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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영교수 2003.12.13 조회 : 346
우리는 하루도 쉬지 않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바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의 위기에서 다른 위기로 넘나들면서 갖가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이것들이 또 나를 흔들 어 놓는다. 후회해도 이미 지나버린 일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 결과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손상이나 상처를 주고 입은 일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내 삶이 정체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자신을 알고자하는 시도는 참으로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며 일생을 두고 그치지 않는 과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노인이 되면 자신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기쁨이 되었거나 행복했던 일들보다는 자신에게 아픈 상처가 되었던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떠올리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질책 혹은 원망과 후회는 결국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많은 문학작품에도 나를 돌아보거나 나를 찾아 떠나는 작업이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어 있다. 사람의 일생이 하나의 여행에 비유된다면 그 여정은 참으로 많은 상처의 꾸러미들로 넘쳐 날 것이다.
최근에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에서 나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한 문학가의 삶을 읽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결코 자신에게 관대할 수 없고, 혼돈과 고뇌에 가득 찬 무거운 삶의 짐을 끌고 다니는 한 사람의 자화상이다. 한편으로 달리 생각해보면 그 사람 안에 가득 차있는 생각과 감정들은 사실 그만의 것 은 아니다. 그것은 그와 만나고 그에게 이야기 해준 주변 인물들의 삶을 모두 엮어놓은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며, 그가 혼자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를 키웠거나,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거나 아니면 그가 인생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만나고, 나를 알게되고, 그리고 나를 떠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안에 모두 다 담아서 그 짐을 끌고 다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존재다.
사실 그것들을 다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 은 무엇인가? 나는 무슨 이유로 이 많은 짐들을 힘겹게 끌고 다녀야하나? 나는 이 짐들을 누구 때문에 혹은 무슨 의무로 지고 다녀야하나? 그 답은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요구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에게 지우는 짐이 사실은 너무나 무거워 견디기 힘들 수 있다. 이 스스로 가두어 놓은 나라는 감옥을 버젓이 걸어 나갈 문은 항상 열려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자유를 찾지 않는다. 혹은 문은 잠겨있 다고 포기하게 된다. 또는 다른 누군가가 와서 이 문을 열어 나가라고 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사실은 그 문의 열쇠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나를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너무 잘못 된 게 많아서요."라는 말로 상담을 청해온 사람이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렁텅이를 내려다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너무나 깊고 심오한 데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들렸다. "사람이 안다는 것은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각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통해 뭔가를 보기 위해서는 우선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생떽쥐빼리는 말에 나는 동감이 간다.
내가 나에 대한 시각을 정한다는 것은 일종의 나와의 화해를 뜻한다고 본다. 그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나를 보려하지 않고 나 자신이 내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서 화해를 이룬다는 것은 내가 버려야 할 이야기를 과감히 버리고,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선택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마음을 넓혀야 할 것이다.
나의 실수와 잘못,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 고 뇌와 실패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재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마음이 보다 가벼워지고 다른 이들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 지. 나와의 화해는 형제적 사랑을 이루어 가는 첫 걸음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관대하지 않으면서 남을 수용하기는 그만큼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와의 화해는 이 세상을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중요한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