 합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접한 주인공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처럼 전형적인 교인이 되어 이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면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에 빠져들게 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살인자를 용서해주고자 그 사람을 면회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살인자는 이미 자신은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으며, 주님의 사랑 속에 너무도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산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을 죽인 범인의 그 같은 모습을 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낀 주인공은 허탈감과 함께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내가 용서를 해준 적이 없는데, 하느님이 용서를 해주었다는 것"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절망하면서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나와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 살인자의 딸이 미용사인 것을 보고 뛰쳐나와 자기 집 뜰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이 영화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애를 좇아 다니며 함께 한 카센터 사장 종찬이라는 인물입니다. 전형적인 속물근성을 가진 사내였지만, 신애가 어려울 때 항상 그 곁에 있어 주었고, 신앙은 없지만 신애가 교회에 나가니까 자기도 나가 주차 정리도 하고 노방전도대도 따라다닐 정도였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집 마당에서 머리를 자를 때 거울을 들어준 사람도 종찬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결코 교회를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지만 믿는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객관적으로 비치는 교회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 불편함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교회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너무 피상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깊이 동참하는 대신 정해진 규범대로 행동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신애에게 열심히 전도한 사람들도 그가 안고 있는 깊은 상처에 접근하지 못했고, 겉으로만 위로하고 믿게 하는 일에만 열심이었을 뿐입니다. 굳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대조시켜 말한다면 <밀양>에 나타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쳐 간 제사장이나 바리새인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런데 반해 신애의 차가 고장날 때부터 함께 하기 시작한 종찬은 그야말로 껄렁껄렁한 속물인간이었지만, 신애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녀가 어려울 때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안인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사상> 특집 중 연세대 교수인 김상근 목사의 글 제목이 "송강호 복음서"입니다. 송강호는 종찬역을 한 배우입니다. 김교수는 그의 글에서 "밀양의 성자 송강호는 늘 심령이 가난한 자와 함께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송강호는 성자 이상입니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겉모습은 전혀 보통 인간이었지만, 그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종찬역을 잘 소화한 송강호였습니다.

고난을 외면한 구질서

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를 외면하고 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대표하는 율법종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그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지배계급이 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이 세운 율법의 의에 의한 사회 질서가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혜택을 누리면서 사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기성 종교인들은 고난을 당하는 자와 가난한 자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하면 그들 자신이 유지해온 질서가 온통 근본부터 흔들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해온 질서를 유지하고자 철저하게 고난 당하는 자들을 외면하고 소외된 민중을 더욱 멸시하고 천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고난 당하는 자를 만들어내는 억압과 지배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그것을 묵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또 다른 지배의 질서를 만들어 그들은 권좌에 앉아 소외된 사람들을 멸시하고 억압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소위 '죄인들'인 민중은 결국 이중으로 지배당하고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성장으로 이 사회의 기득권 층에 편입된 교회는 자기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그 주변에 강도 만난 사람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능하면 이런 가난한 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교회가 얻은 기득권의 삶에 편안히 안주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능하면 가난한 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빈곤인구는 8백만 명이고, 그중 최저생계비(438,000원)를 받는 사람이 150만 명이며, 비 수급자가 2백만 명, 차상위 계층이 약 4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의 20%를 웃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교회가 관심을 두고 국가의 복지정책을 더욱 확대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마땅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이들 편에 서서 이들을 억압하는 맘몬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함에도 오히려 맘몬의 편에 서서 이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즐겨 버림받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기존 질서가 죄악시하는 저들 편에 서셨습니다. 그들이 세운 구분을 철폐하셨습니다. 또한, 당시 사회적 안정의 성스러운 표시로 받아들여졌던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그 질서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종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시는가 하면 그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이룩해온 모든 질서를 기본부터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결국, 저들은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 후 얼마 가지 아니하여 그 예언대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그들이 쌓아올린 모든 질서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는 새 질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낡은 질서인 율법종교에 도전하시면서 새로운 질서인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또 친히 자기 몸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상처를 싸매며 마침내는 인간의 죽음을 그 몸으로 감싸 안고 십자가에 처형되시므로 인간을 모든 고통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치료해준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셔서 버림받은 자들, 고난 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영화 <밀양>의 송강호가 주인공 전도연의 아픔과 고민을 들어주고 궂은 일이나 좋은 일이나 항상 함께 하며 그 곁을 지킨 것처럼, 예수님도 늘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희랍어의 원래의 뜻은 사람의 내장으로 다른 사람의 느낌이나 상태를 껴안는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심장에 통증을 느끼면서 상대방의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 모든 질서, 모든 체제, 모든 세력들에 대하여 심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버림받은 죄인들에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복음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고통을 아파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곧 바로와 같은 모든 지배 문화와 역사에 대한 심판이요, 고난 받는 자에게는 구원의 새 역사가 시작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복음은 이 세상의 것들로 풍요하여 가난한 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진 기득권자들에게는 심판을 뜻하고, 지배자와 기득권자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낡은 질서를 확보하려는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그의 하느님 나라의 사업을 방해하려 했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죽음까지 껴안으심으로써 낡은 질서의 최후 보루까지 무너지고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오늘의 교회 역시 이 복음을 전하는 기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바로 왕으로 상징되는 모든 지배 체제에 대해서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새 질서를 거부하는 모든 이 땅의 지배 문화를 거부합니다. 이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하고, 저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모든 체제, 모든 권력에 대하여 종말을 선언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린 무감각한 이 사회에 대하여 추수의 때를 알려 줄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그 지배 체제가 낳은 버림받은 민중의 상처를 싸매며, 그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면서 함께 울고, 함께 호흡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합니다. 교회는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자연 반대와 박해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난 속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갑니다.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이룩함으로 이 사회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하게 될 때, 그래서 기득권을 얻고 지배자와 타협을 하게 될 때, 그 교회 역시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양적으로 성장했다 하더라도 이 사회 속에서 어떤 기득권을 누리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끝까지 가난한 자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 나갈 때 새 질서인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든 자, 배고픈 자, 버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민중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해 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지배 체제와 그 문화를 비판하심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양극화를 당연한 질서로 여기는 기득권 세력을 거부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십자가를 통해 얻은 참다운 부활의 승리가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이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되어야 하며, 동시에 고난 당하는 민중의 상처를 싸매 주면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여 모든 반대와 고난을 극복하면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 속에 풍성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교회의 규범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8백만 명의 빈곤한 사람들, 한미 FTA로 낙심하고 있는 농민들, 50만 명 가까운 이주노동자들, 그리고 북한의 굶주린 수많은 아이들 등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아픔들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가슴 아파하며 기도해야 할 제목이며, 이런 커다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우리의 작은 힘이지만 쏟아 부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실 때 이런 문제들을 유심히 살피고, 관심을 기울여 그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회의 약자들 편에 항상 서서 그들의 외침을 귀기울여 듣고, 그들의 아픔에 어떻게 동참할까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개혁되는 길은 주어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 거기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 가능합니다. 안동교회가 백 주년을 뜻 있게 맞는 길도 거창하고 화려한 어떤 사업을 하거나 기념관을 짓는 것보다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돌봄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들을 만난 사람을 돌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유경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