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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생활 (벧전 3:8-17)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8-12절 말씀을 살펴보면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의 마음이 얼어붙기 쉽습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 미움의 화신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계속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하려면 “마음을 같이 하라” 했습니다. 헬라 원어에는 ‘호모’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질적인 일치, 동질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일치될 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면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 적어도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형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방법의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한 시비를 가리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원칙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 왜”라는 데 관해서 절대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문제가 있으면 안됩니다. 정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불일치는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모두가 꼭같은 생각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근원적인 것에 관해서는 마음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에 관해서는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원적인 것,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 교리의 근본인 성경이 큰 소리로 강조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는 절대로 마음이 갈라질 수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것에 관해서 마음을 모으면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 선교의 공동 목표를 향해서 똑같이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사랑이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체휼하라” 했습니다. ‘체휼’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는 두 가지 낱말이 결합된 것입니다. ‘같이’라는 말과 ‘느낀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느낀다’는 뜻입니다. 체휼이란 이웃의 기쁨과 이웃의 슬픔, 이웃의 모든 삶의 장에 동참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정말 형제를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 주변에 있는 이웃들의 기분에 동참하고 이웃들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출세해서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성공해서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약자를 동정하는 것은 다소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보고 함께 손뼉 치며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면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지체 의식을 가지고 슬픔과 기쁨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라”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보면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제일 강조된 것이 바로 이 불쌍히 여기시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방황하는 수많은 무리를 바라보실 때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더라” 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이 사람들을 보시던 그 눈으로 사람들을 지켜보십니까? 그리스도 없이 무작정 걸어가고 있는 저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 없지만 “불쌍히 여기는” 일이 우리 믿는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 때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이나 허물을 용납하면서 긍휼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의 약점을 비난하기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모든 교회의 모습은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실수 하나 하지 않고 허물 하나 없이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쌍히 여기는 삶의 태도가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다음엔 “겸손하라”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 사이에 형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겸손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 겸손의 문제를 우리에게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겸손의 가장 훌륭한 모본으로 예수님을 말씀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7절을 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겸손이란 어떤 태도를 말합니까?
골로새서 2장에서 겸손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8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절대로 갖지 않아야 할 태도를 말씀했는데, 그 말씀 가운데 하나가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꾸미는 겸손,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겸손의 정신, 겸손한 영성의 핵심은 한마디로 종의 정신입니다.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서 섬기는 태도를 가지는 그 순간 나는 저절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겸손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게 대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섬기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종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국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이 계급처럼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지도자,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섬기는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받으려고 하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려고 하고, 섬기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면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섬기고자 하는 마음, 곧 겸손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형제를 사랑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 9절을 보세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했습니다.
나를 악하게 대하는 사람, 나에게 욕을 하고 험담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될까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참으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의 태도로 그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월권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을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우리가 원수를 갚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원수에 대한 태도가 정립된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행한 일을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은 잊어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했다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선언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잊으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다 옮기셨고 기억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로 던지시리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다음에 깊은 바다 속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다에 우리 죄를 던져 주시는 주님은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십니까?
이사야 38장 17절을 보세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죄를 등 뒤로 던지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죄는 주님의 등 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죄를 보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등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경구절은 신구약 성경에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을 잊었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르게 정립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의 잘못을 잊어야 할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리어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 생각만 해도 괴로운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람을 축복해 보세요. 그러면 내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놀랍게 치료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합니다. 기도해 보세요. 축복해 보세요. 그러면 얼마 후에 하나님이 그 상황을 주장하사 놀랍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원수에게 도리어 복을 빌라고 말한 후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말씀했습니까?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이고, 이런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이런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준비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유업의 복은 물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풍성한 축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다. 그 다음의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 복은 미래적인 복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누리는 복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축복하는 삶을 살 때, 그 복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원수를 미워해 보세요. 이를 갈아 보세요. 점점 더 비참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굳어지고 혈압이 오릅니다. 식사도 안되고 해도 소화가 안됩니다.
결국 누구의 손해입니까? 자기 손해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제일 비참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에 뭐랬어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했는데 여기서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은 “한 영혼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삶을 즐기면서 살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한 번밖에 못 사는 이 삶을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 있게 살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했습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웃과의 바른 관계 없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한 날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깨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인간 관계의 균열과 갈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인간관계가 금이 가면 우리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기를 원하십니까? 바른 인간관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바른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먼저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10절 하반절을 보세요.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 지체 중에 제일 먼저 활동하는 것은 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혀를 금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의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11절을 보세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하지 않았지만 잘못한 사람을 인하여 이를 갈다보면 얼마 후에 나도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떠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세요.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켜 “저들이 참 하나님의 사람들이다”라고 감탄할 때가 언제일까요? 우리가 화평의 삶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화평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 저들은 무엇인가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살면 어떻게 하신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며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눈과 낯”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주님의 눈과 주님의 얼굴에 대한 추억이 많을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던 자기를 바라보시던 주님의 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감회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에 관해서도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익숙하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의 낯은(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주신 말씀 13-1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기서 ‘두려움’이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조금 전에 읽은 13-15절 말씀은 구약 성경 이사야의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앗수르나 수리아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두려워하게 되며, 두려워한 나머지 그 두려움을 면키 위해서 쉽게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올 때 먼저 기억할 것은 거룩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이 되는데’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고난을 받을 때 위기에 직면하면 사람과 타협하기 쉽고 그러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했어요. 무슨 말입니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할 때에도 타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그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죄를 짓기보다는, 오히려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뭐랬어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우리는 사람들을 주님으로 삼기 쉽습니다. 나를 위협하고 나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그 대상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도 예수님이 주님이십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주님’이라는 말은 역사를 통해서 두 가지로 쓰여 왔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킬 때 쓰여졌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과 두려움이 직면해 오는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거룩함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내 삶을 구별해서 나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일생에 한번 결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분을 위해서 내 삶을 온전히 바친 체험이 있습니까? 성경은 바로 이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인기 있는 사람을 따라가는,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나의 삶의 주권자로 삼은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것만큼 전도를 용감하게 할 수 있고, 타협하는 것만큼 전도의 능력은 상실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난이 와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는 이 분명한 삶 위에 서게 되면 그 고난은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위대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언제 복음의 영광이 제일 많이 드러났습니까? 순교 시대, 박해를 받을 때였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지 않아 결국 핍박을 받게 될 때처럼 복음의 영광이 많이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면서도 고민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들이 죽으면서도 찬양하며 기뻐할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면 그만큼 우리의 복음 전도는 빛과 영광을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예비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온유와 두려움입니다.
그러면서 1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양심이란 ‘함께 본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를 따라 가는 것이 양심입니다.
어떤 이는 양심을 ‘영혼의 창’이라고 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이 맑으면 영혼의 창이 맑아집니다. 이 맑은 창을 통해서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했습니다.
양심은 귀하면서도 흔들릴 수 있고 더러워질 수 있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화인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끝으로 어떻게 하면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1. 죄가 들어오면 즉각 죄를 토해버려야 합니다.
2. 성경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3. 내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출처/박조준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