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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만드는 사람 (마태복음5:1-9)
오늘 교회창립주일 감사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 107년 동안 을 하루 같이 지켜주신 은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건강한 교회로 지켜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수요일 오후였습니다. 서울연회가 은평교회에서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오후 목사 안수식이 끝나고 교회로 돌아오기 위하여 택시를 탔습니다. 운전석 옆 좌석에 앉는 순간, 기어스틱에 굵은 알로 만들어진 염주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간 기도를 드리고 조용히 말을 걸었습니다.
“기사님, 혹시 절에 나가십니까?”
“어느 절로 나가십니까?”
“얼마나 오래 되셨습니까?”
나의 조심스런 질문에 기사님은 친절하게 자신은 불교인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은평교회에 교회의 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질문을 이었습니다.
“혹시 교회에 나가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대했던 대로였습니다.
“교회에 나가보았지요, 그리고 지금도 아들놈은 교회에 나가고 있고, 청년부에서 회장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출석을 중단하셨습니까?”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아픔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별로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전도사님이 당신 집에 세를 살고 있었는데, 전도사님의 요청으로 편리를 봐드리려고 했는데, ‘전세보증금’ 에 복잡한 문제가 생겨서 적지 않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내용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전도사님도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기사님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속이 상해서 교회를 그만 두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기사님은 대화 중에 몇 번식이나 강조한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나, 하나님께는 서운한 감정은 없습니다.”
교회에 도착할 시간이 거의 다되었습니다. 대화의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기사님,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습니다. 전도사님을 도와드리려고 하시다가 오히려 큰 손해를 입으셨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잠간 있다가 말을 마무리했습니다.
“기사님이 전에 교회에 나가셔서 예배하고 기도하시던 일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기사님이 그렇게 손해 보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몹시 마음아파하실 것입니다. 전도사님 때문에 받은 손해배상을 하나님께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도 책임을 느끼실 것입니다. 기사님 언제든지 교회로 오십시오. 여기가 제가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명함입니다.”
세상에는 누구에겐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마음에 평화를 잃고 불편하게 살아갑니다. 사실에 근거했든지, 아니면 오해에 근거하였든지, 상처를 입은 이들의 마음에 주님의 평화의 회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 그 일곱 번째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성경원문을 보면 “화평케 하는 사람”을 ε?ρηνοποιο?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평화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평화를 유지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 이 세상을 보다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고린도후서2:14,15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고, 어디에서나 우리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풍기는 “향기”라는 말입니다. 그 ‘향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아하,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로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1.존재의 변화가 먼저라는 말입니다.
며칠 전에 악어 조련사가 악어한테 물려서 팔이 절단된 일이 있었습니다. 악어가 아무리 잘 조련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악어가 하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 그 본성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작년에 종로지방교역자들과 함께 호주에 갔을 때였습니다. 동물농장을 견학하고 있었는데 잘 훈련된 사자 우리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날은 비가 오고 있어 땅이 젖어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사모님을 사자우리에 아주 인자하게 앉아 있는 사자 옆에 서게 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자가 일어나서 사모님을 덮치려 하였습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자의 진흙발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옷을 버렸습니다.
존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거친 성질을 잘 다스리고, 교양을 함양하였다고 사람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요1:12,13,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고후5:17,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면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과 열린 관계에 있게 됩니다. 성령님과의 교통이 가능해집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은혜와 능력을 계속해서 공급받게 됩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에 놓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 사람은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2.자신의 삶속에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 속에 평화를 만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그래, 이만 하면 괜찮아!’ 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십니까?
솔직히 아직도 만족할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하십니까?
그래서 우리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의롭게 된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푸시는 이 은혜를 받아들이십시오. 인정하십시오. 날마다 그 은혜 속에서 강건하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튼튼히 붙드십시오.
찬송가 214장 4절입니다.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시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용납하신 것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여 주십니다. 성령님은 날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죄를 짓되,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수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붙드십니다. 그리고 또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관계의 축복을 아십니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자녀들에게는 삶의 혜택이 많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노력도 노력이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도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을 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계속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얼마 전에 제자훈련을 하는 중에 한 분에게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그 일이 있기 위하여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 분의 대답입니다.
“교회에 나온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다는 감격이나 기쁨은 별로 몰랐습니다. 그냥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다 보니까 교회생활이 자연스러워졌고, 이런 저런 봉사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확신반, 성장반, 전도폭발훈련 등을 받으면서 구원의 비밀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 분은 그 동안 구원도 못 받고,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구원은 받았고, 또 그 은혜를 누리고는 있었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체계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저런 교육의 기회를 통하여 내가 믿는 예수님을 확실히 알게 되고, 고백이 분명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지혜와 용기가 있습니다.
3.나 이외의 모든 것과 평화를 만들어야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모든 사람과 평화를 만들며 삽니다. 모든 이들 속에서 평화를 만듭니다.
한 수도원원장이 영성이 깊은 한 늙은 수도사를 찾아갔습니다.
“왜 날 찾아왔소?”
“예, 스승님, 스승님께서도 잘 아시다 시피 저희 수도원은 한 때, 젊은 지원자들로 북적대었고, 교회에서는 수도자들의 찬양소리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한데 요즈음은 영혼의 양식을 얻으려는 자원자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교회는 고요하고, 소수의 지도자들만 남아 있는 형편입니다. 저희 수도원이 이렇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수도원장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늙은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죄 때문이오!”
“우리들의 죄 때문이라고요?”
“그렇소, 무지라는 죄 대문이요.”
“무지라니요?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당신네 수도사들 중에 변장을 한 메시야가 한 분 계신데, 당신들은 그분을 모르고 있지 않소?”
“저희 수도원에 변장한 메시야가 계신단 말입니까?”
“그렇소.”
수도원으로 돌아오면서 원장은, 수도원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수도자들 어느 누구도 메시야의 인품과 자격을 갖춘 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수도원으로 돌아온 원장은, 스승에게 들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도자들 역시 원장과 똑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분이 변장을 하고 계시다니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 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그 때부터 수도자들이 서로를 대할 때,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 수도자가 변장한 메시야일지도 몰라!”
모든 수도사들이 서로를 메시야 대하듯 생활을 하게 되자 수도원은 곧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다시 과거와 같은 은혜로운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하지, 존경받을 짓을 해야 존경하지. 사랑하려고 해도 미운 짓만 골라가며 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존경하려고해도 스스로 멸시받을 짓만 하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랑받을만한 자만 사랑하면 나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40)
우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나그네 된 자, 굶주린 자, 헐벗은 자, 목마른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시를 당해도 저항 할 수도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더 많이 아름다워지고 좋아질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눈에는, 우리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예수처럼 보입니다. 그의 인격과 삶이 부족하여도, 그를 볼 수 있는 사랑의 눈이 열리면 그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인 저를 대수롭지 않게 보시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만, 그래도 우리교우님들 댁에 심방을 가면 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우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저를 주님의 종이라고 인정하시기 때문이겠지요. 혹시 제가 혼자 착각을 하는 겁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도 인간적으로 별 볼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저를 그렇게 대우해주시기 때문에 제가 사실은 존귀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함께 사는 여러분들 가족들이 훨씬 더 귀하고 훌륭합니다. 서로를 대하실 때, 메시야를 대하듯 해보십시오. 거기에 놀라운 평화가 임합니다.
이것은 비단 사람 뿐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마찬가집니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일로 받아들이고, 그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일이 남을 사기 치는 일이든지, 도둑질 하는 일이든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아닌 이상 세상직장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의 일터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의 일을 하듯 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 학습법을 가르친 김동완 전도사의 이야기도 그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학생들은, 공부를 하는 것도 예배하는 마음으로 합니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성경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공부하는 강의실은 예배 실이고, 공부시간은 예배시간입니다. 강의하는 선생님은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공부 시작 전에 선생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강의를 잘 깨닫고 알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강의시간에 진지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강의에 집중합니다.
그는 2000년도에 서울대학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학습법을 적용하여 학생들을 가르쳐서 우수한 대학에 보내는 SKY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서울대(S) 고대(K), 연대(Y)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학교에는 학교에서 별 볼일 없는 학생들을 모아서 다니엘 학습법으로 공부를 가르쳐 우수한 대학에 입학시켜왔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들로 더불어 평화 하라.”
출처/최이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