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신자의 7가지 모습과 특징)(엡 5:8-21) / 마태

에베소서는 교회의 모습과 신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1장에서부터 4장 16절까지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4장17절부터 6장까지는 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고 신자가 신자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하면서 저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엡5:8-21절까지의 말씀이 신자의 모습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성령 강림 주일을 맞이해서 엡5:8-21절까지의 말씀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들을 일곱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그 존재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어두움의 존재에서 빛의 존재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존재의 질이 바뀌어진 사람입니다. 그 존재에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어두움이던 존재가 빛이란 존재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장소에서 설던 존재가 빛과 생명의 장소로 그 현주소가 옮겨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주 안에서 빛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특징이 ‘주님 안에서’ 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이 바로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봉사하고,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살기도 하고, 주님 안에서 죽기도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존재의 질이 변화되고 존재의 현주소가 바뀌어진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 여기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의 모토로 ‘믿음만'을 내 세웠는데 그것은 좀 잘못된 주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믿음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믿음의 종교인 동시에 행동의 종교입니다. 그 행동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주님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된 사람들이란 착한 행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좋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착함이란 이웃에게 누추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하지 않고 덕을 세우는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하고, 이웃에게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며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4).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 그리스도인은 그 행동이 변화된 사람이고 선한 일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라.”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로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면서 사는 못된 존재입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12:19). 이 말은 눅12장에 나오는 부자의 독백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소원이고 독백입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이성택 목사님도 그런 욕망을 품고 살았다고 고백했고 지난 4월 8일 아침 조용기 목사님도 그런 욕망을 품고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 기쁨의 대상이 돈도 아니고 자기 자신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15:3). 사도 바울도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신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기브게 하며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우리 강한 자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롬15:1,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그리스도인은 기쁨의 대상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 ‘세월’이란 말은 ‘시간’이란 말도 되고 ‘기회’란 말도 됩니다. 헬라어는 ‘카이로스’입니다. ‘기회’ 또는 ‘때’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시간과 기회와 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여기 ‘아끼라’라는 말은 ‘사라’라는 말도 되고 ‘붙잡으라’는 말도 됩니다. 값을 치루면서까지 기회를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허송세월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꼭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그 기회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조선족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그 기회들을 재빨리 붙잡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을 채우는 내용물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술로 채우든지 욕심으로 채우든지 정욕으로 채우든지 지식으로 채우든지 무엇으로든지 채웁니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술이나 욕심이나 정욕이나 지식으로 채우는 대신 성령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 자신의 일부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와 기운으로 자기를 채우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으로 자기를 채우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사모하므로 성령을 자기 몸에 채울 때 기도가 뜨거워지고 찬양이 뜨거워지고 봉사가 뜨거워지고 구제가 뜨거워지고 사랑이 뜨거워지고 착함이 뜨거워지고 기쁨이 뜨거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할 때 삶이 부드러워지고 삶이 따뜻해지고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새들은 물론 인간은 노래하는 동물입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논 밭을 갈면서도 노래하고 고기를 잡으면서도 노래하고 운동을 하면서도 노래합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노래방이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조용필의 노래와 신승훈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이 송정미의 노래나 박종호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고, 유행가를 좋아하던 사람이 찬송가와 복음찬송을 좋아하게 된 사람입니다. 여기 시는 시편의 노래들을 말하고 찬미는 찬송가의 노래를 말하고 신령한 노래들은 복음찬송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이고 서로 부르는 찬송인데 궁극적으로는 주께 노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입술의 노래가 변화된 사람이고 항상 주께 노래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삶의 자세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인은 지배하는 자세에서 복종하는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인의 자세에서 종의 자세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피차 복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상전에게 순종하고 종들에게 순종하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종하는 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2:8). 사도 바울도 자기를 종이라고 부르면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의 종 바울과”(빌1:1).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를 좋아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그 존재와 행동과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은 지배하려는 삶에서 복종하려는 삶을 삽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모든 섬기는 살았다고 어거스틴이 참회록에 기록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살았고 손양원 목사님도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의 종처럼 살았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삶 복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특징 일곱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존재와 행동과 기쁨의 대상과 시간 개념과 마음과 입술의 노래와 삶의 자세가 변화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여주시고 사도 바울이 보여주시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변화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날마다 변화를 받는 삶이라고 롬12:2에서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오직 변화를 받아."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주위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어린 아기가 거름 마를 배울 때 자신도 기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우리 동혁이가 요사이 훌라 후프를 배워서 엄마보다도 잘 하고 할머니 보다도 잘하고 아빠 보다도 잘하니까 너무 신이 나고 너무 좋아하고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동혁이 엄마도 기뻐하고 할머니도 기뻐하고 아빠도 기뻐합니다. 할아버지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서너 번 밖에 하지 못하지만 동혁이가 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의 영적인 삶이 변화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성도들도 기뻐하고 우리 사회도 기뻐할 것입니다.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두 가지만 말씀 드립니다. 첫째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늘 사모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구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의 성도들 여러분들, 주님을 늘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항상 주님 안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늘 사모하고 의지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변화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뻐하시고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김명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