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0
고미영교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어떤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지를 담고있는 그릇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하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들이다. 우리의 삶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문화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과 통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바도 우리 자신만의 소망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화가 우리에게 주고 가르치는 것들을 바라게된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이 고스란히 우리의 이야기에 담겨져 나온다.
나는 늘 바쁘다는 이야기를 잘 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바쁘게 살아야 할 환경이 바뀌어도 바빠야 한다는 느낌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은 바쁜 것이 환경 탓이 아니라 나의 정신적 지향인 탓이다. 어느 동료 교수는 책을 읽고 있어도 혹시 이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불안해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문화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삶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야기한다. 이것을 벗어난 이야기는 실패와 낙오를 의미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긴장하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벗어나면 무가치한 인생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며, 감히 그 이야기를 벗어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건강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전 재회한 나의 옛 스승님의 이야기는 한 본보기가 되었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그분은 정신 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학문적인 명성과 많은 업적을 얻었지만 어느새 자신의 일에 지치고 피곤해지면서 그분의 마음속에는 슬픔이 쌓여갔다. 일의 지루함과 삶의 무의미함이 느껴져서 이른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심각한 질문에 부딪혔다. 정기적인 업적평가에서 학장은 그분에게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별다른 의욕이나 업적에 대한 아무런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질문은 자신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진지하게 자신의 일과 삶,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친구는 없고 경쟁적인 동료들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이 항상 시기와 질투 속에서 서로의 거리를 결코 좁히려하지 않고, 업적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서로는 동료 간의 우정이나 사랑, 관심, 자비와는 먼 삶을 살아가며 오직 경계와 긴장 속에서 자신의 경쟁자로서만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동료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그분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런 슬픔과 무관심 속에서 경쟁의 무대를 떠나야 할 것인가? 일생을 함께 한 동료들과 인간적인 끈도 없이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져 버려야하나?”라는 질문이 계속 쏟아지면서 그 분은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마치 이제까지 음지에서 빛을 못 받아 피워보지 못한 꽃과 같이 자신의 마음 안에 다른 사람의 온기와, 정, 진정한 관심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제 삼자처럼 관찰하면서 경쟁하고 싶은 유혹과 남보다 앞서고 싶은 유혹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주변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따스함과 사랑,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과분하게 사랑 받아 왔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슬픔과 피곤함, 무기력에서 벗어나 얼마나 기쁘고 의욕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그 분처럼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는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우리 안에도 아직 피워보지 못한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언제간은 이 꽃들이 빛을 받아 활짝 피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꽃을 발견하고 또 이 꽃을 피우는 날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