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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성공 (시 73:1-11, 16-17)
본문은 아삽이 지은 시입니다. 아삽은 레위자손으로 성전에서 찬양대 수석악장으로 활동하였던 아주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눈물로 기도하던 정결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 아삽이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것을 목격하고 회의를 느끼고 시험을 받고 때로 분노도 하고 실망하였던 마음을 본 시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저희는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쯤 되면 약이 오릅니다.
더구나 그런 모습을 보고 다수 백성들이 생각 없이 동조하고 따르는 현실을 볼 때 더욱 약이 오르고 허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삽은 “내가 그 모습을 볼 때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배교까지도 생각하였다 그 말입니다. 배교라는 말은 하나님을 버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는 대단히 실망하게 되고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여기 아삽이 그렇게 실망하여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이곳저곳에서 아삽은 현대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갈등이고 고민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자에게 선을 행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사람에게 복을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악인은 실패하게 하시고 벌을 내리시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시인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형통하는 것을 목격하고 납득이 되지 않아서 “넘어질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두 눈 뜨고 바라보고 계시는데 왜 악인이 형통하는 것입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때로 선한 사람들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이 악한 사람들이 그뿐 아니고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힘이 강건“(4)한 일입니다. 악한 사람이 잘 먹고 편히 살다가 죽을 때도 곤히 죽습니다. 그들에게 “고난도 없고 그들에게는 재앙도”(5) 없습니다. 오히려 형통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약이 오르고 속이 상합니까.
그러면 조용하고 겸손하게 살면 또 덜 할 것인데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6)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은 하늘이요 그들의 입은 땅에 두루 다니도다”(9). 그들은 또 돌아다니며 진리를 다 안다고 큰소리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정말 교만이 목걸이입니다.
그런데 더 속이 상하는 것은 생각 없고 지각 없는 백성들이 그런 모습을 흉내내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이 ...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12). 이것이 더 마음이 상하는 일입니다. 지각이 없는 백성들이 그 교만한 사람들의 행동을 따르고 동조하면서 덩달아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하나님을 배교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0절의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라는 말은 그렇게 악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고 따른 다는 말입니다.
간혹 보면 오늘도 줏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돼지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낼 때 넙죽 엎드려 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딸을 시집보낼 때 택일하기 위해서 점쟁이 집을 드나드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우리 집 이웃에서 교회를 건축하고 있을 때 집값 떨어진다고 동네사람들과 제일 앞장서서 교회건축 반대를 외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중에는 동네사람들을 선동해서 앞장서서 결사반대를 외치는 직분 자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아삽이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도 속이 상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생각 없이 백성들이 따라 본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또 더 마음이 상하는 것은 그 악한 사람들이 마땅히 망해야 하고 재앙을 만나야 하는데 오히려 더 편하고 재물은 날로 더욱 불어나는 일입니다(12). 그러니까 더 화가 나고 하나님을 향해서 의심이 심화되고 과연 정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인가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혼란을 겪는 때입니다. 그때는 내가 과연 혼자서 계속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이 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하고 한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양심껏 사는 것이 마땅하고 보람 있는 일이지만 때로 억울하고 헛된 일처럼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무질서하게 거리를 다니는데 나 혼자 교통법규를 지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람들이 모두 산에 오물을 버리고 다니는데 나 혼자만 자연보호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삽은 16절에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 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16)고 하였습니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고통도 낙심도 시험도 갈등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아삽이 겪게 되는 이런 갈등과 유혹과 시험을 다 당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삽이 그렇게 낙심하고 실망하고 마침내 넘어질 뻔하기까지 갈등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이 그런 악한 사람들을 그냥 놔두시는 이유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치고 쾌재를 부르게 됩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도다”(17)고 고백합니다. 아삽이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공부할 때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성경을 들고 읽고 묵상할 때 그 속에서 그 비밀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악인과 죄인과 불법 자들이 형통하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냥 놔두시는 이유와 그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18-19)하고 고백합니다.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는 말씀은 “악인은 여차하면 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결심하시면 악인들이 크고 빠르게 미끄러진다 즉 망한다” 그 말입니다.
아삽은 비로소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미안함과 죄송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아삽이 고백하기를 “내 마음이 산란하여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하고 말합니다. 알고 보니까 너무 두렵고 충격적인 일인데도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했으니 생각해 보니까 마음이 찔렸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자신을 우매한 짐승에 비유(22)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고 시험을 받고 유혹을 받고 하마터면 미끄러져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교할 뻔하였는데 그렇게 넘어지지 않은 것도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기 때문(23)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삽은 여기서 결론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무릇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은 망할 것이다”(27)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다”(28)라는 말입니다. 아주 지당한 결론입니다. 아삽은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일들을 통해서 아주 지당한 메시지와 교훈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자신있게 본문에서 결론을 지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그 시대를 경건하게 살아가던 아삽이 세상을 보면서 겪은 마음이고 생각이고 깨달음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시험을 받고 때로 배교까지 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짧은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얼마든지 악한 사람들이 망하지 않고 더 성공하고 형통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때로 악인들도 선한 사람들 보다 더 형통하고 더 잘 살고 건강하고 죽을 때에도 큰 고통당하지 않고 조용히 죽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 아삽뿐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도 속이 상하고 신앙에 회의가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시각에 대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해답서 입니다. 이 본문이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악인도 형통할 수 있다”
악인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누구 보다 더 잘 살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선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하나님은 왜 저런 악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가? 이해가 안 되고 의심이 들고 시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정직하게 기도를 많이 하면서 양심껏 살아가는데도 아픔이 있고 고난이 있고 때로 실패도 경험하였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가는데 왜 저 악한 사람들은 잘 살고 평안할까 하는 실망감을 느끼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제일 속이 상하는 시험일 것입니다. 오늘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섭게 나타나거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와서 신앙인들을 넘어지게 하고 부러지게 하고 망하게 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탄의 작전도 상당히 현대화하였고 지능화 되었고 심리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탄은 마음으로 시험되도록 다가옵니다. 회의에 빠지게 하고 의심나게 해서 스스로 무너지게 하고 스스로 하나님 곁을 떠나가게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더 무서운 사탄의 고도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도 얼마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더 잘 살고 더 건강 하고 더 돈을 잘 벌고 뇌물을 받고 주어도 들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뇌물을 주고 먹고 그럽니다. 그런데 양심껏 살아가던 사람들 중에는 어쩌다 뇌물을 주다 걸리고 먹다 걸립니다. 악인들은 이 세상의 악의 질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잘 먹고 주기 때문에 잘 걸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람들은 그 길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걸리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도 얼마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감추어진 깊은 부분
아삽이 악인들이 형통함을 보고 스스로 시험되고 낙심하다가 마침내 악인들이 죽을 때에도 곤히 죽는 것을 보고 분노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넘어질 뻔 하였고 실족할 뻔하였는데 그 아삽이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읽고 기도 하던 중에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뜻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아삽은 그때서야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짐승이라” 하고 죄송해 합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니 그렇게 무지할 수가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아삽이 깨달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악인들을 그냥 놔뒀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삽은 그 잠시 놔두는 동안 악인들의 형통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시험 들었고 낙심하였고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짧은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한심했던지 그는 “나는 짐승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너무 무지하고 무식하였다 그 말입니다.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도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면 얼마나 안다고 말입니까.
신앙에도 지식신앙이 있습니다. 이성신앙이 있습니다. 그 수준으로 이 세상의 이치를 전부 아는 듯이 떠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성신앙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론내리고 스스로 시험 들고 회의를 느끼다가 그 회의가 깊어지면 배교까지 하는 그런 무지한 모습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시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시고 참으심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아삽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말씀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깊으신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알았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경우를 이렇게 이해하면 빠를 것입니다. 옛날 제가 어렸을 때 보니까 추석 보름 전쯤부터 암퇘지에게는 먹이를 조금 주었습니다. 그런데 수퇘지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암퇘지는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댔고 수퇘지는 아주 게걸스럽게 혼자 그 많은 먹이를 다 먹어치웠습니다. 그래서 수퇘지는 살이 뒤룩뒤룩 쪄서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라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수퇘지에게만 먹이를 많이 준 이유를 나는 추석 전날에 가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어느 순간이 되니까 그렇게 편안하게 먹을 것을 많이 줘서 살이 찌게 된 돼지를 잡아서 추석 상에 올리는 것을 보고서야 모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평소 편안하게 해 주고 실컷 먹도록 해 주고 어느 추석 전날 죽고 싶습니까. 사형수는 감옥에 갇혀 있지만 맘대로 놓아둡니다. 그래서 사형수는 감옥 안에 있지만 잠자고 눕고 놀기도 하고 편안합니다. 여러분, 사형수가 평안하다고 사형수가 되고 싶다고 부러워할 수 있습니까. 사형수들에게는 그렇게 평안하게 지내게 하고 실컷 먹게 해 주지만 어느 날 한꺼번에 책임을 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바로 그 점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무릎을 친 것입니다.
그리고 본 시 끝부분에 가서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은 망할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다”(27-28). 여기에 더 붙일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생각이 짧고 지혜가 짧아서 좀 깊이 감추어있는 것들은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생각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스스로가 시험이 되고 낙심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좀 놔두고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깨달아 알 수 있는 기회도 주시고 지혜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깊이 감취어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게 하시고 깨달아 따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삽도 우리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그 시대를 살면서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낙심하고 갈등하고 넘어질 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때 비로소 그 깊으신 하나님의 뜻과 숨겨진 섭리를 비로소 깨달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 고백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말씀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