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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히11:13-16)
2006년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입니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 24시간 이라는 시간이지만 마지막 날은 의미가 다르게 여겨집니다.
마지막 이라는 말은 언제나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숙연함이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한 해가 시작될 때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품고 출발했지만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의 인생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쇼펜하우어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얼마나 깊이 명상을 하는지, 그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주변에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공원을 청소하던 사람이 그를 보고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신사 양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기에 아직도 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르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일어나서 집으로 가야 되지 않겠소?”
그 소리를 듣고서 쇼펜하우어는 정신이 든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이 바로 내 문제입니다. 나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요.”
그렇습니다.
인간의 어떤 지식도, 철학도 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이 무엇인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인생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은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규정합니다.
창47:9에서 야곱이 애굽 왕 바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13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며 나그네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인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살아갔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진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비록 당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명절이 되면 우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몸은 아직도 고향에 당도하지 못했습니다.
길은 밀리고, 육신은 피곤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으로 이미 마음은 설레고 있습니다.
비록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간 길은 고난의 길이요 힘든 길이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기쁨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외국인이나 나그네라고 증거했습니다.
여기서 ‘증거’(homologeo)라는 말은 ‘고백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온 성도들 앞에서 자기 신앙을 엄숙하게 고백하듯이 진지하게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가수 최희준 씨가 부른 감상적인 노랫가사와는 다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성경이 말하는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것은 엄숙한 신앙의 고백이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임을 고백한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정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임을 고백한다면 삶에 목표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나그네임을 고백하는 신앙인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까요?
첫 번째, 나그네 인생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나그네임을 말하지만 실상은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집착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 세상을 비관하거나 무시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서 재물을 얻고, 편안히 가족이 거할 수 있는 집을 소유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소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감사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나그네임을 고백하는 사람은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 부리지 않습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에 자족하며 감사합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왕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늘 행복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늘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발사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예, 저는 늘 제 삶에 대해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그 이발사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발사가 어떻게 자기의 삶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신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아마도 그 이발사는 99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 금화 99냥을 하사해 보십시오. 어쩌면 그도 달라질 것입니다."
왕은 그 신하의 말을 듣고서 그 이발사를 시험해보기로 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금화 99냥을 담은 주머니를 하사했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집에 돌아와 주머니 속에 든 금화를 책상 위에 쏟았습니다.
그리고는 금화의 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아무리 세고 또 세어도 99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 냥을 더해서 100냥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사에 욕심이 생기고 인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줄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행복한 마음이 사라지지 시작했습니다.
눈에는 핏발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얼굴도 수척해졌습니다. 어깨도 축 처져서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은 그도 99의 덫에 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사는 성도는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그네이다. 나는 어차피 빈손으로 가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값있게 다 쓰고 가야지.'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나그네 인생임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누가 자기가 타고가는 자동차 안에 멋진 그림을 걸겠습니까?
누가 자기가 타고가는 비행기에 침대를 들여놓겠습니까?
누가 여행가서 텐트를 치고 계속 거기에 살겠습니까?
잠시 머물고 있는 그곳이 영원한 곳인 것처럼 집착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두 손을 다 펴고 죽습니다.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인생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여관이다. 그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집에 잠시 묵고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그리고 우리의 연수는 그 집의 전세 기한과 같다."
우리는 잠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수한을 누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전세 집에서 하숙하는 하숙생과 같습니다.
내 것인 것처럼 자랑하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떠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잠깐 가지고 있다가 버려야 할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따라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모든 것 내려놓고 떠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삶의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둘째로, 나그네 인생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14절∼16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본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온 바 본향입니다. 땅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는 과거적인 본향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둘째, 더 나은 본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는 미래적인 본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서 영원토록 살 곳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 지향적입니다. 땅엣 것에 집착합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걸어갈 때를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몸은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온전히 출애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온 바 애굽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고깃 국물을 그리워했습니다.
애굽에서 누워 자던 푹신한 잠자리를 그리워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만 일삼았습니다.
롯의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히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하실 때, 자기의 나온 바 자신의 집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과거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의 나온 바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그곳으로 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미련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잠시 애굽 땅에 내려가서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모두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두 번 다시 그것들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줄달음질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 지향적인 삶이 아니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생토록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은퇴를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50평짜리 아파트 한 채와 퇴직금을 넣어 둔 은행 통장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큰 아들이 장가갈 때 50평짜리에서 35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차액으로 아들 부부에게 자그마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몇년 후 그는 딸을 시집 보내면서 다시금 20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는 가족들을 다 불러놓고 이렇게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과 내가 가지고 있는 은행 통장을 상속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죽는 그날, 이 집은 하나님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리고 통장에 있는 돈도 내가 천국에 갈 때 노잣돈으로 다 써야겠다. 그러니 욕심내지 말아라."
그리고서 그 장로님은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가 건축할 때 하나님께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물론 자녀들도 장로님의 뜻에 기꺼이 따랐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마십시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때로는 험난하고 고달플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늘 밝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나그네 인생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16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지켜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출3:6에서 보는바 대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실력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을 때 그것을 얼마나 자랑거리로 생각을 합니까?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 만 왕의 왕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날마다 동행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고, 우리의 삶 전폭을 책임져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감격스럽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이미 그 성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따끔씩 어떤 손님이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귀빈이라고 부릅니다.
"귀찮은 빈대"라는 뜻입니다. 말로는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되어 속으로는 내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25:3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곳은 이미 창세 전부터 예비된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이 성은 히11:10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성입니다. 얼마나 영화로운 성이겠습니까?
어떤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일찌기 홀로 되셨습니다.
그는 콩나물 장사를 하시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웠습니다.
자녀들도 잘 자라서 이제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권사님은 예전의 오두막집에서 홀로 구차한 삶을 계속해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자녀들이 권사님을 찾아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어머니, 이제는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혼자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말고 우리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사십시다."
권사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애원하니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구나. 너희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날 위해서 이런 집을 한 채 지어다오. 바닥은 온통 유리로 깔아라. 집의 기둥은 열두 개를 세워라. 그리고 기둥에는 각기 다른 보석을 박도록 하여라. 문도 열 두개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 문은 진주로 장식을 하도록 해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녀들이 픽 웃었습니다.
"어머니, 농담이시지요?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그 권사님의 말씀은 걸작이었습니다.
"왜 그런 집이 없니? 나는 이미 하늘나라에 그런 집을 분양받아 놓았다. 나는 곧 그곳에 가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그보다 못한 집으로 이사 가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예루살렘성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찬란한 성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곳에 올라가서 세세무궁토록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06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말은 나그네라고 고백하면서 이 땅에 천년만년 살 것같이 어리석은 욕심에 사로잡혀 보낸 날들은 아니었는지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을 따라서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그네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고백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양인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