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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 (삼상7:12-14)
오늘 이 자리에 정말 잘 오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신 것이 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위해 오신 발걸음이기에 잘 오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2006년 마지막주일인데 이 뜻깊은 자리에 오신 것이 잘하신 일입니다. 사실 시간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아침에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의 시간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있고, 또 일년이 있습니다.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방향과 목표가 달라집니다. ‘처음’하면 설레임과 기대감, 상쾌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지막’하면 언제나 숙연함과 진지함, 그리고 아쉬움과 후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의 부여 속에 인생은 성숙해져 가고, 신앙은 더 깊어 가는 것입니다.
한해의 마지막인 이 시점에서 우리 믿는 자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백할 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벤에셀’이라고 믿습니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찾고 있는 신앙의 사자성어가운데 이것보다 소중한 고백이 없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고백을 모두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난 한해동안, 아니 나의 모든 생애동안 여기까지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본문은 바로 에벤에셀이란 말이 처음 사용하게 된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2절에 그것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이 온 백성과 함께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불렀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실 여기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우여와 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지나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기념비를 세운 이후에 어떤 일이 임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임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스라엘처럼 에벤에셀을 고백하고, 기념하고, 다짐하고 나아가면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결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에벤에셀을 고백하면서 나아간 그들에게 임한 결과가 무엇일까요? 본문을 보면 그것을 3개의 중요한 단어로 집약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굴복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라고 말합니다. 에벤에셀의 고백과 신앙으로 나아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임한 축복은 굴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승리, 궁극적인 승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이보다 소중한 축복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이 집요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이란 나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정복할 때 가드와 가사에 약간 남겨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힘을 규합해 큰 족속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블레셋만큼 집요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이 나라는 아주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잊을 만 하면 또 공격하여 긴장하게 만듭니다.
본문에 굴복과 승리가 오기까지 앞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은 이들과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릅니다. 그런데 할 때마다 큰 패배를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은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궤를 앞세우면 승리할 것이라 믿었지만, 오히려 그때는 더 패배했고 언약궤는 블레셋의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사무엘은 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전쟁에서 이처럼 연속으로 패배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을 직시한 것입니다. 원인을 찾는 중에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가 있었습니다. 나라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총체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진 죄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죄로인해 실패한 것을 깨달은 뒤에 온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게 합니다. 거기에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것이 7장 초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눈물과 통곡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신실히 믿을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 뒤에 이스라엘은 다시 블레셋과 전쟁하였고, 이제 큰 승리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0절과 11절에서 승리를 말하고, 본문 13절에서는 궁극적인 승리를 알리는 선언으로서 블레셋의 굴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 에벤에셀의 신앙과 고백의 기점으로 이스라엘에게 굴복과 승리라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패배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진다해도,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다해도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고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와 낙심과 좌절의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생과 신앙을 역전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패색이 짙더라도, 아무리 가망이 없더라도, 아무리 실패를 반복하여 더 이상 역전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용기를 갖고 그 자리를 박차고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도 이런 굴복과 승리를 위해 미스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은 미스바를 통과한 후에 임한 결과입니다. 이제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회개해야 합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궁극적인 굴복과 승리는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앞에 분명 굴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회개와 참회와 결단으로 미스바를 경험하고 통과하여 새해에는 날마다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회복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라고 말합니다.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고 담대함으로 나아갔던 이스라엘에게 굴복과 승리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에게서 빼앗겼던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의 축복이요, 에벤에셀의 신앙입니다. 에벤에셀의 기점으로 다 뒤돌려지고 모두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잃은 것이 많았습니다. 땅도 많이 잃었지만, 사람도 잃었습니다. 물질도 잃었고, 인재도 잃었습니다. 시간도 잃었고, 마음도 잃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주는 상처요, 흔적입니다. 그런데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이스라엘에게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벤에셀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십니다. 고난과 아픔과 시련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런 회복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사건으로 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욥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 절망과 고통 중에 살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나중에 다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새해에는 그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기도하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시60:1) 이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새해를 회복의 해로 선포하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가 에벤에셀의 고백 속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셋째, 평화입니다. 14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이것이 에벤에셀의 신앙과 고백속에 나타난 마지막 결과입니다. 승리, 회복, 그리고 평화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놀랍게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에 보여주었던 모습은 한마디로 두려움과 공포였습니다. 연일 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가족이 전쟁으로 맥없이 죽었습니다. 나라는 언제 더 큰 위기를 맞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지금 살아있지만 그들은 산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음의 공포와 위기 속에 두려움으로 지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고,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평화가 임했습니다. 마음에는 평안이, 삶에는 평화가, 신앙에는 화평이 임한 것입니다. 그 평화 속에 이스라엘은 모든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세상은 결코 평화를 만들지 못하고,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은 곳곳에 전쟁과 테러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어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보도되었습니다. 한 개인으로 보면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22년 동안 개인숭배와 함께 억압적인 통치를 해 온 중동의 독재자였습니다. 그는 연좌제를 통해 자신의 정적들의 가족과 친구를 모두 처형해 단체로 땅에 묻었습니다. 그는 지난 82년 집권 당시 자신의 암살을 기도했던 두자일 마을 시아파 주민 140명을 잔혹하게 학살했습니다. 그의 이런 삶으로 보면 사형집행이란 결과는 당연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라크내의 종파간의 갈등이 커질 것이고, 종교전쟁으로 번질 확률이 더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관여했기에 테러가 더 자행될 것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피가 피를 부르고, 복수가 복수로 이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공포와 무서움이 2007년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대의 상황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평화를 원해도 되지 않습니다. 유엔을 만들어 중재해도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중의 하나는 바로 ‘내적평안’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지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란 책에서 그것을 잘 알려줍니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잡히지 않을 때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몹시 흔들리고 혼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우리의 내면세계를 질서 있게 정돈하여 평안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염려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의 삶에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한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벅찬 기대감으로 출발하지만, 여전히 안개와 같은 우리의 앞날로 인해, 예상치 못하는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불안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당면한 문제로 염려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 시점에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내적 평안이요, 신앙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을 고백하고, 그 신앙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어떤 것이 우리를 걱정과 염려와 근심으로 몰아갑니까? 이제 우리 모두 에벤에셀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책임지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능력으로 역사 하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내 삶에 힘이 되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모든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 하시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평화의 축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2006년 마지막주일에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신앙의 사자성어는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이 신앙으로 나아갈 때에 분명 승리와 회복과 평화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한해를 마무리하시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