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4
학개 2:1-9
곽주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크 성문 교회에 써서 붙힘으로서 종교개혁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청에서 가르치기를 면죄부를 사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미 죽은 자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사도 그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서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이렇게 루터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서 붙히기까지 그에게는 몸부림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철야기도 고행 금식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성인의 공로에 의존하기도 했다. 1511년 로마를 방문한 기회에 소위 ‘빌라도의 법정’ 계단을 무릎 꿇고 오르면서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루터는 탑의 경험을 한다. 비텐베르크 대학 동쪽 끝에 위치한 수도원 다락방에서 강의 준비를 하며 성경의 의미를 탐구하던 중에 위대한 발견을 한다. 그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칭의의 교리였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은 빌라도의 법정을 무릎 꿇고 오른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면죄부를 산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는 한 가지 이유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까지, 그리고 일으키는 과정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루터가 지은 찬송가사에 보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이 땅에 마귀들 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이 가사 속에 들어있는 종교 개혁 중에 나타난 그의 고통을 엿볼 수 있다. 큰 환란이 있다. 마귀들이 우리를 삼키려는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고통이 있지만 반드시 이기리로다. 그 나라가 영원하리로다. 이렇게 고백한다.
내일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의 고통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자연의 원리가 곧 하나님의 법칙이다. 내일의 추수를 얻기 위해서는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뜨거운 햇빛 아래서의 고통이 있어야 가을에 추수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라.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셨다.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 피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쏟으셨다.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의 영광이전에는 고통의 십자가 터널을 지나야 된다. 부활의 새아침을 맞기 이전에는 고통의 깊은 밤을 지나야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공식이다. 내일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의 고통이 앞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보라. 오늘의 영광, 오늘의 기쁨을 앞 세우고 내일 망하는 사람이 있다. 가장 확실한 예가 크레딭 카드의 사용이다. 오늘 갖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서 마음껏 카드를 긁어댄다. 오늘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서 마음껏 사서 먹는다. 친구들에게 기분 낸다고 하여 대책도 없이 카드를 긁어댄다. 그리고 이것을 뒷 감당하지 못해 고통을 받는다. 고통을 받을 정도가 아니라 신용불량자가 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종류의 사람이 있다. 지금 사고 나중에 지불하는 방법이 있다. 오늘 영광과 기쁨을 누리고 내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일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나, 예수님의 생애를 보거나, 마틴 루터의 경우를 보면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이 있다는 점이다.
본문에 나타난 학개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였다. 어려움 중에 성전을 짓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의 고통이 있지만 내일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훨씬 크리라.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로다.” 바울은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영광을 비교하고 있다. 내일의 영광에 비하면 오늘의 고통은 적은 것이라고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성전을 한참 짓고 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며 감동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짓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 힘이 들어도 내일에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줄로 믿는다. 내일의 영광에 비교한다면 오늘 힘이 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게 될 줄로 믿는다.
나는 우리 교인들이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성전이 완공되고, 이곳에 하나님의 백성이 가득하고, 지역을 위해서, 한국 사회를 위해서, 세계를 향하여 영향력있게 일하는 모습을 함께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 오래 사십시오. 이런 마음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법칙은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수고가 앞선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칙, 이 사회 구조가 만들어 놓은 법칙 중에 하나는 오늘의 영광, 오늘의 기쁨, 그리고 내일은 신용불량자.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소망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망의 댓가를 미리 지불하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내일의 소망을 위해서 오늘 수고의 땀을 흘리는 자에게 소망이 이루어 진다.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는 자에게 소망이 있다. 소망의 댓가를 미리 지불해야 소망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이같이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고통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고통가운데 멀리서 구경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통가운데 함께 계셔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수고와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에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한다면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은 고통의 현장에서, 수고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우리를 격려하신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겪는 오늘의 수고와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여 주신다. 그러기에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이 있지만, 오늘의 고통보다는 우리는 오늘의 격려를 체험해야 할 줄로 믿는다. 내일의 영광 오늘의 격려가 있음을 마음에 담고 살자.
격려란 마치 마지막 트랙에서 골인지점을 향해 헐떡이며 기진맥진해 들어오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탠드를 뛰어내려 아들과 같이 뜀박질을 하면서 다 되었어 조금만 조금만 이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에게 격려해 주신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기진맥진해 들어오는 아들을 위하여 함께 뛰며 힘을 내라고 말해준다.
여호수아를 보라. 수백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얼마나 무거운 짐이 그에게 있었는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큰 고통이 여호수아의 어깨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영광 오늘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내일의 영광 오늘의 격려가 여호수아에게 있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 차지하게 하리라.”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오늘의 격려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이다. 하나님의 방법이다. 내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의 고통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 중에 오늘의 격려가 있다. 스스로 굳세게 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성전을 짓는 가운데 내일의 영광과 내일의 기쁨을 위하여 오늘의 수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굳세게 하신다.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예전에 한 남자가 길가에서 핫도그를 팔았다. 그는 잘 듣지 못해 라디오가 소용이 없었고, 시력도 아주 약해 신문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품질 좋은 핫도그를 만들어 팔았고, 자신의 핫도그가 얼마나 좋은지 선전하는 간판을 도로 위에 세웠다. 그가 길가에 서서 “선생님, 핫도그 사세요!”하고 말하면 사람들이 핫도그를 샀다. 그는 고기와 롤빵을 더 많이 주문하고, 더 큰 스토브를 사서 더 많은 핫도그를 구웠다. 그때 그의 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라디오나 신문도 안 보세요? 지금은 최고의 불경기입니다. 유럽은 정말 끔찍한 상황이고, 일본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우리 나라는 최악 중에 최악입니다.” 아버지는 “그래, 내 아들은 대학을 나왔지. 신문도 읽고 라디오도 듣고 있어.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고기와 롤빵의 주문량을 줄이고, 광고판을 내렸다. 핫도그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우리는 지금 경기가 아주 안 좋은 상태에 있는 게 분명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우리의 상황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칙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이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계신다. 오늘의 고통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말자. 하나님의 법칙이 있다.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격려가 있음을 확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