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4
롬 5 : 1 ~ 2
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M.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계시함으로 올려졌습니다.
이 95개조는 마인츠의 대주교가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을 신학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개혁은 독일의 온 국민의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도록 확산되었는데 그 중요한 신학적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둘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셋째, 만인제사장 주의였습니다.
1. 종교개혁의 세 기둥
(1)오직 성경
당시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꽃의 밑받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된 Bulgata역만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부들만이 겨우 읽을 수 있었고 평신도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교회의 전통이 중요시 되었고,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것들이 진리처럼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숭배나 연옥의 교리나 예수님의 동상이나 성지순례를 해야 천국 간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주장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으로(1532) 탄력을 얻게 되었고, 그 후에는 KJV(흠정역, 1611), 한국어 성경은 로스(Ross Version)목사의 번역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원리는 기독교의 뼈대를 바로 구성하게 했고, 개신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의 주장은 영원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주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 개개인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 때에 그 의미와 뜻은 살아나게 됩니다.
(2)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이 주장은 요6:28-29; 엡2:8; 빌1:29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 원리를 깨닫게 된 것은 그의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얻은 결과였습니다.
시 31:1절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갈 3:5-9; 5:5-6;
롬 1:17; 5:1
(3)만인제사장주의(벧전 2:9)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은 신부 없이도 우리가 직접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카톨릭에서 처럼 고해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중보자 되신 주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여러분들을 돕는 조교와 같은 입장입니다.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멘토(Mentor)입니다.
2. 왜 또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가?
(1)본래의 개혁정신이 살아지고 있다.
교회들이 다시 성경보다는 전통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인제사장주의가 아직 확립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병신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들을 깨워야 합니다.
(2)semper reformanda(계속적인 개혁)가 없다.
사실 종교개혁을 완성한 것은 요한 칼빈 이었습니다.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옳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카톨릭의 잔재물인 신부칭호, 의식의 개혁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성례식을 보면 카톨릭의 신학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7가지 성례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례식(영세), 성만찬, 결혼례,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임종도유식(종유례)입니다.
그것도 화체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두 가지만을 성례로 인정했지만 성찬식에서 공존설을 주장하여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장로교는 Reformed church이기는 하지만 Reforming church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인물이 썩듯이 교회들이 이 구석 저 구석들이 썩고 있습니다.
(3)세속적 물결에 교회가 물들고 있다.
지금 세속적 물결이 홍수처럼 들어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다원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란 사라졌고, 모든 것은 다 상대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4:12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또,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4)청교도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본래 청교도 정신은 영국에서 성공회를 절대시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 운동이 청교도운동이었습니다.
카톨릭의 제도, 의식의 일체를 배격하고, 엄격한 도덕, 주일성수, 향락의 제한을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들이 유명해진 것은 1640-60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은 청교도 문학으로 유명합니다.
이 청교도 정신은 네델란드와 미국 건국 초기의 신학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바로 청교도의 후예입니다. 지금 한국의 장로교는 본래의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청교도 정신의 회복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살고 교회들이 삽니다.
3. 어떻게 오늘의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가?
(1)무엇보다도 먼저 평신도를 깨워야 한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교회의 옥 한흠 목사에게서 이 운동이 최근에 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 목회에 평신도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2)청교도 정신의 회복과 함께 절대 신앙, 절대순종, 절대 헌신을 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다원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절대주의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지만 종교란 상대주의에 빠질 때에 힘이 없어지고, 영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다 절대적이란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과 순종과 헌신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이 혹 목사의 독재 내지는 교회의 타락을 가져올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청교도 정신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삼대 절대주의의 의미가 있어집니다.
(3)사경회를 통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이 부흥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당회가 금년의 가을 부흥회를 취소한 것은 차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2006년 3월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한번 사경회를 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기대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4)제자화 훈련을 통해서 평신도의 지도력을 길러야 한다.
교회의 힘은 목회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힘은 평신도들을 길러 일꾼으로 삼을 때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의 활력소는 바로 여러분들, 평신도들에게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화 훈련에서 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이름은 다르지만 이 제자화 훈련이 성경강좌란 이름으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맺는 말
지금 현실은 제2의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정치가 여야의 극단적 대치로 인해서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고, 경제는 타자의욕이 완전 상실 되어서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외국으로 이민 갈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꼭 종교개혁이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다시 본래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을 통해서 새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신성종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M.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계시함으로 올려졌습니다.
이 95개조는 마인츠의 대주교가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을 신학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개혁은 독일의 온 국민의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도록 확산되었는데 그 중요한 신학적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둘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셋째, 만인제사장 주의였습니다.
1. 종교개혁의 세 기둥
(1)오직 성경
당시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꽃의 밑받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된 Bulgata역만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부들만이 겨우 읽을 수 있었고 평신도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교회의 전통이 중요시 되었고,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것들이 진리처럼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숭배나 연옥의 교리나 예수님의 동상이나 성지순례를 해야 천국 간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주장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으로(1532) 탄력을 얻게 되었고, 그 후에는 KJV(흠정역, 1611), 한국어 성경은 로스(Ross Version)목사의 번역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원리는 기독교의 뼈대를 바로 구성하게 했고, 개신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의 주장은 영원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주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 개개인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 때에 그 의미와 뜻은 살아나게 됩니다.
(2)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이 주장은 요6:28-29; 엡2:8; 빌1:29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 원리를 깨닫게 된 것은 그의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얻은 결과였습니다.
시 31:1절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갈 3:5-9; 5:5-6;
롬 1:17; 5:1
(3)만인제사장주의(벧전 2:9)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은 신부 없이도 우리가 직접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카톨릭에서 처럼 고해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중보자 되신 주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여러분들을 돕는 조교와 같은 입장입니다.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멘토(Mentor)입니다.
2. 왜 또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가?
(1)본래의 개혁정신이 살아지고 있다.
교회들이 다시 성경보다는 전통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인제사장주의가 아직 확립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병신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들을 깨워야 합니다.
(2)semper reformanda(계속적인 개혁)가 없다.
사실 종교개혁을 완성한 것은 요한 칼빈 이었습니다.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옳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카톨릭의 잔재물인 신부칭호, 의식의 개혁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성례식을 보면 카톨릭의 신학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7가지 성례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례식(영세), 성만찬, 결혼례,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임종도유식(종유례)입니다.
그것도 화체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두 가지만을 성례로 인정했지만 성찬식에서 공존설을 주장하여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장로교는 Reformed church이기는 하지만 Reforming church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인물이 썩듯이 교회들이 이 구석 저 구석들이 썩고 있습니다.
(3)세속적 물결에 교회가 물들고 있다.
지금 세속적 물결이 홍수처럼 들어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다원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란 사라졌고, 모든 것은 다 상대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4:12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또,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4)청교도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본래 청교도 정신은 영국에서 성공회를 절대시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 운동이 청교도운동이었습니다.
카톨릭의 제도, 의식의 일체를 배격하고, 엄격한 도덕, 주일성수, 향락의 제한을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들이 유명해진 것은 1640-60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은 청교도 문학으로 유명합니다.
이 청교도 정신은 네델란드와 미국 건국 초기의 신학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바로 청교도의 후예입니다. 지금 한국의 장로교는 본래의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청교도 정신의 회복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살고 교회들이 삽니다.
3. 어떻게 오늘의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가?
(1)무엇보다도 먼저 평신도를 깨워야 한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교회의 옥 한흠 목사에게서 이 운동이 최근에 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 목회에 평신도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2)청교도 정신의 회복과 함께 절대 신앙, 절대순종, 절대 헌신을 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다원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절대주의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지만 종교란 상대주의에 빠질 때에 힘이 없어지고, 영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다 절대적이란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과 순종과 헌신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이 혹 목사의 독재 내지는 교회의 타락을 가져올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청교도 정신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삼대 절대주의의 의미가 있어집니다.
(3)사경회를 통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이 부흥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당회가 금년의 가을 부흥회를 취소한 것은 차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2006년 3월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한번 사경회를 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기대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4)제자화 훈련을 통해서 평신도의 지도력을 길러야 한다.
교회의 힘은 목회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힘은 평신도들을 길러 일꾼으로 삼을 때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의 활력소는 바로 여러분들, 평신도들에게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화 훈련에서 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이름은 다르지만 이 제자화 훈련이 성경강좌란 이름으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맺는 말
지금 현실은 제2의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정치가 여야의 극단적 대치로 인해서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고, 경제는 타자의욕이 완전 상실 되어서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외국으로 이민 갈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꼭 종교개혁이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다시 본래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을 통해서 새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