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4
사 6:8-13
박근호 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아마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종교개혁은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밤 비텐베르크 성교회(城敎會, Schloβkirche) ‘성문’에 로마천주교회와 학문적인 논쟁을 벌이기 위해 내걸었던 95개 조항의 로마천주교회의 사면신학(赦免神學, Ablaβtheologie)에 대한 문제제기가 직접적인 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천주교회는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목적으로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건축비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베드로 사면권‘이라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바로 그 면죄부 판매행위와 로마천주교회의 잘못된 사면신학에 대하여 논쟁을 건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적인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출판을 통해서 루터의 95개 조항의 반박문 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단순한 신학적인 논쟁 차원이 아니라 예기치 않았던 역사적인 종교개혁사건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재정확보 수단인 ‘베드로 사면 면죄부(免罪符)’ 판매는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503-1513)에 의해 허용되었는데, 그 후 교황 레오 10세(Leo Ⅹ)도 건축비 확보를 위한 지속적인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루터가 활동하고 있던 독일에서는 알브레히트 대주교(Erzbischof Albrecht von Mainz, 1490-1545)가 ‘베드로 사면’을 위임받았는데, 도미니쿠스 수도회 아버지였던 텟첼(Johannes Tetzel)이 ‘면죄부’ 판매 총책임(총판)을 맡습니다. 텟첼은 “면죄부를 구입하면,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煉獄)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선전했습니다.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면서 땡그렁 소리가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연옥(煉獄)에 갇혀 있던 영혼이 천국으로 튀어 오른다”고 유혹했습니다. 어떻게 동전 떨어지는 땡그렁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연옥에 있던 영혼이 천국으로 튀어 올라 갈 수 있습니까?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건축비 확보 수단으로 ‘베드로 사면 면죄부’를 판 로마천주교회도 문제이지만, 보다 더 큰 문제는 실제로 당시의 대부분의 로마천주교인들이 돈으로 ‘베드로 사면 면죄부’를 구입하기만 하면, 용서받지 못한 모든 ‘죄의 형벌’에서 사(赦)함을 받는다고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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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종교개혁의 내면적인 양면성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로마천주교회의 그릇된 사면신학과 건축비 확보를 위한 면죄부 판매행위에 대한 거부입니다. 또 하나는, 당시 대부분의 로마천주교인들이 돈으로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까지도, 모든 죄가 사해져서 천국에 간다고 믿었던 그릇된 신앙에 대한 거부라는 점입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그릇된 지도자들과 그릇된 지도자를 추종하는 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양면적(兩面的)인 개혁이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 점을 특히 유의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교회 문제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시대의 문제도 그렇지 않습니까? 흔히, 개혁의 대상과 문제는 지도자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자들과 기득권층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극단적입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相對的)인 의(義)와 선(善)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는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포도주와 가죽 부대가 ‘둘 다 보존(保存)되기 위함’입니다(마 9, 17). ‘둘 다 보존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되어야 한다는 ‘변화의 요구’입니다. 그 변화는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물론 내가 그르다고 주장하는 상대편의 변화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동일하게 상대적(相對的)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내 편의 변화도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나와 네가 ‘우리’가 될 수 있고, 나와 너의 ‘둘 다 보전(保全)’이 이루어집니다.
그릇된 가르침을 주는 지도자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릇된 가르침을 맹종(盲從)하는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인 ‘비 복음적인 삶’ 역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레 4, 3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 흠 없는 수송아지 ; 4, 13 이스라엘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수송아지 한 마리 ; 4, 22 백성의 최고 통치자가 죄를 지었을 때 흠 없는 숫염소 ; 4, 27 일반 평민 중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이사야의 말씀 같이, 혹 지금의 한국교회와 우리 시대가 이사야 선지자 때의 시대상(時代相)과 유사한 것은 아닌지요? 이사야 선지자 때의 시대상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인 열심이 그 어느 때보다 특심한 때 이었습니다 – 그러나 수많은 제물과 제사와 분향과 피로 하나님이 지겨워하셨고, 역겨워하셨고, 짐이 되었고, 지치셔서 견디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사 1, 11-15). 둘째, 그 특심한 종교적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못했습니다. 정의가 실종되었습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소돔의 통치자와 다름없었고, 백성들 또한 고모라의 백성과 다름없었습니다. 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 중죄인들이었다는 겁니다(사 1, 10). 셋째,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경고를 받은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 그 그루터기만 남듯이, 그루터기 외에는 다 잘려서 불에 타 죽을 것이라는 심판경고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이사야 선지자 때의 시대상과 오늘의 한국교회와 이 시대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정부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전체인구의 약 절반인 2,200만 명이 종교인구(종교인구)라고 합니다. 이만큼 큰 종교사회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화여자대학의 최준식 교수님이 쓴 ‘한국종교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로는 무속종교(巫俗宗敎),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가 있다고 합니다. 근세종교로는 신흥민족종교로 동학, 증산교, 원불교, 대종교 등이 있고 그리고 기독교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종교양상도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부통계와 같이 우리나라 종교인구가 2,200만 명인데, 그 중에서 기독교가 한국종교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교세가 1,000만 성도 혹은 1,200만 성도라고 자처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종교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들이 아닙니까? 1993년 뉴욕에서 발행한 기독교연감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50개 교회를 선정했는데, 한국교회가 50개 교회 중 23개 교회나 선정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5등 안에 드는 교회가 3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종교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주목받는 세계적인 교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한국사회 속에서 2200만 명이나 되는 종교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브랜드 이미지’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교회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여러 종교들을 주식가격으로 환산한다면, 주가가 어떻게 평가될까요? 그 중, 한국교회의 주가는 상승세일까요? 하향세일까요? 매력 있는 주식일까요?
얼마 전, 2년 전에 개척교회를 시작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 제 가슴에 남은 두 가지 말씀이 있는데, 그 하나는 요즘은 “우리 교회 나오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은 시대라는 겁니다. 말이나 전도지로 전도가 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관계 속에서 나의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단 한 생명의 전도도 어렵다는 겁니다.
저도 동감(同感)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요즘이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부터 기독교는 값비싼 값을 치루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가요? 한 생명의 전도도 어려운 일이지만, 한국의 종교인구 중 그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고 주님께서 혹 묻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매우 중요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망(希望)’입니다. 절망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절망(絶望)하시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역사가 어두워도, 혼돈 속에 빠져 있어도, 비록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해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 되어 하나님을 멀리 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절망하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역사 속에 새겨놓으신 하나님의 흔적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희망사건이었습니다. 중세 천 년을 지배하면서 혼돈과 어두움의 역사를 만들었던 로마천주교회를 보면서도 하나님은 절망하시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중세 로마천주교회로 인해 어두움이 가장 깊었던 그 시점에서 빛을 말씀하셨고, 희망을 말씀하셨고, 구원을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독일 교회와 로마천주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쯔빙글리(H. Zwingli)를 통해서 스위스 독일어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칼빈(Johannes Calvinus)을 통해서 스위스 불어권(제네바)에 대하여 개혁하게 하셨습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를 통해서 억압되었던 인간존재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루터를 가장 가까이서 크게 도왔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은 중세 1000년 동안의 로마천주교회의 그릇된 죄악상을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복음으로 여는 새 시대와 개혁된 교회를 기대하시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희망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역사적(歷史的)으로 보면, 절망(絶望)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희망을 위해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본문 이사야서 6, 11-13절 말씀을 읽어보면, 그냥 겉으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패역한 유다백성들을 향하여 절망하시는 하나님, 탄식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주의 깊게 읽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망과 탄식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보다 더 강렬(强烈)한’ 하나님의 희망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패역한 유다백성들은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힘 있는 집권자들과 기술자들, 왕족들은 다 사로 잡혀가게 될 겁니다. 성읍에 혹 남아 있는 자들은 힘없는 소수의 주민들뿐입니다. 그러나 그 남은 주민들도 결국은 다 불에 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엄청난 재난과 위기 상황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다백성들이 결국은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것 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유다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거기서 말씀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유다백성들이 밤나무 상수리나무처럼 베임을 당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루터기는 남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가장 소망적인 하나님의 희망을 선포하는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가장 어두움 상황에서도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강렬한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생명을 선포하십니다. 제가 다시 만난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고, 구원이시고, 생명이시고, 빛이시고, 길이십니다.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사역도, 예수님의 희망사건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그것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 보면, 예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던 예수님의 관점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마 9, 35-10, 4).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죽게 되었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마 9, 36).
그리고 나서 마태복음 10장에 들어가면, 곧 바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사건의 말씀이 나옵니다.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한 사람 한 사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신학적인 관점을 봅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양 같은 이스라엘 무리들의 고생과 기진함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탄식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탄식은 절망이 아니라, 도리어 절망보다 더 강한 희망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이 무엇입니까? 열두 사도(使徒)로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 중의 열둘이라는 수(數)의 의미가 아닙니다. 열둘의 의미는 예수님의 희망(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유대주의(Judaism)에 병든 목자들(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종교지도자)과는 다르게 부름 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새 일꾼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대안적(代案的)인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라는 겁니다. 열두 사도는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희망사건이었습니다(마 6, 10).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절망해야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위기 속에서 절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절망 중에서 희망을 선포하시고, 구원과 생명과 길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희망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사 6, 13). 그 남은 자들은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한 후에 남은 그루터기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조심스런 역사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관찰해 보면 ‘남은 자들과 남은 자 사상’을 가진 그들은 결국, 소수의 분파주의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부정적인 역사의 교훈입니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만이 의롭고,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바리새적이고, 서기관적이고, 사두개적인 분파주의자(分派主義者)들이 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사성(歷史性)을 상실하면서, 오히려 신앙과 삶의 가치관들이 개인주의적(個人主義)이 되었고, ‘자기 의(義) 중심적인’의 내면적인 신앙과 삶의 형태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그루터기와 남은 자와 같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뜻있는 여러 교회들과 더불어 우리 교회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바른 교회 아카데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바른 교회 아카데미 운동이 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절망적인 한국교회와 이 시대를 향하여,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희망사건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은, 끊임없는 자기부인의 겸손과 역사와 교회와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남은 자 사상’ 운동이 역사성을 상실하고, 개인주의화 되면서부터 분파주의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던 이스라엘 역사의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인 교만 때문입니다. 역사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이 시대에 대하여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치유하고,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겸손과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종교개혁자들이 남겨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는 개혁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 속에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개혁이 결코 완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개혁을 완성한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 스스로도 문제가 많았고, 미완성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시대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개혁이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이 진리를 우리에게 역사적 책임으로 남겨 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종교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로 이 위기 상황에서조차도 절망(絶望)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보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시대와 한국교회와 역사를 향해서 절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희망’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