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그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곳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된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과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은사라든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외라고 해도 대부분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지하더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라든가 마태복음 4장 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 심각한 것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매우 구체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이 믿기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생업도 버리고 심지어 가족까지 다 버리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도 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삶 전부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비참한 최후를 맞으셨습니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가족들을 만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본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흘 간의 침묵의 날이 지나고 부활의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예루살렘의 밤은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둠이 드리워진 성 안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몹시 두려운 듯이 주위를 살피면서 슬그머니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계속 주위를 살피면서 한 사람씩 몰래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올 사람이 다 왔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대문을 굳게 잠갔습니다. 아무도 웃거나 떠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의 어떤 여자가 주님을 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물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까?”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여자는 직접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임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예수님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더라는 베드로의 말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그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못 자국난 손과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분명히 예수님이십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은 정말 기뻤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무 것도 예수님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정작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는 고민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8~39) 그러나 이제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제자들만을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 제자들로서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낸다고 하시니 가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서 주님의 평강을 전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주님은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우리 가운데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성령의 역사에 우리의 삶 전부를 맡기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 험한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평화의 사도로서 끝까지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신비한 은혜와 평강이 항상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