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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1-3)
오늘 저는 성찬주일을 맞이해서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주셨습니다. 그러신 다음에, 몹시 번민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지 의심했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앉으며 나직하게 "주님, 그게 누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시고,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고나자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시니 유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나간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찌기 유대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이 제자 중 하나가 되어 그 자리에 앉아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곧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여 죽으시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5)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6)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 16:) 하신 대로,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해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다니…’ 제자들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을 만나서 그들은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먹고 살 문제 때문에 걱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근심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디를 가든지 나사렛 예수의 제자인 것이 알려진 마당에 스승을 잃고 나면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요?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제자들의 근심은 깊어만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제자들이 한 근심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도 사노라면 근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근심의 원인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심에도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근심하는 것이라면 그런 근심은 가치 있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과 더 친밀한 교통을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이런 일로 근심한다면, 그런 근심은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반면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근심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니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고 했습니다.
한편,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은 그들이 주님께 자기들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서 사무를 보던 중에 부름을 받자 곧바로 사표를 쓰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나도, 내 모든 소유가 다 없어져도,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면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요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신다고 하시니 어찌 당황하고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다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난을 앞두신 마당에도 친절하게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떠나시는 이 절박한 문제를 앞두고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언급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충분히 근심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근심을 해결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또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이지,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서 근심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근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만나면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고 했습니다. 그렇게 호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성경에 계시하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정을 다 아시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성경에 이르기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고 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을 믿고 성도님들의 모든 짐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심은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불신풍조가 만연합니다.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을 믿지 못하고, 법원의 판결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평생직장으로 알았던 회사도 못 믿고, 부부간에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불신하고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의심하는 상태로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나중에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언제라도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믿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두 소경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여, 그럽습니다”하니, 예수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셨고 그들은 즉시로 눈을 뜨고 보게 되었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그 옷가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약한 몸을 이끌고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 길 가시는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서 그 옷가에 살며시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에 이 여인의 혈루병이 완전히 낫고 말았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무리가 에워싸고 미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려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많은 사람이 주님의 옷을 스쳤지만 한 사람도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는데, 이 여인이 믿음으로 손을 대었을 때 불치의 병이 고침 받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주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우리의 삶을 주관해 달라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은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믿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성도님들의 모든 문제를 다 주님께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 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갈릴리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에 최선의 해결책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실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근심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떠나 천국으로 가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난날 한국인들은 서독에 광부로, 중동에 기술자로 가서 돈을 벌었습니다. 한국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외국에 간 것을 알았기에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천국에 가셨음을 알기에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목적 없이 떠도는 인생이 아니라 하늘 본향을 바라보고 행진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를 위한 거처를 준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 받은 성도들은 임금의 궁전에서 잔치를 즐기게 되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것은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떠나시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부동산 문제로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는데도 문제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가구 수는 많은데, 집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집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공해로 오염된 이 땅이 아닌 하늘에다 거할 집을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은금이 풍부하고 우양이 많은 큰 부자였지만, 일생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집을 짓고 살 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니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삶이 피곤하고 근심거리가 생길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생각하시고 다시금 마음에 힘과 용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불변하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재림에 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므나 비유’ ‘무화과나무 비유’ 등은 다 주님의 강림에 관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이 묻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제자들을 비롯해서 500여 신자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실 때에 저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밧모섬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세에 관한 계시를 보여주신 후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의 강림에 대한 약속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강림이 그토록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그 때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로 17절에 보면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5장 51절로 53절에는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쉽게 병들고 늙고 깨어지고 결국은 죽는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강림은 이 죄악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들이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사노라면 마음에 근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지금까지 말씀해 드린 대로,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분의 모든 짐을 다 맡기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전화위복의 결과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으며 처소를 예비하시면 다시금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을 생각하시고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고서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 것을 생각할 때 모든 근심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성도님들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님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출처/김양인목사 설교 중에서