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살전5:1~8)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세계는 삽시간에 약육강식의 살벌한 싸움터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비축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상대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능력을 길러야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율곡(李栗谷)선생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이론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십 만 명의 양병(養兵)을 주청하였으나 당시 선조 임금은 이를 거부했다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겪으며 뼈아픈 후회를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지혜로운 백성들은 아무리 태평성대라 하더라도 유형무형의 가상적을 상정하고 이중 삼중의 방어력을 키우면서 안전을 유지하곤 하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잠시도 방심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5:8).
이와 같은 경고의 말씀들은 마귀가 활동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생활의 안전에도 반드시 유념해야 될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마음의 긴장을 풀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예측 못한 불행이 밀어닥치게 된다고 하며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와 안보불감증은 한계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정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하고 절규하던 이사야 선지처럼(사 21:11) 이 시대 어두움의 세력들과 치르게 될 큰 싸움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I. 예측할 수 없는 세상

성경은 사람이 사는 세상을 광야 또는 사막으로 비유하는가 하면(신 32:10), 노도광풍이 몰아치는 바다로도 비유하였습니다(눅 21:25). 이것은 모두 환난과 풍파가 많은 불안한 세상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대상(隊商)들은 언제 몰아칠지 모르는 사막의 모래 바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바다 위로 배타고 가는 사람들도 바람과 파도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일들이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1) 재난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적인 기술이 발달해도 재난과 사고는 예측할 수 없이 닥쳐옵니다. 세상의 끝 날이 될수록 더욱 그 회수는 잦아지고 그 양상은 대형화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1:25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여 각종 문화의 이기를 누리는 것만큼 거기서 오는 부작용이나 사고는 더 큰 인재를 불러옵니다. 또한 지진이나 해일, 태풍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난은 인간의 능력으로 막아낼 수 없는 위력을 행사합니다. 그렇지만 문명한 사회일수록 총체적인 역량을 모아서 여기에 대비하고 이를 최소화 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2)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숙명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날 때가 있은즉 죽을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전 3:11). 다윗 왕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내가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간다”고 하였습니다(왕상 2:2).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히 9:27).
세상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죽음을 면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자기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지만 그 날을 예측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혹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다가 전혀 생각지 않은 시간 죽음이 들이닥치면 아무 대책 없이 황당해 하고 맙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약 4:14).
참으로 신앙적인 사람은 죽음이 예측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이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의 생명이 밤의 한 경점같이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의 지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시 90:12).

(3)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성경은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21:1-2에 보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체질세계는 모두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그 때 거기 있던 천사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11).
그런데 문제는 그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오실 날짜를 자기만이 안다고 우겨대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4:36). 마태복음 24:44에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Ⅱ. 대비하는 자세

요즈음은 기상정보의 예측기술이 발달하여 홍수나 태풍 또는 폭설과 같은 자연재난을 예보하면서 이에 대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평소에 이를 예측하고 철저하게 대비하는 사람은 막상 재난이 왔을 때 무사히 넘기거나 피해를 줄이게 되지만 알면서도 방심하거나 태만히 했던 사람들은 엄청난 재난을 자초하여 인재(人災)를 불러왔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본문 성경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예측 못할 상황이 왔을 때 대처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도적을 만난 사람입니다.

2절에 “주의 날이 밤의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24:43).
도적이 올 때 주인에게 예고해 주고 오지 않습니다. 또 도적이 올 것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집 인줄 알았을 경우 오다가도 달아나 버립니다. 도적을 맞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집에는 도적이 안 올 것 이라 생각하고 방심하는 자입니다.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의 진언을 무시했던 조정이 침략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나라를 잃을 뻔했던 임진란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2) 해산하는 여인의 경우입니다.

본문 말씀 3절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경성하지 못한 신자들의 경우를 뜻합니다. 임산한 여인은 언제든지 해산의 날이 이를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날이 되면 그 고통과 아픔에 죽음 같은 불안을 겪곤 하는 것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한심한 사람들을 이렇게 비유하였습니다. 이사야 13:6-8에도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이 피곤하며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산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같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 빛의 자녀입니다.

그 날을 예측하고 확실하게 대비하며 기다렸다가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4-6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도적을 맞는 경우이거나,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해산의 고통을 겪는 사람의 경우는 모두 다 밤과 어두움에 속한 자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깨어 근신하는 자들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의의 태양이요(눅 1:79), 생명의 빛입니다(요 1:4).
사도 요한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1:7). 그리스도의 밝은 빛으로 조명 받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어두움의 세력에 짓밟히지 않습니다.


Ⅲ. 빛의 자녀들의 사명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리분별을 못하고 소경 놀음만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사 42:18-20). 어느 때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지고 흑암에 허덕이는 자들을 빛으로 인도해 주어야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신 목적을 그의 빛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2:9). 성도가 이와 같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1) 속지 말아야 됩니다.

야고보서 1:16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활동하는 세상에는 참된 것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참이라고 하여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귀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우는 사자와 같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 쉽게 분별할 수 있으나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하고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속고 맙니다(고후 11:14). 예수님께서도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였습니다(요 8:44).
오늘도 마귀의 사주를 받는 자들은 속으로 생명의 위협을 가해오면서도 겉으로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상대에게 같은 민족, 또는 인도주의적 사랑을 요구하면서 내심으로는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협박하며 공포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사실상 전쟁 상태나 다름없는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연한 현실을 두고도 오히려 주적개념을 없애는가 하면 민족공조라는 말로 평화가 정착된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 시인 호머(Homeros)의 글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Odysseia)에 나오는 「트로이 목마」(Troy 木馬)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국가 중 그리스가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퇴각할 때 거대한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군사를 숨겨 두었습니다. 승리에 도취된 트로이 진영에서는 그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갔는데 목마 속에서 나온 그리스 군인들은 간단하게 트로이 성을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2) 깨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5:13).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4:7).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쟁을 획책하는 무리들이 평화로 위장하여 대세몰이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정신 못 차리고 덩달아 날뛰게 되면 민족이 공멸하게 됩니다. 지도자나 백성이나 분별력을 잃게 되면 두 눈을 뜨고도 소경 놀음을 하게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폭군 아합은 이세벨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싫어하면서 언제나 자기에게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해 주는 선지자의 소리에 도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꾀어 아람과의 전쟁을 하게하고 그 전쟁에서 죽게 하도록 계획을 했는데 사마리아에 모인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 같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하며 왕을 안심시켜주었습니다. 그 말만 믿고 나갔던 아합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왕상 22;5-37).
어느 때나 깨달음이 없는 백성은 에서처럼 망령된 자가 되어 뒤늦게 후회하여도 돌이킬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맙니다(히 12:16-17).


(3) 파수꾼의 소임을 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은 망루에 올라가서 적정을 살피며 외적의 내습을 대비하여 백성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은 어떤 경우에도 위치를 이탈하거나 방심할 수 없으며 밤에도 잠을 자면 안 됩니다. 언제든지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파수꾼이 직무를 못 다하거나 적과 내통하여 이적행위를 하는 경우입니다. 이사야 56:10에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국토를 방위하는 군인들 중에 다수의 병사들이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는가 하면, 지휘계통의 책임자마저 적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는 듯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최근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므로 지금 온 세계가 비상을 걸고 나서는데도 우리 주변에는 오히려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로 국민을 안보불감증에 깊이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성이 무너진 다음 파수군의 소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에스겔 3:17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3:27에는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에 상관없이 파수군의 소임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 2:5에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