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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서 이기자 (디모데전서 6:11-16)
사울 왕은 골리앗에게 패배를 했고 골리앗은 다윗에게 패배를 했습니다. 이 관계를 보면 사울 왕이 골리앗에게 패한 것은 싸우지도 않고 패한 것입니다. 아예 싸울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벌벌 떨다가 패했던 것입니다. 골리앗이 다윗에게 패한 것은 같이 싸워서 골리앗이 패했습니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요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수입니다. 두 사람 다 패했지만 사울 왕 보다는 골리앗의 패배가 명예롭습니다. 사울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패배이지만 골리앗은 싸우다 패했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싸워야 이깁니다. 어떤 분이 세상을 이렇게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더럽다, 이 세상은 악하다, 이 세상은 어둡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동의합니다. 더럽습니다. 깨끗해지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악합니다. 선하게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어둡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방향을 잃습니다. 함정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싸워야 됩니다. 이렇게 더럽고 악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이 열 배, 백 배의 힘든 싸움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말씀이 없는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힘든 싸움을 해야 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그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했는데 사도 바울이 가르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세 가지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으로 이기자
첫째로 우리는 선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 악으로 싸우면 안됩니다.
로마서 12장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싸워야 합니다. 규칙을 지켜야 하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만 선으로 이겨야 보복이 없습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이 세 개나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남자 삼천 미터 릴레이, 남자 천 오백미터, 천 미터에서 실격을 당했는데 김동성 선수가 분명한 금 하나를 땄는데 실격이 되었고 두 개는 억울하게 실격이 되었습니다. 좀 의미를 부여한다면 금 세 개를 놓친 것입니다. 특히 남자 삼천 미터 릴레이에서는 금을 딸 가능성이 많았던 종목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 선수들이 상대방에게 가해를 하고 악한 방법으로는 경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선수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정당하게 싸웠습니다. 상대방이 나쁜 방법으로 반칙을 한다고 해서 같이 싸워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사람이 악한 방법으로 산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우리는 선으로 싸워야 하고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악의 도구는 이 세상에 많습니다. 폭력이 악의 도구가 됩니다. 언어폭력, 무력, 물질의 힘으로 악을 저지르고 쾌락의 문화 등 온갖 것들이 악을 저지르는 도구가 되는데 우리도 이와 같은 악의 도구에 맞서서 악으로 대항하고 악으로 그들과 싸워서는 결코 안 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는 이 원칙은 절대로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실력으로 이기자
두번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력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려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를 이기게 하는 도구는 실력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해서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전공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맡은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실력으로 싸워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실력을 쌓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 실력을 쌓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인도하기 위해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세는 낮추고 실력은 높여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실제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도구는 물매입니다. 다윗의 물매 실력은 곰과 사자를 때려잡는 실력이었습니다. 물매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것입니다.
어떤 이가 구라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컴퓨터에 대가라 할만큼 실력있는 전문인이 되었는데 취직을 하기 위해서 이력서를 여러 번 냈는데도 다 탈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심한 정신적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패배를 당하면서 하나 깨달은 것은 진정한 실력은 소유된 실력이 아니라 사용되는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형의 인간과 사용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무엇이 실력입니까? 쓰여지는 것이 실력입니다. 사용되어야 실력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 '나는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실력이 아닙니다.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사용권의 개념에서 실력행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벌어서 가진 자로서의 실력자가 아니고 돈을 멋지게 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는 지금까지 팔백육십억 불의 기부금을 냈습니다. 계산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돈을 가졌지만 어마어마한 기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부를 한 그의 동기가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을 벌어서 쓸 줄 아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상대가 아니라 이 사람이 돈을 쓰는데 아무도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력의 실용성을 우리가 인식하기 바랍니다. 무엇이 실력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쓰여져야 실력입니다. 활용이 되어야 실력입니다. 실력이 없다고 움츠리지 마십시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님을 위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실력자입니다.
그리고 실력은 키워져야 되고 가꾸어야 됩니다. 미숙하면 쓰여질 수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 말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장 철없는 인생의 미숙한 격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몇 번 이겼다고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하는 그런 미숙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폴레옹을 쳐다볼 때 그 사람을 쓸 수 있겠습니까? 나폴레옹은 그런 소리를 했지만 그의 인생은 패배자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미숙한 인생을 쓰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나폴레옹과 사도 바울은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지식과 인격과 믿음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충분할 만큼 영그러져 있고 완벽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성숙함이 있었습니다.
실력은 여러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을 통하여 미국의 텃새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나라 뿐 아니라 러시아, 일본도 미국의 텃새 때문에 곤혹을 치뤘는데 억울한 것은 그런 나라가 이의를 제기할 때 받아들여져서 캐나다 같은 나라의 경우는 금메달을 다시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김동성 선수도 금메달을 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는데도 우리는 거부를 당했습니다.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는 것부터 기각됐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국력이 문제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올림픽 선수위원을 뽑는데 우리의 전희경 선수가 후보에 들어갔습니다. 열 명 중 네 명을 뽑는데 구라파 선수 출신들만 네 명이 당선되었습니다. 금메달을 네 개나 땄고 경력도 충분히 있는 선수였는데 결과를 보니까 동양권은 모두 탈락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국력을 키워야 됩니다. 국제 무대는 국력을 키우지 않고는 안 됩니다. 동계 올림픽을 보며 속상했습니다.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놓친 그 날은 온 국민들이 우울했습니다. 그야말로 실력은 키우고 가꾸어야 됩니다.
실력이라 하면 세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력은 하나님께서 쓰셔야 실력이 됩니다. 주님이 쓰시는 실력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이기자
세번째는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됩니다. 믿음으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앞의 두 개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실력으로 이겨야 되는데 거기에 믿음이 첨가되어야 합니다.
시편 3편1-6절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라고 합니다.
다윗이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위기입니까? 아들에게 반역을 당해서 왕궁을 쫒겨나는 위기를 당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던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버린 왕이다' 이렇게 빈정대고 있습니다. 천 만인이 나를 둘러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시적인 말이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얼마나 실감있는 말입니까? 믿음으로 싸우고 있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실력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이기기 위해서 악한 방법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궁중을 쫒겨나면서도 믿음으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탈선하지 않기 위해서 아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여호와여 나를 구원하십시오, 여호와여 오셔서 저 버릇없는 아들 녀석의 뺨을 한 대 때리십시오. 이빨을 뽑아 주십시오' 그런 기도입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하십니까? 이런 기도를 하면서 믿음으로 싸우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싸우지 않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전쟁해 주시도록 그 위기를 하나님 앞에 맡겨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한참 고비에 처해 있을 때 의욕을 잃었습니다. '이제 안 되는구나' 낙심하고 있을 때 그 부인이 어느 날 남편을 격려하기 위해서 지혜를 짜냈습니다. 상복을 입고 남편 앞에 나타났습니다. 마틴 루터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봐요, 왠 상복이오"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어느 아버지가 죽었단 말이오" "하나님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니 당신의 얼굴을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죽었잖아요. 왜 당신의 하나님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그렇게 힘을 잃고 있는 거예요?" 하고 용기를 북돋아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고 시작합시다.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이대로 안 되겠구나' 하는 거기서부터 믿음으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싸우면 아무리 실력이 있고 선으로 싸워도 마무리가 안 됩니다. 우리의 싸움에 마무리는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기고도 실수를 합니다. 이기고도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려면 믿음으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탈 때 제가 만약 이런 행동을 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조종실에 가서 조종사에게 "제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내 평생 소원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 운전을 한 번 해 보는 것인데 오늘 나에게 한 번 양보해 주시겠습니까?"라고 한다면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요? 당연히 제재를 받습니다. 제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요! 나도 비행기를 상당히 많이 탄 사람인데 내가 비행기의 구조를 다 알고 있소. 한번 맡겨 보시오." 그런다고 맡겨 주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은 그런 철부지 행동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했던 사람들는 많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학에 있어서 '유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연만물을 보니까 신이 있다. 인간의 양심을 보니까 신이 있다. 역사의 운행을 보니까 신이 있다. 그래서 신은 있다고 유신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논증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신은 있다고 논증을 하지만 하나님은 논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설명할 수도 없고 논증할 수도 없습니다. 신학자 크리소 스톰이 이런 말이 했습니다.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연구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믿고 찬양하고 그 분 앞에 복종할 신이지 그 분 앞에 대들고 대항할 신이 아닙니다.
맺는 말
선으로 싸웁시다. 실력으로 싸웁시다. 믿음으로 싸웁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겨야 됩니다. 우리의 순진한 아이들이 세상에 더러운 때가 묻기 전에 그 인격에 선이 채색되어야 합니다. 실력으로 무장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인격에 믿음의 씨가 심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라서 한평생동안 선으로 이기고 실력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이기는 우리 후대가 되기를 기도하고 투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싸움을 보십시오.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싸우는 싸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악으로 싸웁니다. 속임수로 싸웁니다. 그리고 믿음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싸움을 합니다. 성도는 그 싸움에 응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이 믿음의 싸움, 하나님이 복 주시는 승리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